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 5주

홍콩 출장에서 돌아온 베스(기네스 펠트로)가 발작을 일으키고는 병원에 실려간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아내가 죽는 것을 목격한 토마스(멧 데이먼)은 집에 오자마자 아들마저 똑같은 증세로 잃고 만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죽어가는 사람들과 감염 증세를 보이는 이들이 속출한다. 세계 보건기구에서는 오란테스 박사(마리옹 꼬띠아르)를 파견해 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한 경로를 조사하게 했고,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현장경험이 풍부한 박사(케이트 윈슬렛)를 파견해서 상황을 파악해 보지만 갈수록 막막해질 뿐이다.  

질병의 원인도 파악하지 못했으니 백신은 오리무중, 다만 접촉을 통해서 감염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감염증세가 보이면 즉시 격리조치하는 것만이 최선일 뿐이었다. 사람은 하루에 자기 얼굴만 무려 3천 번이나 만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만지는 컵, 핸드폰, 손잡이, 터치패드 등등 무수한 감염경로가 도처에 널려 있어, 이런 바이러스가 한 번 번지면 문명 자체가 소멸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 정부와 제약회사 등이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칭 프리랜서 기자(주드 로)의 활약(?)으로 시민들의 불안함은 더욱 가중된다. 영화는 사건 발발 2일 째부터 시작해서 두 번의 계절이 바뀌는 지점까지의 과정을 보고서 작성하듯 차분히 내용을 쌓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첫째 날 감염이 시작된 순간을 보여주면서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당긴 다음 끝을 맺는다.  

 

제법 완성도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평점은 왜 그리 낮고 졸다가 나왔다는 사람도 많은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무척 집중해서 잘 보고 나왔는데 말이다. 개인차가 있다지만 좀 속상하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영화의 제목을 이용한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들일수록 감염의 속도는 더 빠르고 혼란의 깊이도 깊기만 하다. 아무 것도 만질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그리하여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의 참담함이라니...  

 

작품 속에는 이름난 배우들이 대거 출동하는데 모두들 관록을 제대로 보이며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연기가 실감날수록 정체불명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더욱이 이러한 질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지만, 그것에 대처하고 또 피해가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어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암담하기까지 했다. 누구라도 이런 재앙 앞에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급에 따른 구원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이런 비극적 재앙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꽤 아찔함을 느꼈다. 이를테면 파워블로거의 영향력이랄까...

그나저나 케이트 윈슬렛의 눈썹은 너무 강렬한 것이 마치 문신같은 느낌이다. 국내 배우로는 김정화가 꼭 그런 눈썹을 가졌다. 주드 로는 셜록 홈즈와 같은 시대극에서의 느낌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말끔한 옷차림의 신사로 다시 만나고 싶다. 오란테스 박사로 분한 마리옹 꼬띠아르는 인셉션으로 만난 배우인데 여전히 고혹적인 미모를 자랑한다. 다음 번엔 '다크나이트 라이즈'로 만날 테지. 무척 기대하고 있다. 맷 데이먼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그는 아빠로 나와도 멋지기만 하다!) 

 

 

 

 

영화를 보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강풀 작가의 '당신의 모든 순간'도 함께 떠올랐다. 정체 불명 바이러스가 퍼지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버려 모든 문명의 기능이 정지되고 정보가 차단된 비극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아 여전히 국회에서 싸우고 있다는 국회의원까지 등장했던 이야기 말이다. '숙주'를 매개체로 해서 인간을 순식간에 점령했던 것을 떠올리면 기생수도 비켜가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자면 생명을 매개체로 악마가 이동했던 '다크 엔젤'도 떠오른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로는 아웃 브레이크도 있고, 급속도로 번지는 바이러스의 속도를 생각하면 얼마 전에 본 '혹성탈출-진화의 시작'도 중첩된다.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우리가 가파르게 쌓아올린 문명의 이기가 다시 우리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시켜 준다. 

 

과학자 윌(제임스 프랭코)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고자 인간의 손상된 뇌기능을 회복시켜주는 ‘큐어’를 개발한다. 이 약의 임상실험으로 침팬지들이 이용되었는데 엄청난 두뇌회전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 침팬지는 임신중이었고, 그 바람에 과잉반응을 보여 결국 사살된다. 실험은 중지되었고, 새끼마저 죽을 위기였지만 윌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집에서 어린 침팬지를 키우게 된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는 그날 세익스피어를 읽으셨는데, 그 바람에 이 침팬지의 이름은 시적 되었다. 애완동물보다 가족같은 느낌으로 함께 살며 성장하게 된 시저. 그리고 큐어의 힘으로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한 채 몇 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은 재발했고, 큐어의 문제점도 발견된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시비가 붙은 아버지를 도우려던 시저가 이웃 사람을 공격하는 바람에 보호 시설로 보내지게 되고, 그곳에서 시저는 자신과 같이 잡혀 있는 유인원들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제약회사와 인간 사회에 대한 혐오감을 품고 인간들과의 전쟁을 결심한다.  

