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과 여우 ㅣ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50
한성옥 그림, 팀 마이어스 글, 김서정 옮김 / 보림 / 2001년 12월
평점 :
류시화의 '한 줄도 너무 길다'를 통해서 하이쿠를 접했다. 짧은 두 마디, 17글자 안에서 시를 끌어내는 솜씨들에 감탄을 했는데, 여기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를 모델로 만든 예쁜 동화가 있다. 게다가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외국 사람이다. 책을 여는 시작 인사도 나름 '하이쿠'처럼 장식한 이 작가, 몹시 매력적이다. 그림은 동양적이면서 이국적인 느낌으로 일본의 정취를 보여주는데 한국 사람이 그렸다. 작품 전반에 바쇼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진다. 유쾌한 그림책을 들여다 보자!
후카가와의 산 속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던 일본의 위대한 시인 바쇼. 그가 살았던 시대는 1600년대다. 신선처럼 살았다고 해서 배불리 등 따시게 살았다고 상상하지 말자. 유유자적, 자기 먹을 것을 먹고, 자기 잘 만큼 자고, 자기 사는 대로 살면서, 자기 시를 쓴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의 오두막 근처에는 맛난 버찌가 열리는 벚나무가 있었는데, 그 벚나무의 버찌를 여우 친구들이 엄청 맛나게 먹어버렸다. 여우들은 바쇼를 보며 자신들이 더 훌륭한 시인이라고 뻐긴다. 바쇼도 지지 않고 자신이 보통 시인이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여우들은 재밌다는 듯이 바쇼를 바라볼 뿐이다.
결국, 이들은 내기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위대한 시인 바쇼와 그리고 여우의 시 대결 되시겠다!
벚꽃이 눈부시게 핀 봄날에 바쇼와 여우는 다시 만났다. 멋진 시를 한 수 써주면 이 벚나무의 버찌를 다 가져도 좋다고 말하는 여우. 기회는 세 번이란다. 바쇼로서는 손해볼 게 없는 게임! 5월 보름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들은 헤어진다.
사진이 흔들렸는데, 원본 그림은 벚꽃이 정말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딱 봄철의 그 벚나무처럼 느껴진다. 작가님 그림 솜씨가 훌륭하다!
한 달 내내 준비하여 마침내 공개한 시는 바로 이것.
|
|
|
|
자두 향 풍겨
산길 위로 일순간
솟는 아침 해 |
|
|
|
|
(도저히 올릴 수 없는 수준의 사진이라 삭제...;;;;;)
깔끔하고 단정하고 그야말로 먹음직스런(!) 시였건만 여우는 성에 차 하지 않는다. 내달 보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둘.
바쇼는 실망한다. 훌륭한 시라고 여겼는데 한참 모자라다고 하니 기운이 쭉 빠진다.
다시 훌륭한 시 짓기에 빠져버린 바쇼. 밤을 지새워 열심히 준비하여 드디어 걸작 시를 들고 나간다. 그건 바로 요 시!
|
|
|
|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
|
|
|
하이쿠 시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바로 이 시가 아닐까 싶다. 설령 바쇼의 시라는 것을 모른다 하여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 바쇼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려준 것은 가수 홍서범이었다. '김삿갓' 가사 중에 중국의 이태백, 일본의 바쇼!라는 가사가 나온다.ㅎㅎㅎ)
절묘한 그림과 함께 심금을 울릴 것 같건만, 여우의 반응은 영 마뜩찮다! 이제 남은 기회는 딱 한 번! 바쇼는 많이 좌절하고 만다. 한 달 내내 열심히 준비를 했건만,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여우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기어이 마지막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터덜터덜 약속 장소로 가는 바쇼.
휘영청 밝은 달과 우두커니 서 있는 산 그림자, 그리고 어깨가 처진 바쇼의 모습이 보라빛으로 잘 묘사되었다.
마음을 비운 바쇼는 여우를 보자마자 막 떠오른 시를 한 수 읊었느데, 이게 곧 대박이 되고 만다!
|
|
|
|
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
|
|
|
|
여우는 헉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선다. 자신이 대 시인을 몰라뵈었다고, 이 훌륭한 시를 다시 읊조려 줄 것을 거듭 요청한다.
어리둥절해진 바쇼. 대체 지난 번 시와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일까. 여우는 왜 그리 홀딱 반해 버린 것일까?
그림을 보면, 시를 잘 들여다보면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이 귀여운 여우의 마음을 무엇이 움직였는지!
약속대로라면 벚나무의 버찌는 모두 바쇼의 차지이지만, 우리의 신선같은 시인이 혼자 저 벚나무를 욕심사납게 차지할 리가 없지 않은가.
늦여름의 버찌는 바쇼와 여우들 모두에게 훌륭한 선물이 되어주었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들 모두가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