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SF 소설이 많이 그렇듯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대결구도를 다루고 있어 이제는 식상할 수도 있건만, 독특한 스타일로 그 식상함을 지혜롭게 비켜나간다. 주인공 아낙스(아낙시맨더)는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관들 앞에서 네 시간에 걸쳐 시험을 본다. 한 시간씩 지날 때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잔뜩 긴장해 있던 아낙스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자신의 생각을 더 논리정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시험의 끄트머리에서 모든 인식을 뒤엎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9쪽의 비교적 짧은 페이지 안에서 미래 공화국의 모습과 대전쟁, 대역병의 창궐, 인간게놈지도 등등, 온갖 설정과 이야기가 난무하는 까닭에 1.2교시 시험을 마칠 때까지는 꽤 어지러웠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먼저 읽고 나서야 생각이 정리될 정도로 말이다. 공개된 내용을 가져와보면 이렇다. 

소설 속 2058년에는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강력해진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이 무너지고 언론이 공포를 유포하면서, 대중은 음모론에 마음을 빼앗겨 이웃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이때 전쟁의 먹잇감이 될 사건이 발생한다. 태평양 영공에서 미국이 중국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3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대유행하면서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위기에도 기업가 플라톤은 남태평양의 섬을 사들여 자신의 공화국을 축조한다. 플라톤은 섬 주위에 높은 해양방벽을 쌓아 전쟁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외부세계에서 공화국을 보호했다. 주민들은 게놈 정보에 따라 신분이 나눠지고 이제 공화국에선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란 전혀 없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완벽하게 구현된 셈이다. 주민들은 선택과 의지를 국가에 넘겨주는 대신에 안전과 풍요를 보장 받았다.

소설의 제목에도 들어간 2058년은 소설에서 액자식 구성으로 등장한 아담이 태어난 해다. 그의 이름이 '아담'인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소설의 제목 '제너시스'가 '창세기'를 뜻하고 있으니 제대로 짝을 맞춘 셈이다.  

플라톤이 구축한 이 세계에서 게놈지도에 따라 가장 우등 계급은 '철학자' 계급이다. 가장 영리한 아이들이 철학자 계급이 되고 여기서 강등된 그룹이 군인 계급이다. 아담은 철학자 계급이었지만 십대 때 분리 거주하고 있는 여자들의 영역에 잠입했다가 좌천되어 해안 경계를 서는 보초병이 된다. 스무 살이 된 아담은 뗏목을 타고 공화국으로 다가오는 소녀(이름은 이브다!)를 발견하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전염병을 퍼트릴 수도 있는 외부인을 즉각 사살해야 했지만, 오히려 사격을 강요하는 동료를 죽이고 소녀를 피신시킨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아담. 공화국은 그를 중요 범죄자로 다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모두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도 없게 된 난감한 상황!  

'변화란 곧 파멸이다.'라는 강령을 가진 공화국에서 아담의 돌발 행동은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인공지능 로봇 분야에서 문제가 있었던 로봇의 새 버전 실험이 필요했던 위원회는 이 로봇 아트와 아담을 한 공간에 붙여놓았다. 3교시부터 시작되는 문답에는 아담과 로봇 아트의 문답이 주 내용인데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연상시킨다. 1교시 시험 직후 쉬는 시간에 마주쳤던 또 다른 수험생의 이름이 '소크'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담과 아트의 문답은 철학적 사유를 주로 담았지만 조금은 변죽만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트가 현 인간을 네 번째 창조물이라며 파격적 진화론을 펼친다. 아담의 주장도 옳았고 아트의 주장도 옳았다. 그랬기에 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험 시간에 그동안 삭제되었다고 알려졌던 아담의 마지막 비공개 기록에서 아담은 아트를 끝내 인정하고 말았다. 사실 여태 버틴 게 용하기는 했다.  

이 책의 소갯말 중에서 마지막 반전이 주는 놀라움이 크다고 해서 읽는 동안에 계속해서 끝마무리를 상상했다. 아담이 사실은 알고 보니 진짜 로봇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트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상상 말이다.  

미리 얘기하자면, 모두 어긋났다. 무언가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반전인 것은 맞지만 그 규격의 차이가 매우 컸다. 그리고 그 반전의 전율이 너무 커서 우왓! 소리가 다 나왔다. 상상 이상이었다. 별점으로 얘기하자면 앞 부분에서는 별 셋과 별 넷을 오가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면 마지막 반전의 정체를 알고서는 바로 별점 다섯으로 승격되는 느낌? 어쩐지 맥이 탁 풀리면서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미래 사회를 낭만적으로 상상해낼 수 없는 현실의 균열을 아는 까닭이다.  