혹성탈출은 침팬지가 저렇게 섹시하고 멋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자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우친 선동가이자 정복자에 가까운 침팬지의 이름이 '시저'라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시저의 역할을 해낸 배우는 앤디 서키스인데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골룸 역을 맡았던 그 배우다. 이쯤 되면 비인간 전문 배우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침팬지의 유연한 몸놀림이 그의 빼어난 연기와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의 힘으로 영화에 역동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게 한 원작 영화에게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꽤 자주 TV에서 방영해 주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본 적이 없다. 기회가 되면 원작 영화부터 찾아보리라. 

그간 많은 바이러스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100년전 스페인 독감으로 올라갈 필요도 없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류독감이나 신종 플루니, 구제역이니 하며 많은 생명들을 앗아갔었다. 그렇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생하지 않아도 사실 재수 없으면 죽기도 하는 위험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무언가에 너무 집착해서 현재를, 오늘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일이 덧없다는 느낌을 자꾸 받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번엔 영화 푸른소금이 겹쳐버렸다. 

주인공 두헌(송강호)은 조직 세계에서 발을 빼고 식당을 차릴 생각으로 요리 학원에 다니며 나머지 시간은 그저 바다만 바라보며 지내는 중년 사내다. 그는 발을 뺐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모시던 보스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으면서 그를 후계자로 점찍어버렸다. 이전부터 그를 감시할 목적으로 같은 요리학원에 다니던 조세빈(신세경)에게 이제 그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부상으로 그만두었지만 전직 사격선수로 빼어난 저격술을 가진 세빈은 두헌을 죽이지 못해 망설이다가, 룸메이트가 납치를 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어느새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알지만, 도망치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한다. '푸른' 이미지가 주는 창백하고도 슬픈, 그리고 서늘한 느낌이 영화 전반에 깔리고, 무엇보다도 푸른색을 강조한 영상미가 무척 돋보이는 영화였다. 

 

워낙 주변의 악평이 심했기 때문에 전혀 기대 없이 보아서인지 생각보다 볼만했다. 다만 영화가 너무 긴 게 흠이었는데 20분 정도만 잘랐더라면 좀 더 압축적인 긴장감을 보태며 흥미를 돋우지 않았을까 싶다. 대부분의 캐스팅은 좀 너무 뻔해서 식상했는데 천정명 캐릭터가 잘 어울리면서 호감을 주었다. (덕분에 공주의 남자 끝나고 하는 천정명 주연의 드라마가 기대가 되려 한다. 제목은 모르겠다...;;;;) 그리고 신세경이 분한 '조세빈'은 영화의 캐릭터와 인물 이름이 너무 안 어울리는 흠이 있었다. 게다가 영화의 결말이 지나치게 낭만적이어서 지독히 영화스럽지만, 주인공이 던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금' 세가지는 이 영화가 내게 준 아주 값진 선물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좋아해 마지않는 황금, 그리고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소금, 그리고 '지금' 말이다.  

혹성탈출과 컨테이전과 푸른소금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지금'이 되겠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지 거듭 되물어 볼 일이다. 지금 해야 하는 말, 사랑해, 지금 해야 하는 말, 고마워, 지금 해야 하는 말 미안해!까지 말이다.  

상업영화의 룰과 공식을 제대로 따르는 영화들이었지만, 보고 나서 따라오는 느낌과 감동 등은 주관적이고 철학적이게 되어버렸다. 영화가 선사해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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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3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영화가 잔뜩 쌓여만 가네요. 영화를 볼 때 너무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든 감동 받을 만한 장면 찾다가 제 풀에 실망하게 되어요. [컨테이젼]은 기대감을 낮추고 봐야 하는데... 제가 케이트 윈슬렛 참 좋아해서, 기대감 낮추기 힘들겠어요;;

그런데요, 모 국어학 교수님이 [혹성 탈출]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원숭이는 인간이랑 구강 구조가 달라서 언어를 말할 수가 없다나요. 유전자도 다르대요. HOKP2라나 뭐라나... 그래도 뭔가 백퍼센트 안도감은 들지 않네요 ( '')...

마노아 2011-09-30 13:0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대가 없어서 푸른소금이 괜찮았어요. 컨테이전은 나름 기대를 했는데 평점이 너무 낮아서 의아해하며 봤답니다.
혹성탈출처럼 말을 하는 건 저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세계지도에서 번져가는 경로를 보고 나니 너무 아찔해서요. 앞의 일은 불가능해도, 뒤의 일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거든요. 일찍 자리를 차고 나간 관객은 못 봤을 수도 있는 한 컷이었어요.^^

hnine 2011-09-30 16:47   좋아요 0 | URL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는 98.7% 동일하답니다 ^^

마노아 2011-09-30 22:27   좋아요 0 | URL
우와, 그 정도로 흡사한가요? 기대 이상의 확률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