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직동 보림 창작 그림책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 / 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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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광화문 근처에서 거의 십 년 가까이 가게를 했었기 때문에 그 동네는 좀 더 익숙하고 뭔가 관련이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님은 사직동에서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은 엄마가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이었고, 일제시대 때 지어진, 무려 70년이나 된 오래된 집이었다고... 



 재개발 바람이 불기 전에는, 저런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동네마다 가득했었다. 내가 어릴 때는 아파트가 희귀한 집이었고 단독 주택이나 한옥은 동네마다 다닥다닥 붙어서 나란히 키를 대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큰 언니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동네 골목대장 비스무리 했었다. 온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서 저녁 먹은 직후에도 골목을 돌아다니며 함께 놀았었다. 우린 우리끼리도 잘 놀았고, 고무줄이나 공깃돌이나 줄넘기가 있어도 즐겁고 없이도 잘 놀랐었다. 바로 저런 집들 사이 그 골목길에서. 




아마도 사진을 찍은 다음에 그 사진에 일러스트를 입힌 게 아닐까 싶다. 그냥 처음부터 그림이라고 하기엔 너무 사실적으로 보인다.  

아흔이 넘은 정미네 할머니. 엄마 어릴 때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라고 머리를 쓸어주시던 분.  

채소 말리는 게 취미였던 나물 할머니. 벽에도 줄기줄기 채소들이 걸려 있다. 이런 골목과 마당이 너무 귀해진 오늘날이다.  

 

파마 약 사 들고 찾아가면 공짜로 머리를 해 주시던 파마 아줌마와 골목길을 깨끗이 쓸곤 하던 스마일 아저씨. 모두들 너그럽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계시다.  

30년 이상 해오던 해장국 집. 그 조그마한 가게로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고 살았다고... 

조그마한 구멍가게 아저씨, 가끔 사탕을 쥐어주시던 정겨운 모습.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재활용 아줌마 부부. 외팔이 아저씨는 한 팔로도 아줌마보다 빨리 상자를 묶던 솜씨를 지니셨다. 

그렇게 모든 게 정겹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동네의 분위기를 한 순간에 바꿔버린 것의 정체는 이거였다.



재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  

늘 웃던 동네 주민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세 사는 사람은 어떡하냐는 푸념이 들리던 그 시절에도, 

아이들은 뭣도 모르고 즐거웠더랬다.  

친구네 집 가는 58개의 계단을 백 계단이라고 부르면서 가위바위보 하며 오르던 기억.  

뛰어서 일 분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수다 떨며 놀이하며 30분에 걸쳐 올라가던 그 길들이었다.  

높다랗고 힘도 들고 땀도 날 법하지만, 추억이 묻어 있는 그 정겹던 거리. 

동네에는 귀신 집 소리 듣던 빈 집도 있었고, 감 서리 하던 커다란 나무도 있었는데,  

하나 둘 그 자리에 부동산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다.  

반장 할아버지 생일 날 온 동네 사람들 모였지만, 그것이 마지막 잔치가 되어버렸고, 이제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사가 시작되었다. 키우던 개를 데리고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무심코 찾아간 옛 동네는 온통 파헤쳐져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때의 충격이란...... 

기억이, 추억이, 소중했던 무언가가 떠내려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 사직동엔 온통 아파트가 들어차 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닭장 집이. 



작품 속 화자는 다시 사직동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에 살던 그 집일 수는 없다. 사직동 129번지는 모닝팰리스 103동 801호로 변신 완료된 상태.  

깨끗하고 안전해 보이는 집이지만, 이제 재잘되는 아이들은 동네에 보이지 않는다.  

싹싹 비질하는 사람은 스마일 아저씨가 아니라 제복 입은 청소 아줌마. 

옛날 동네 사람들은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 아니, 살지 못한다.  

이곳은 여전히 사직동이지만 그때의 사직동은 아니다. 

그녀의, 그의, 그들의, 우리의 사직동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곳들이 그러하듯이......

독서 권장 대상이 초등학교 3.4학년이라고 나와 있다. 좀 무리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들에게 읽힐법한, 어른들이 이해할 법한, 그래서 더 의미 있을 책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 아플 법한 책이다.  

작품 속 화자는 다시 사직동으로 돌아와 멋져진 아파트에서 살기라도 하지만, 거기서 떠밀린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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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9-07-1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사직동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다니는 말이 '사대문 안에서 태어난 사람' 이지요 ^^;
돌이 되기전에 이사 나왔다는데 전 그 동네를 자세히 몰라요.
한번쯤 가 보고 싶은맘은 있는데 가본적이 없어요..
이 책 무척 땡기네요 :)

마노아 2009-07-11 23:52   좋아요 0 | URL
오, 서울 토박이는 사대문 안에서 4대 이상 산 사람을 의미한다는데, 무스탕님은 토박이 근처까지 가셨군요.^^;;;
고궁 나들이 하게 되면 함 둘러 보셔요. 근대사에서 중요한 건물들이 그래도 아직은 제법 남아 있지요.
이 책 무척 훌륭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쓰기도 했답니다.^^

무스탕 2009-07-12 16:34   좋아요 0 | URL
음.. 그럼 서울 토박이라 할 수도 있겠어요. 저희 증조부시절부터 사직동에 살아았으니까요. ㅎㅎ
근데 그럼 뭐헤요. 지금은 경기도민인걸요 -_-

마노아 2009-07-12 17:18   좋아요 0 | URL
아하핫, 그러네요. 그래도 뭐 서울서 사글세 사는 것보다 경기도에서 내 집 마련하는 게 백 배 나아요...^^

무해한모리군 2009-07-1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곳에 나의 추억도 참 많은데.. 이젠 낯선 곳이 되어버릴까요?

저.. 그런데 저 때문에 이미지 바꾸신 거예요 ㅋㄷㅋㄷ

마노아 2009-07-12 10:2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사진 바꿀려던 참이었는데 동기를 확 부여해 주셨습니다.ㅋㅋㅋ

머큐리 2009-07-12 11:19   좋아요 0 | URL
이 이미지도 이승환 같은데...이승환씨 팬이신가요???

마노아 2009-07-12 12:01   좋아요 0 | URL
넵. 이승환 맞습니다. 노래방에서 '꽃'을 부르신다는 것에 깜딱! 놀랐어요. 그 어려운 노래를 소화하신다니오...^^

같은하늘 2009-07-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그림은 추억이요...
뒷 그림은 씁쓸함이네요...
닭장 같은 집 저도 살고 있지만... 참.....

마노아 2009-07-13 15:10   좋아요 0 | URL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제대로 표현해 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