책을 다 읽은 뒤 다시 표지를 살펴보았다. 바다 위의 경계막과 출렁이는 금빛 머리칼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그리고 원죄... 그 모든 상징들을 제대로 녹인 작가 버나드 베켓은 경제학 전공 출신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비범한 소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과 스타일의 이 작가는 그러나 문학성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고, 신시가지로 내려오는 길을 함께 걸었다. (80쪽)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저 풍경은 해가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다시금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너무도 대단한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계단은 올라갈 수 없는 다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가는 아날로그였지만 그건 설정 때문이니 넘어가자.  

작가도 훌륭하지만 역자 칭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번역을 매끄럽게 한 것도 그렇거니와 우리말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바꾼 문장들이 걸작이었다. 번번이 사전을 찾는 수고를 겸해야 했지만 이런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반면 몇몇 오타도 눈에 띄었다. 31쪽 밑에서 5줄. 그때 경계병 더 급박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조사가 빠졌다. 

역자 후기의 맨 마지막 문장 담아낼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하나의 성취하고 해야 할 것이다.  ^^

뭐, 이 정도는 귀여운 옥의 티다. 책이 워낙 재밌으니 금방 다음 쇄를 찍으면서 수정 되겠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낭만(?)적이었던 부분을 옮겨본다. 아담이 아트에게 힘주어 얘기했던 내용이다.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
너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고 비웃었지만,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주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 나는 무관심이기도 하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아들이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나는 궁금함이고, 또 그 자체로 궁금함을 낳기도 하지. 그래, 세상이 네 버튼을 누르고 네 회로를 훑고 지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훑고 지나갈 수는 없어.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 – 132쪽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lvia 2010-05-1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처음엔 정말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책까지 기대가 떨어지던데
책을 다 읽고 난 후는..... 좀 ㅎㄷㄷ했죠...

마노아 2010-05-16 12:50   좋아요 0 | URL
전 원래 상상력이 빼어난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앞쪽에 철학적 질문과 답변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근데 진짜 정체가 드러날 때쯤 되면 서늘해지더라구요. 진짜 후덜덜이에요.^^ㅎㅎㅎ

Sylvia 2010-05-16 13:35   좋아요 0 | URL
앗, 저 책표지 얘기한거예요.
진짜 저런 표지 별로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읽고 난 후 책 표시를 다시 보니..엄마나! 싶더라고요^^

마노아 2010-05-16 13:45   좋아요 0 | URL
전 책 표지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다 읽고서 무심코 보니 아뿔싸! 싶은 거예요. 그래서 표지가 다시 보였답니다. 근데 다락방님 말씀처럼 진짜 영화 포스터 분위기가 나긴 하네요. 영화 2010도 있었고요.^^

다락방 2010-05-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책 어떻게 읽게 된거에요? 리뷰를 읽어보니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는 마노아님이 관심가질 만 하다고 보여지지만, 책 표지만 보면 음, 전혀 관심가지지 않을 종류인 것 같아서요. 전 영화 리뷰인줄 알았어요. 영화 포스터 같아요, 책 표지가. 영화 포스터여도 저는 보지 않았을 그런 영화요. 그런데 책을 읽고 다시 보면 적절한 표지인가 보군요!

아담이 아트에게 얘기했다는 인용구절이 정말 멋져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이 문장이 특히 더.

마노아 2010-05-16 12:52   좋아요 0 | URL
선물 받았어요.^^
페이지가 짧고 소재가 독특해서 흥미있겠다 싶었는데 앞에 상황 설정을 먼저 알지 않고는 몰입이 좀 힘들어요. 그러다가 뒤에 가면 쭈뼛 서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영화로 만들면... 곤란할 것 같아요. 영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문답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반전이 약해지거든요.^^;;;
아담의 답변이 인상적이지요? 번역하신 분이 대구를 잘 맞추어서 잘 해준 것 같아요. 원작도 좋았을 테지만요.^^

루체오페르 2010-05-1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던 책인데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의미야... 캬~ㅎㅎ

마노아 2010-05-16 23: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내가 바로 의미야... 정말 캬~ 소리 나오는 대사예요.^^ㅎㅎ

같은하늘 2010-05-2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리뷰어하라는거 리뷰 쓸 자신이 없어 패스했는데 아깝다. ^^

마노아 2010-05-20 14:54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지가 적어서 수락했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