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과 며느리 수당 정정화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갑수의 부킹 정치 때문이었다. 정정화의 '장강 일기'를 텍스트로 잡고 팟캐스트를 진행했는데 일가족의 헌신과 조국애가 먹먹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찰나에 이 전시회를 알게 되었다. 광복절을 끼고서 진행하기 좋은 주제였다.
개화기 지식인이자 관료였던 동농 김가진은 서얼 출신이었다. 그는 서얼치고는 대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 시대는 '기회'의 시기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수모를 겪고, 그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모든 걸 내던지게 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젊은 시절엔 시를 통해 많은 이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글씨(독립문 현판의 한글과 한문 글씨가 정정화의 기록으로는 김가진의 글씨라고 하고, 동아일보 기사로는 이완용의 것이라고 한다. 김가진의 글씨였으면 한다.ㅜ.ㅜ)로도 이름을 날렸던 김가진이었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오랜 외교관 생활로 선진 문물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김가진은 갑오개혁의 주체세력으로 참여했으며, 독립협회 운동에도 가담했다. 평균보다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을 테지만, 1908년, 망국 즈음에 그가 가졌던 국제 정세 인식은 한계가 있었다. 대한협회 회보에 실린 글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병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기우이며 어리석은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대한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병합되던 그 해에 그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치욕스런 작위를 그가 뿌리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의 나이 74세였고,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독립지사다.
비록 서얼로 태어났지만 안동 김씨 명문가 출생이었다. 신분에서 빚어진 사상적 한계라던가, 나이에서 오는 건강의 한계를 핑계로 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작위를 공식적으로 반납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정식으로 작위를 반납했다면 그가 상해까지 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대한제국의 대신이었고 명망 있는 인사가 상해 임시정부로 갔을 때 일제는 무척 타격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1910년, 수당 정정화는 동농 김가진의 아들 성엄 김의한과 혼례를 치렀다. 두 사람은 1900년 생으로 동갑내기 부부였다. 1910년이면, 어휴, 꼬마 신랑에 꼬마 신부였다. 어리기도 했지만 시절이 엄혹하니 신혼의 즐거움을 챙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은 1919년, 아버지 김가진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정정화 역시 그들을 찾아 상하이로 떠났다. 연로한 시아버지를 봉양한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여정은 이후 26년 간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 시절 한국인의 사진을 보면 대체로 5등신인 듯...)
상해로 떠나기 전까지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느 전시회에 다름 없이 평범했다. 그가 살았던 곳, 행적들, 남긴 글씨와 유물 등등...
그러다가 상해로 공간이 바뀌면서 전시장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보다 동적으로, 입체적으로 느낌이 바꼈다. 안동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열차가 재현되어 있고, 창밖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는 황량한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장강일기가 울린다. 기차 안 노란 호롱불은 어둡지만 한가닥 희망도 느끼게 했다. 상해까지 향하는 그 먼길, 충분히 어렸던 정정화는 그 험한 길을 어떤 마음으로 달려갔을까.
거룻배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장강일기의 한대목이 울리고, 어둑한 공간 안에서 산너머 뿌옇게 밝아오는 태양(조명) 빛에 조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정정화가 김구에게 밥을 차려주던 초라한 부엌 공간도 재현되어 있었다. 밥 차려 달라고 청하는 김구의 목소리와, 아이를 잠시 봐달라고 넘겨주는 정정화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한쪽 공간에는 김구의 소지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구두가 어찌나 크던지 사이즈가 300은 되어 보였다. 체격이 큰 만큼 발도 무척 크셨나 보다. 좁은 골목 길에는 빨랫줄이 얽혀 있고, 옷가지도 걸려 있었다. 실감나는 재현이다.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도 같이 만날 수 있었다. 거사 직전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도 보였다. 자신의 시계는 이제 하루면 멈춰야 하는데 훨씬 비싼 시계이니 선생님의 시계와 바꾸자 했던 청년 윤봉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 시계를 보는 내내 김구 선생님은 얼마나 가슴이 저몄을까. 그의 거사가 성공하고, 선생님은 정정화에게 신문과 술 한병을 사오라고 시켰다. 슬프되 기뻐해야 할 아픈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 마음을 얼마나 오래 품고 살아야 했던 것일까. 그 시절의 그분들은......
