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스파냐 공주의 생일 ㅣ 세계명작 그림책 7
오스카 와일드 원작, 에피 라다 그림, 박수현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11월
절판
낮에 도서관에서 두산 칼라이가 그림을 그리고 김서정 씨가 번역한 '공주의 생일'을 읽었다. 똑같이 오스카 와일드 원작이고, 좋아하는 김서정 씨 번역이었음에도 지나칠 정도로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린이 책으로 분류하기에는 글밥이 너무 많았고, 원화를 직접 보고 오신 김서정 씨는 그림의 황홀함에 반했다지만 내 취향의 그림도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다른 작가의 그림으로 내게도 책이 있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다시 읽어봤다. 원전이 같으므로 내용도 같지만 만연체 분위기를 좀 더 짧게 다듬었고, 이야기도 헤치지 않는 수준에서 조금 줄였다. 확실히 내용이 머리에 더 잘 들어온다. 그리고 그림도 나로서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12살 생일을 맞은 에스파냐의 공주. 왕비는 출산 6개월 만에 세상을 떴고, 그후로 죽은 왕비만 그리워하며 거의 폐인 수준이 되어버린 임금님. 왕위도 내놓고 싶었지만 동생 페드로를 따라다니는 무서운 소문으로 선뜻 그러지도 못하는 임금님을 공주는 삼촌보다도 무서워한다.
공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갖가지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그렇지만 가짜 투우는 시시했고, 정교한 인형 놀이도 공주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지는 못했다.
집시들의 공연에 이어 무대로 내쳐진 인물은 볼품없는 생김새의 난쟁이.
사냥꾼들이 숲에서 찾아내어 궁으로 데려온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숯쟁이였는데 사냥꾼들이 아들을 데려가자 오히려 반가워했다지 뭔가.
아버지마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여긴 이 난쟁이가 공주님을 웃겨버렸다.
그런데 이 순진한 난쟁이는 공주님이 내민 하얀 장미를 순수한 호의로 착각하고 말았다.
난쟁이는 자신이 살았던 숲으로 공주님을 모시고 가서 내내 즐겁게 만들어줄 궁리를 했다. 그럴 자신이 있었고, 그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씨에스타를 즐기는 동안 놀이는 잠시 중단되었고,
궁궐 안을 어슬렁거리던 난쟁이는 그만 충격적인 것과 맞닥뜨리고 만다.
어느 방에서 마주친 괴물! 그렇다. 난쟁이는 그 상대를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뒤틀린 등에 커다란 혹이 솟아 있고, 다리는 구부러지고, 머리는 지나치게 크고,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은 가시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 괴물은 자신의 행동을 따라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아아, 그렇다. 난쟁이가 마주친 괴물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었다.
그제야 공주의 웃음이 비웃음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의 환호가 놀림이었다는 것을 슬프게 깨달아버린 난쟁이.
그 충격이 오죽 컸을까. 난쟁이의 이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철부지 공주님은 여전히 자신을 웃겨줘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모든 공주님 이야기가 작위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불만이 있지만,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 공주님 이야기라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가난하고, 장애도 있고, 부모에게도 버림 받은 이 불쌍한 아이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슬픔을 떨구어내도, 그 몸이 차갑게 식을지언정 세상은 하나 변함 없이 예전처럼 돌아간다는 사실이, 찌르르 아파왔다. 오스카 와일드가 살았던 100년도 더 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별로 차이나질 않았던 것 같아서 말이다.
처음 책을 살 때는 '공주' 라는 제목 때문에 둘째 조카 다현양에게 줘야지 했는데, 읽어보니 다현양에게는 무리겠다. 큰 조카 세현군에게 줘야겠다. 설마 공주 이름 들어간다고 싫어하진 않겠지? 조카가 '행복한 왕자'는 알고 있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거기도 '왕자'가 등장하지만 참 슬프게 끝이 났더랬다. 이 책보다는 감동적인 결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