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1차 아편전쟁은 난징조약으로 마무리 되었고, 그 결과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었다. 8월 29일의 일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은 강제병합되었다. 역시 8월 29일의 일이었다.
중국에게도 우리에게도 수치를 안겨주었던 이 날짜는 내게 아빠와 이별한 날로 기억된다. 위암 판정을 받고 9개월 만의 일이었다.
난 아빠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성격이나 체형 등도 아빠와 닮은 듯하다.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뵌 아빠의 친구 분은 나더러 웃는 모습도 닮았다고 하셨다. 그랬을까? 그랬을 것 같다. 아빠 딸이니까.
연기자들은 갑작스레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되면 어떤 기억을 떠올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숙련된 연기자라면 그런 과정 없이도 저절로 눈물이 날 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아빠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벌써 14년이나 지나서 이제는 좀 옅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아빠에 대한 기억들은 아프기만 하다.
최근 몇 달 동안 다이어트 하면서 금지식품이 참 많았다. 그 중 하나가 '팥빙수'였는데, 며칠 전에는 올 여름을 팥빙수 한 번도 못 먹고 지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집앞 빵집에 가서 팥빙수를 포장해 왔다. 주문하고 보니 과일빙수의 칼로리가 더 적게 나와서 아뿔싸! 싶었지만 그래도 빙수는 팥빙수지!하며 결국 맛나게 먹었다. 팥을 좋아하는 나는 얼음도 좋아해서 팥빙수를 아주 사랑하지만, 팥빙수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서 마음이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6학년 때였는데, 어쩌다가 집근처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사준다고 아빠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셨다. 따라 들어가면서 나는 조그마하게 물어보았다. 아빠, 돈 있어?
아빠가 빙수를 두 개 주문하고 마침내 빙수가 나와서 먹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두 번이나 더 물어보았다. 아빠, 돈 있어??
어렸던 나는 아빠가 빙수 사줄 돈이 없을까봐 여간 걱정이 된 게 아니었다. 빙수 사줄 돈이 없었으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인데,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나는 아빠 주머니에 돈이 없을까봐, 나중에 빵집 사장님께 망신 당할까봐 맛있는 빙수를 먹으면서도 너무 걱정이 되었다. 아빠는 돈 있다고, 걱정 말고 먹으란 말은 해주지 않았다. 난 만약 아빠가 돈이 없으면 집까지 후다닥 뛰어가서 엄마께 돈을 타와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근데 엄마도 돈이 없으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깟 빙수 하나 먹으면서 아빠 돈 있냐는 소리를 세 번이나 물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은 아빠가 얼마나 아팠을까는 나중에 생각할 수 있었다. 오래오래 생각이 났다. 그게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인데, 팥빙수를 볼 때마다, 먹을 때마다 늘 생각났다. 그때 미안했다고 이제는 말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아빠는 평생 가난하셨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돈 좀 벌어볼까 싶으면 사기를 당했고,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도 공사장에서 일을 하셨다. 평생 밥투정 반찬 투정 하는 법 없으셨고, 너무 과묵하셔서 돌아가실 때도 자식들에게 말씀 한 마디 남기지 않으셨다.(이건 좀 심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으면 엄마가 물어도 아빠, 아빠가 물어도 아빠!라고 대답하곤 했던 나.
무려 마흔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는데도 극구 존댓말은 쓰지 않아야 더 친근한 거라고 박박 우기던 나.
그리고 무뚝뚝한 아빠에게 말 걸기가 취미였던 막내딸은,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공부라고 생각했다. 해답서 보고서 혼자 풀어보아도 될 수학문제도 아빠에게 물어보았고, 아빠는 오래 전에 공부했던 것일 텐데도 고등학교 수학문제도 척척 풀어주셨다. 아빠가 가장 신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한자였다. 한자 시험 보기 전날엔 아빠와 함께 밤을 새며 공부했다. 나 혼자 공부하는 편이 능률면에서, 또 시간 면에서 더 유익했겠지만, 자전찾기보다 아빠에게 물어보는 편이 즐거웠고, 아빠도 기꺼이 내 공부에 동참해 주셨다. 당신께서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아빠도 모처럼 즐겁지 않았을까, 나는 멋대로 짐작했었다.
그게 지나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아마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시점이어서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빠, 불감증이 뭐야?" 라고 질문을 했더니 아빠가 머뭇머뭇거리면서 당황해 하시더니, 몰라도 된다-하셨다.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아빠의 난처함이 이해되었다. 아빠 쏘리!
어제 말고 그 전주 나는 가수다에서 인순이는 '아버지'를 불렀다.
처음 출연한 가수가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하고, 그게 또 인순이라면 누구나 1위를 쉽게 점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노래 제목이 '아버지'라니, 당연히 모두의 가슴을 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도 그랬다.
인순이 "아버지"
한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아빠가 떠나시던 그 날에 나는 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지망은 떨어졌어도 2지망은 붙었는데, 합격하고도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재수를 해야 했던 게 억울하고 분해서 병석에 누운 아빠를 참 미워했던 봄날이 지나고, 그래도 설마 울 아빠가 돌아가시지는 않을 거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던 여름날이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영어 수학 강의를 들었는데, 수업 시작 직전 삐삐를 통해 82828282문자가 연달아 날아왔다. 덜컹!하고 가슴이 주저앉는다. 집에까지 어떻게 돌아왔나 모르겠다. 하필 그때 우리 집은 산꼭대기 집이었고 숨이 턱에까지 차서 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아빠에게 외쳤다. 막내 왔어!
그 한마디에 아빠의 고개가 내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간 사람은 나였다.
너무 말라서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그 눈에 담고 사연 많던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 날이 8월 29일이었다.
하늘나라에서 아빠가 보시기에 답답하지 않게, 안쓰럽지 않게, 애타지 않게 내가 잘 살아야 하는데, 자신있게 내 걱정 말라고 나 끄떡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 잘 살지 못해서 죄송스럽다.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봐줄 아빠라는 것을 알기에 안심이지만.
자전거를 잡은 손을 이미 놓은 아빠지만, 아직도 잡고 있다고 믿으며 페달을 밟는 딸처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련다. 내가 씽씽 달릴 때 대견함과 섭섭함을 함께 느낄 아빠를, 그리고 이제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