임시정부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동안 정정화도 이동해야 했다. 시아버지는 1922년에 이미 돌아가셨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의 살림을 계속 도맡았다. 전시장에는 이들이 숨어 지내야 했던 방공호도 재현해 두었다. 이리 어지럽고 황량한 시절에도 아이들은 뛰어 놀고 거침없이 웃기도 했을 것 같아서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가 조금은 아팠다. 보답을 바라고 했던 조국 해방 운동이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보답 없고 대답 없는 역사의 흔적에서 이분들의 헌신에 죄스럽기까지 하다.
강물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는데, 돛대 위에 뮤지컬 영상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아, 정정화'다. 반복되어 나오는 노래가 울컥하게 만들었다. 압록강 건너 님 따라가네....
김갑수 선생님의 책 '압록강을 넘어서'도 같이 떠올랐다. 이 책은 일반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 전업 작가에게 도저히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 출판 유통 문화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신의 책만 취급하는 독자 경로를 만들어 두신 것이다. 오마이 뉴스에 연재할 때는 제목이 '제국과 인간'이었는데, 책으로 출간된 줄 모르고 그걸 다 출력해 두었다. 2부와 3부도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함께 사든지, 복사본으로 읽을 것인지 조만간 결정을 해야겠다.
김의한이 갖고 있던 한국 광복군 대원증이 신기했다. 오른쪽 위쪽에는 김구의 사진이, 왼쪽 아래에는 본인 사진이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다. 한국 광복군에서 김구의 위치가 보인다.
1946년 1월, 정정화와 그녀의 가족은 중국을 떠나 조국으로 향했다. 얼마나 고대하던 조국이었을까. 그러나 부산항에서 그들을 맞은 건 차가운 난민수용소와 미군 병사들이 뿌려대는 DDT뿐이었다. 뿐이던가. 1951년에는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는 죄로 종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왜놈 경찰의 손에 붙잡혀 왔었던 바로 그 종로 경찰서 말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에 헌신을 거듭했던 그녀는 해방된 조국에서 '요시찰인'이 되어 있었다. 약산 김원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ㅜ.ㅜ
결국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수당 정정화. 영상은 백발의 노인이 된 그녀가 백범의 묘소를 찾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자그마한 체구이던지, 저 작은 어깨로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숙연해지고 말았다.
한국 광복군 서명이 담긴 대형 태극기다. '조국'이라는 두 글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조상님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뜨거워진다.
연극 장강일기와 뮤지컬 아 정정화!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시 재연한다면 꼭 보고 싶다. 손수건 준비하고 가리라.
동농 김가진전과 상하이 일기, 그리고 장강일기다. 상하이 일기는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의 책이다. 자료 중에 김의한의 작사집도 보였는데, 명필 달필 아버지에 비하면 그의 한자 쓰는 솜씨는 음....;;;;;;
그렇지만 한글 글씨는 매우 단정했다. 아마도 한자 쓸 일이 별로 없었나 보다. 그럼 그럼....
전시를 다 보고 나올 즈음 갑작스럽게 친구와 약속이 잡혀서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나와야 했다. 정말 좋았더라고, 감동적이었다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방명록으로 향하는데,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씩씩 대면서 자기가 쓴 방명록의 문구를 가리켰다.
헐, 돈이 뎀벼도 이런 짓 자꾸 하지 마라!고 써 놨다.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시간이 덤벼도 이런 데 나다니지 말라고!
보통은 9월로 넘어가서야 8월에 다녀온 곳을 정리할 텐데, 경술국치일이었던 오늘 굳이 이 날의 기록을 남기는 것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태를 보면서 이 아저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 바쳐서 힘들게 조국을 찾아준 조상님들께 면목 없는 하루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이런 조국을 어찌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온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굶주리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친일파의 후손이 자손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권력과 재산을 손에 틀어쥐고 호령하는 세상, 통일된 조국을 갈망하는 이들에겐 가차 없이 '종북'이라 일컬으며 마녀사냥을 해대는 이 땅, 광복절도 모르고 삼일절도 모르는 중학생이 영어 단어 외우기에 급급한 이 나라.
이런 열패감과 이런 상실감, 이런 좌절감이, 임종국 선생님을 친일 연구에 목숨 걸게 했던 저들의 I'll be back! 의 결과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