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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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일요일, 신원불명의 남자 사체가 강물에 떠밀려 내려왔다. 한 아이가 발견했다. 남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독자는 모른다.  

시간을 돌이켜, 2008년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진영옥은 친정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 채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딸아이의 바이올린 레슨비를 과외 선생에게 전달하라고 의붓 아들에게 부탁하고, 남편의 역정을 모르는 척하며 대만의 그에게 향했다. 남편 김상호의 전처 소생 딸 은성은 집에서 나가 따로 살고 있었다. 동생 혜성과 달리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상처를 온몸으로 항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게 복수라도 되는 양 막무가내 삶을 살던 그녀가 그날도 사고를 쳤고, 동생 은성이 이를 수습하느라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다녀와서 여자친구와의 문제로 다시 외출했고, 동생을 본의 아니게 집에 혼자 두게 되었다.  

아비 김상호는 아들이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집에 혼자 있는 딸 아이를 한 번 들여다 보지 않고 외출을 했다. 비밀스런 거래를 마치고 한밤에 돌아왔을 때, 집은 비어 있었다. 곧 이어 아들이 돌아왔고, 그들은 딸과 배다른 동생 유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에 없어진 것은 레슨비 봉투 하나뿐이고, 아이가 납치된 것인지, 제발로 나갔다가 어떤 사고를 당한 것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다.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의 친엄마, 그리고 사실은 친아빠와 친아빠라고 믿는 남자와, 또 아이와 배다른 형제라고 믿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의 이야기가 실종이라는 미스테리한 전개 과정 속에 녹아 있다.  

언뜻 보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킬 것 같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서초동 방배동 서래마을의 복층 구조의 고급 빌라, 잘 터지는 사업체를 갖고 있는 아버지, 의대에 합격한 아들, 바이올린 영재 어린 딸.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근사한 외피를 두른 일가족으로 보이건만 속으로 속으로 곪아 있는 가족이었다. 아이의 실종이라는 끔찍한 사건과 맞닥뜨리면서 그들 내부의 목소리가, 그들 각자의 인생이 조금씩 드러난다. 서로가 몰랐던, 어쩌면 그들 자신도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가...... 

거의 500쪽에 달하는 긴 소설인데, 미스테리한 전개와 더불어 아이의 생사가 걱정이 되어서 자꾸 초조하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연재 소설이었는데, 매일매일 기다리며 읽었을 독자들은 더 초조했을 것이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고작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 유지의 입장에서 전개될 때, 이야기가 가장 서글펐다. 이 자그마한 아이에게 세상이란 참 버겁고 무겁고 무섭구나...라는 생각. 유복한 환경에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사랑을 쏟아주는 엄마가 있어도 채우기 힘든 빈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엄마 영옥과, 그가 20년 동안 사랑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밍에게서도 보이는 이방인 혹은 경계인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였다. 짱깨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그것이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맞서 싸우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어금니를 꽉 물고 참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섣부르게 주먹을 내질렀다가 제풀에 위태로이 비틀거리는 꼴을 목격당하는 건 더 치명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조금씩 배워갔다. 지상의 모든 아이들이 결국 그러하듯이. – 158쪽

 
   

불법인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더 심각하게 위험한 사업을 하고 있는 아비 김상호는 아이의 실종을 경찰에 알리지 못하고 탐정을 기용해서 풀어나가려 한다. 탐정 문영광은 초반에 제법 냉철한 척을 하며 갖은 폼을 다 잡고 등장하지만, 그도 결국 제 바닥을 드러내는 면면을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다 그랬다. 모두가 자신의 바닥을 마주친다. 그 안에서 제 실존을 찾아냈다면, 그 한계를 딪고 일어설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또 다시 수렁 속을 헤맬 것이다.  

재밌다는 말이 미안할 만큼, 누군가에게는 몹시 상처가 될 법한 소재의 이야기지만 흥미진진하게 숨가쁘게 읽힌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첫 장에 나왔던 사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독자들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목숨에서 사체로 발견되기까지의 과정은 통으로 생략되어 있다. 그의 마음과 희생만 짐작할 뿐이다. 더불어 아이의 실종과 발견 과정의 이야기도.  

몇 달에 걸친 충격적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서로 섞이지 못했던 가족들이 서로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아름다운 결말이다. 상투적일 수 있어도. 가족을 자신의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도 좋고, 비록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더 소중한 일이다. 비록 그 가족을, 그들의 세계를 '너는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주면 되는 거라고, 나에게 뇌까려 본다.  

개인적으로 '달콤한 나의 도시'보다 훨씬 훨씬 좋았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이현 작가는 공지영 작가를 연상시킬 만큼 영리해 보인다.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도 온전히 믿는다. 노고의 흔적이 느껴진다. 2010년에 읽은 세 권의 소설 중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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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희망꿈 2010-01-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찜해두고 있는데요.
마노아님의 리뷰를 보니 저도 사고싶네요.^^

참,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네요.
2010년은 건강하시구요.
늘 행복하시길 바래요.

마노아 2010-01-07 19:47   좋아요 0 | URL
책 무척 재밌어요. 그런데 만약 가족 당사자라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요.
한편의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를 본 느낌이에요. 물론 지극히 '한국적'이란 단서가 붙지만요.^^;;

행복희망꿈님의 2010년도 행복과 희망과 꿈이 가득하길 바랄게요.^^

메르헨 2010-01-0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부터인가 많이 뜨고 있던데...
괜스레 장바구니에 담기 그렇더라구요. 그냥...저 분홍색 표지가 심히 거슬리더라구요.^^
단순하죠?
그런데 마노아님 리뷰를 보면...꼭 ... 읽고 싶어져요. ^^

마노아 2010-01-08 12:02   좋아요 0 | URL
저는 표지도 맘에 들었어요. 분홍색에 약해서인가봐요.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의 분홍 표지도 참 좋았어요.^^;;;

다락방 2010-01-0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현이 딱히 좋지는 않은데 마노아님의 이 리뷰를 읽어보니 이 책을 정말 읽고 싶어졌어요. 다음번 지름에 포함해야겠어요. 불끈!

마노아 2010-01-09 00:21   좋아요 0 | URL
헤헷, 저도 정이현 별로였는데 이 책 보고 나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천상 소설가더라구요.^^

hnine 2010-01-0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 작가는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도 그녀의 스타일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드는 반면, 정이현은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 리뷰를 읽으면서도 들었습니다.
표지가 벌써 눈길을 확~ 끌어요.

마노아 2010-01-09 19:2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더 공지영 작가가 같이 떠올랐나봐요. 확실히 신경숙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