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애국자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애국자가 있다.”
언젠가 이준석씨에게 들은 얘기다. 그는 지금 새누리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서 이 대목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그의 감동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미합중국의 국민은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든, 그 전쟁에 반대하든 ‘애국자’가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 때마다 ‘빨갱이’ 아니면 ‘매국노’가 되어야 한다.
인구 절반의 빨갱이에, 나머지 절반은 매국노라면, 도대체 이 나라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대로부터 국민 될 자격을 박탈하려 드는 걸까?
나는 ‘국민 후보’인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
물론 문재인-안철수-심상정이 함께 하는 정부만이 이 나라를 미래로 이끌 수 있으며,
박근혜-이회창-이인제가 함께 하는 정권은 이 나라를 과거로 퇴행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은 당연히 나와는 정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 만큼은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아니, 그들의 마음이 어쩌면 나의 것보다 더 뜨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부터 “이 나라에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애국자들과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애국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하자.
언제나 보수당만을 지지하는 어르신들의 생각은 내게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분들은 전쟁을 겪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광주의 상처를 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듯이,
그 분들 역시 직접 경험한 전쟁의 외상을 평생 안고 살아오셨고, 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실 게다.
그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의 유세장에 모인 어르신들은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계셨다.
젊은 세대는 그 분들이 우리의 미래를 흘러간 과거에 묶어 놓는다고 원망하고, 심지어 그들의 고리타분함을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투표참여율로 드러나는 그 분들의 애국적 열정만은 존엄한 것이어서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선거 날 박근혜 후보를 찍으려는 부모님을 효도관광 보내 드리겠다’는 말은 행여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든,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투표에는 모든 애국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설사 지지하는 후보가 나와 다르더라도, 집안의 나이 드신 애국자들과 함께 투표장에 나가자.
나를 부끄럽게 하는 분들이 또 있다.
인도에서, 멕시코에서, 유럽에서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심지어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20시간, 40시간을 걸려 투표장으로 나간 재외국민들.
그 먼 시간을 들여 투표장으로 향하던 그 분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리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의 온도로 서로 경쟁하는 마당.
우리의 선거도 이제 그런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비판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서로 의심하지 말자.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승자에는 영광을, 패자에게는 명예를 주자.
92%에 달한다는 60대 이상의 투표 의향. 그걸 보고 푸념하는가?
안도현 시인의 말대로, 어차피 인생은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그 분들은 전쟁과 산업화의 과정에 제 한 몸 다 태워 기꺼이 연탄재가 되셨다. 재가 되어서도 아직 저렇게 뜨겁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오늘 목욕탕에서 ㅂㄱㅎ가 불쌍하다며 우리가 밀어줘야 한다고(설마 때를??) 서로 고개 끄덕이던 아주머니들, 살짝 짜증이 났었는데 살짜쿵 미안해진다. 그분들보다 더 뜨겁게 나도 내 지지하는 후보를 성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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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2년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의 별세에 부친' 고은 시인의 시구절이 떠오르네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던 고인의 가르침도 되새겨 봅니다.
* * *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

마노아 2012-12-18 02:26   좋아요 0 | URL
바로 그 맥락으로 유시민 씨가 방송하는 걸 조금 전에 들었어요.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시도 울림이 크네요. 김근태 씨도 떠오르구요.

순오기 2012-12-18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씨의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반목보다는 이해와 사랑으로 함께 가야지요.
애국하는 마음이야 다르지 않을테니까요.

마노아 2012-12-18 10:58   좋아요 0 | URL
정권을 잡으면 다 가져가고, 갖지 못하면 모든 걸 잃는 구조는 바뀌어야겠지요. 갈 길이 멀고 멀어요.^^

라주미힌 2012-12-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글에서 애국이란 단어가 보이니까 생경하네요 ㅋㅋㅋ

마노아 2012-12-18 10:58   좋아요 0 | URL
전형스럽나요? 애국이란 단어가 언젠가부터 참 우습게 쓰여왔어요.^^;;;

기억의집 2012-12-1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그래도 닭그네 뽑는 사람들 싫어요. 저는 친정모 시모 다 박근혜인데, 솔직히 저의 부모님이시지만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마노아 2012-12-18 11:00   좋아요 0 | URL
토론회 보시고도 여전히 지지하신대요? 우리집도 엄니 설득하는데 공들이고 있어요. 기독교방송을 늘 틀어놓고 계시는 분이라서 알았다~ 하셨지만 안심이 안 되고 있어요.^^;;

기억의집 2012-12-19 17:30   좋아요 0 | URL
결국 저의 엄마는 2번 뽑았대요. 아우 저 기분 너무 좋아 죽겠어요.

마노아 2012-12-20 16:1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작은 희망을 보았으니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