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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무 ㅣ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배유안 지음 / 생각과느낌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초정리 편지로 절대 호감 작가로 등극하신 배유안 작가님의 역사 소설이다. 제목에서부터 역사적 소재에서 이야기를 마련했을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그게 정조 이산과 정후겸의 이야기일 거라곤 생각 못했다. 첫장을 펼치고부터 얼라! 하고 놀랐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정조, 게다가 최근에 성균관 스캔들로 '꿀성대' 별명까지 얻은 정조 임금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물론,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른 정조를 맡은 배우와는 연관성이 거의 없었지만.
작품은 '정후겸'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정후겸은 사도세자의 누이 동생 화완 옹주의 양자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정조 이산과는 사촌이 되는 셈이다. 몰락한 양반 가운의 장자로 태어나 어부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일을 돕지만, 사실은 서당에 가서 글공부 하고 싶어서 온 몸이 쑤시던 아이를, 아비가 화완옹주의 남편인 영조의 부마 집에 보낸 것이다. 그 집과는 먼 친척 사이. 화완 옹주가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잇달아 잃자 정후겸은 의지가지 할데 없이 떨어지는가 했더니 오히려 정식으로 양자 입적되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는다. 더군다나 영조의 총애를 입은 화완옹주가 궁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정후겸의 궁 생활도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인보다 세 살 어린 세손을 만난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고귀한 혈통의 세손과 맞닥뜨린 순간, 또래 동무를 알게 된 즐거움을 눌러버리는 무거운 질투의 감정이 정후겸을 후려친다. 그렇게, 창경궁에서 함께 칼싸움하며 뛰놀던 동무는 무서운 정적으로 성장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와 사도세자, 화완옹주와 정후겸의 이야기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벗어나길 바란 건 아니다.) 다만 주인공이 사도세자나 정조 이산이 아니라 세손을 제거하기 위해 온 정치력을 모았던, 끝내 사약을 받아야 했던 인간 정후겸이라는 것. 그 아이가 가졌던 자격지심과 승부욕과 패배감, 질투와 연민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개의 신선함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세자와 정조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하는 어린이 친구들이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조선 왕조 최대의 비극적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초정리 편지는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재밌고 추천해도 부족하지 않을 창작 소설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지극히 사실적인지라 문학 작품으로서의 묘미는 조금 떨어진다. 그래서 어른에게 추천하는 건 다소 비추.
창경궁 동무는 모두가 동정해 마지 않는 사도세자나 이산보다 정후겸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병든 마음에 연민을 갖게 만든다. 만약 정후겸이 궁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눈앞에서 세손의 성장을 그토록 자극적으로 보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수도 있었을 거라고,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역사적 인물 정후겸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주인공이 아닌 부차적인 인물로 여겨온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매력은 제법 컸다.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품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이야기는 자주 접함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참 마음이 아프다. 며칠 전에 주문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정조실록 차례다. 출고완료 메시지가 왔으니 내일이면 도착하겠다. 또 다시 마음 아픈 이야기를 마주치게 될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