시인과 여우의 대결
바쇼에게 빚 갚은 여우
존 무스의 첫 번째 禪 이야기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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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전작 "한 줄도 너무 길다"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게 벌써 15년 된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의 부족함을 메워서 무려 750쪽에 달하는 하이쿠 모음집을 다시 냈다. 일본의 대표 하이쿠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이 짧은 시의 몇 배에 달하는 해설을 붙였다. 130명의 시인들에게서 1,370여 편을 소개했는데 하이쿠이기에 이 정도 분량이 가능하지 싶다. 그밖에 책 말미에는 150쪽에 달하는 해설도 붙였는데 하이쿠에 대한 보다 깊은 소개와 배경, 그리고 서양의 하이쿠 시인들까지도 소개했다. 하이쿠에 굉장히 깊이 빠져있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열정이다. 




좋았던 시들을 따로 정리해 보았다. 


추워도

불 가까이 가지 마

눈사람

 

소칸



달에 손잡이를 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소칸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다음의 시를 썼다. 

"소칸은 어디 갔는가 하고 누가 찾으면 잠깐 볼일이 있어 저세상에 갔다고 전해 주시오"


시인다운 마지막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더 압축적이긴 하지만.^^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바쇼




땅에 묻으면

내 아이도

꽃으로 피어날까

 

오니쓰라

 

다섯 살에 천연두로 숨진 아들을 생각하며 쓴 시다. 바다에 묻힌 아이들은 무엇으로 다시 피어날까...



저 걸인

하늘과 땅을 입었네

여름 옷으로

 

기카쿠

 

벌거숭이 걸인에게서 천의무봉을 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재주 없으니

죄지은 것도 없다

한겨울 칩거

 

잇사

 


이 지구에서 끊임없이 보태기 보다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 건 인간뿐이지 않던가. 재주가 많아서 탈이라고 해야 할까.



줍는 것마다

모두 다 움직인다

물 빠진 갯벌

 

지요니

 

영어의 ‘동물animal'은 ’숨‘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나왔으며, 우리말의 ‘숨’은 ‘삶’, ‘살다’와 같은 어원이다. 숨 쉬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이다. ‘갯벌’은 봄의 계어이다.


사랑도 거기서 출발했지. 삶, 살다...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료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달이건만, 그 달을 줄걸 그랬어-라고 안타까워하던 라이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래도 하이쿠 선집을 읽었는데 하이쿠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겠지? 기억해 두고 싶어서 적어보았다.


하이쿠에는 세 가지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은 앞에서 간단히 설명했듯이 렌가의 훗쿠에서 내려온 규칙들이다. 첫 번째 약속은 5.7.5의 열일곱 자로 음수율을 맞추는 것이다.

하이쿠의 두 번째 약속은, 시가 짧은 만큼 한 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여운을 주기 위해 중간에 ‘끊는 말’을 넣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쿠 용어로 ‘기레지’라 한다. 5.7.5의 어느 한 곳에 여운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어미를 써서 흐름을 끊어 주는 것을 말한다. 끊는 말을 사용하면 읽을 때 여운이 생겨 의미가 더 깊어진다. 대표적인 끊는 말은‘~이여’, ‘~여라’, ‘~구나’ 같은 것이다.

하이쿠의 세 번째 중요한 약속은 계절을 담는 것이다. 하이쿠에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를 계어라고 한다. 계절만큼 인생의 변화, 시간의 한계,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함을 일깨우는 것은 없다. 하이쿠가 계절을 중요한 규칙으로 삼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계절은 단순한 시적 소재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가진 존재를 에워싼 숙명적인 환경이다.

-638~642쪽

 

재미있는 인연도 소개하였다.


일본의 하이쿠가 본격적으로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대이다. B.H. 체임벌린에 이어 R.H. 블라이스가 하이쿠를 집대성해 영역하면서 이미지즘 시인들의 시작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블라이스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문학에 심취한 웨일스계의 이 영국인은 열여섯 살에 이미 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는데 가르친 과목은 놀랍게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였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열일곱 살에는 병역을 거부해 2년간 감옥살이를 했으며, 석방된 후 런던대학에 입학해 고전 문학을 전공했다. 우등생으로 졸업한 블라이스는 인도로 건너갔다가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의 외국인 강사로 초빙되었다. 경기도 숭인면 청량리에 있는 일본식 집에 살면서 말을 타고 음악을 즐기며 학생들을 좋아한 이 괴짜 교수는 채식주의자이자 자칭 원시 불교도로 절에서 참선하기를 즐겼다. 그는 자신의 월급을 학생들에게 나눠 주고 조선인 학생 한 명을 입양해 런던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그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이가 당시 그 대학 학생이던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다.

경성에서 만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블라이스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자와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적국인이라는 이유로 고베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단테를 읽으려고 이태리어를 배우고, 돈키호테를 읽으려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괴테를 읽으려고 독일어를 배우고, 바쇼를 읽으려고 일본어를 배운 열정 넘치는 사람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블라이스는 그곳에서 매일 하이쿠를 읽고 공부하면서 책을 썼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만난 하와이 출신의 미국 청년 로버트 에이트컨에게 선불교를 가르쳤다. 학교 절업 후 괌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그곳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붙잡혀 난데없이 포로 생활을 하던 에이트컨은 뜻밖의 장소에서 블라이스를 만나 제자가 됨으로써 생의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전쟁이 끝난 후 풀려난 에이트컨은 하와이로 돌아가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하이쿠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가서 오랜 기간 선사들 밑에서 수행했다. 201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이트컨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불교인이자 영성가였으며, 핵실험 반대 운동과 양방향 군비 축소 운동, 핵잠수함 반대 운동을 펼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에이트컨은 미국 정부에 세금을 낼 때 군비에 쓰일 몫만큼은 제하고 납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면에서 소로우와 정신이 일치했다. -708쪽



너무 두꺼워서 부담이 되는 책이었지만, 시가 짧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읽을 수 있어다. 읽을 당시에는 이 짧은 구절 안에 이런 의미를 담은 게 대단해 보였지만 그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스토리가 있는 글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 그래서 내가 더 사랑하는 두 책을 소개한다. 역시 하이쿠다. ^^


시인과 여우의 대결 


바쇼에게 빚 갚은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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