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 3일 1
이주호 지음 / 예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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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언제나 목에 걸리는 이름이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나 왕자가 어디 한 둘이겠냐만은, 그를 죽인 이가 아비였다는 점에서, 또 그의 아들 역시 아비의 이름을 등에 업고 가혹하게 살았던 점을 떠올릴 때 사도세자의 이름은 갑절의 울림으로 아파왔다.  

이 책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병조 좌랑 유문승은 청나라 상인들 틈바구니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이력이 있는 자이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조정에서 어느 당에도 기울지 않는 소신을 가진 자였다. 그가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을 맡으면서 무섭고도 놀라운 음모와 공포 속으로 들어가며 내용은 점점 깊어진다.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팩션 소설의 한 패턴이기도 해서 새롭진 않았지만 살인자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문자 놀이가 재밌었고, 이야기의 흐름 사이사이에 들여다보게 되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법, 문화가 지적 만족감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사도세자의 역사적 진심에 다가가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역사적 '진실'은 우리가 동시대에 살면서 눈앞에서 지켜본 것이 아니니 확언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진심'에는 충분히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잘 설명해냈다. 이 책이 진행되는 사흘의 시간이 너무 리얼해서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지만 각 캐릭터들의 행보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름 끼치도록 노회한 정객 홍봉한의 캐릭터는 독자를 자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작품 속에서 세자는 춘천의 조재호를 움직여 군사를 움직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그가 준비했던 과정임은 분명했다. 뜨거운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서 무려 여드레를 버티다가 죽은 세자. 그를 그토록 견디게 했던 것은 어쩌면 판을 뒤엎어 줄 조재호의 출연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조재호는 오지 못하고 저승사자가 그를 먼저 방문했지만. 

퍼즐의 조각이 거의 다 맞쳐지고, 세자의 결단이 모두 뒤엎어지고, 그가 자신에게 떨어진 운명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책장을 넘기는 손이 떨릴 것만 같았다. 아들을 향한 그의 뜨거운 부정이 절박했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들로서의 그가 서러웠다. 거느렸던 신하를 살리고, 미안했던 충신의 아들도 살리려 한 영조이건만, 자신의 아들은 철저하게 내친 영조의 위선과 위악에 착잡함을 느낀다. 그것이 그의 이름을 경종독살'설'에서 '독살'의 주체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그가 진정 경종 죽음의 절대 책임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과거를 되갚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업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면, 역사는 이미 흘러가버린 선왕 대의 일을 달리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의 힘이었을 것이다. 투명하지 못한 그의 과거. 그가 손잡았던 검은 손. 그리하여 이용당하는 권력의 무거운 채무.  

그러나 아들은 달랐다. 아들은 아비처럼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저당잡히지 않았다.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죽기 일보 직전, 그를 구명해달라 엎드린 세손을 붙잡고 늘어졌다면, 그는 미친 세자로 불렸을지언정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에게 아비의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아들의 가슴에 원한을 새기지 않으려고,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없이 배려했다. 그 극한의 순간 앞에서 말이다. 아들과 아비의 그릇 차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업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랬다. 혜경궁 홍씨가 물었다.  

"저하께서 세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자의 대답은 간결했다.  

"목숨일세." 

그 한 마디가 그의 최후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를 강변했다. 그 이상 그가 지켜낼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고 최상의 선물이었고, 최대의 사랑이었다. 절절함이 사무쳐 독자는 울고 싶었다.  

작품의 마무리는 또 얼마나 문학적이고 극적이었던가. 

지난 밤을 생지옥이라 표현한 혜경궁에게 세자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떠하냐고.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다.  

"한가한 날(閑中)이 될 것입니다." 

작품 속에선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에 혜경궁 홍씨가 보태준 역할을 잘 설명해 주는 단어였다. 먼 훗날 그녀가 쓸 책 제목뿐 아니라.   

여러가지 비밀들이 오래오래 감춰져 있다가 작품의 말미에 드러나지만 유문승의 존재가 드러나는 장면도 꽤 압권이었다.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잘 짜맞춘 작가의 솜씨에 감탄했다. 두권 분량의 꽤 긴 소설로 호흡이 길어서 추리 기법으로 진행하지만 오히려 앞부분은 긴장감이 덜했다. 오히려 가상의 이야기보다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 독자는 더 큰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는 와중에 감정이입이 더 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은 자주 받곤 하지만 이 책도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스릴러로서, 또 감동의 드라마로서 구색이 잘 맞을 듯하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울고 나올 지도 모른다. 그리고 'IF'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 의미 없지만, 그래서 더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그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리며 우리 역사의 긴 장을 되새겨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지금 그렇게 해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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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1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잼나겠다.... 이거 소설인거죠? 흠..

마노아 2010-08-14 12:31   좋아요 0 | URL
소설이에요~ 미스터리 역사 추리 소설이요.ㅎㅎㅎ

순오기 2010-08-15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인조처럼 손자까지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어요.
비록 짧은 재위지만 조선에 정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고백만 봤는데, 이 책은 더 극적일 거 같네요.

마노아 2010-08-15 08:32   좋아요 0 | URL
적어도 인조는 미화되진 않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이 책이 두 권짜리라 제법 긴데 앞에 살인 사건 추적 부분이 호흡이 길어 자칫 지루할 위험이 있어요. 오히려 뒷부분 사도세자와 세손의 이야기가 짧지만 가장 긴박했어요. 뒷심이 좋았지요.^^

치유 2010-08-1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뭘 읽어야 할까..생각중이었는데 찾아서읽어야겠어요.

마노아 2010-08-16 13:13   좋아요 0 | URL
헤헷, 저는 무척 재밌게 읽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