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해설 부분에 가면 분위기가 싹 바뀐다. 정말 '책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죽은 책의 영혼이 잠자는 책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게니자’라 하여, 회당 안에 수명이 다한 문서와 책들을 묻는 곳이 있습니다. 카이로의 게니자는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책을 던져 넣도록 했는데, 1890년 회당을 수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더니 무려 1,000년 동안 쌓인 책이 썩고 있었답니다. 이슬람교에도 비슷한 곳이 있어서, 파키스탄 퀘타 근처의 칠탄 산 동굴지대에는 약 5,000권의 코란이 흰 수의를 입고 묻혀 있다고 합니다. 코란들은 불침번 서는 신도들의 호위 아래 편안한 안식을 누린다지요. (24쪽)
작가 김훈은 영감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자료'로 글을 쓴다고 했다. 자료가 없이는 아무 것도 쓸 수 없고, 자료가 있다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의 작가도 발칙하고 재밌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는데, 그런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실제 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이었다. 부지런한 작가, 공부하는 작가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해본다. 아니라면, 정말 천재던가.
10편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지역과 시대를 오가며 종횡무진한다. 조선의 이야기가 있고 에도 시대 일본의 이야기가 있고, 중국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하며, 중세 유럽의 필경 수도사가 심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와 장소를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배경의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상상력의 세계는 그 끝이 없다는 듯 작가는 이렇게 넓고 깊은 곳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데 정신이 없을 법도 하건만 유쾌한 피로감이 지식욕을 자극한다.
일찍부터 종이책이 등장한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실로 꿰매는 선장 제본이 발달합니다. 선장은 표지의 오른쪽을 꿰매는 것인데, 일본과 중국은 네 바늘을 꿰매는 데 비해 한국은 다섯 바늘을 꿰매는 것이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또 절접본이라 하여, 넓고 큰 본문종이를 길이와 너비 모두 한 번 이상 접어서 판형을 극소화한 책이 지도첩 등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런 제본방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 뒤에도 병풍처럼 연결한 선풍장이나 나뭇잎처럼 각 장이 떨어지는 엽장본 등 다양한 제책방법으로 책의 아름다움을 살렸습니다.(117쪽)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아홉번째, '책의 적을 찾아서'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가상의 도시에서 책에 관한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 처음에는 최고의 문학작품을 선정한다는 안이 있었지만, 그 최고의 기준에는 서양중심 사고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가 묻어 있었기에 폐기되었고, 다음으로 '최초의 책'을 찾는 안이 올라왔지만 역시나 '책'의 형태가 무형과 유형을 오가는 가운데 폐기되었고, 세번째 안 '책의 적'을 선정하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책의 가장 큰 적은 누구였을까? 언뜻 우리 생각에 분서갱유의 주인공 진시황이 떠오를 법하건만, 막강 후보가 세 명 더 등장한다. 히틀러와 테오필로스, 카라지치가 그들이다.
고발된 네 명의 사람들 모두 막상막하의 책에 대한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칼레도니아 산림청 공무원 다니의 연설에 진짜 적은 뜻밖의 곳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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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판을 지켜보면서, 책 혹은 지식이 미워하는 건 무지가 아니라 또 다른 지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까 고발인은 카라지치가 인간을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야만일까요? 책을 읽는 문명인들은 책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짜 끔찍한 야만을 저지른 자들은 문명인들이었죠. 애초에 문명이란 게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것이고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누가 최악의 적으로 선정될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자 역시 한 명의 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헌신한 열혈독자였죠. 그러니까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 같아요. 책을 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듯 싶습니다.(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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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말처럼 책이 위험하다고, 그래서 책을 핍박하고 관련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책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책의 효과와 영향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뿐인가? 역사를 확대해 보면, 인류의 소중한 문명을 파괴했던 정복자들, 침략자들 역시 모두 문명인들이었다. 그들은 그 문명의 힘으로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믿었고, 그 가치관에 따라 악으로 분류되는 '다른' 문명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문명 자체를 파괴했다. 살아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인간들 말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면 결국 책의 적은 '책' 자신이 되고 만다. 나아가, 인류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말은 책이 곧 인류, 인간, 그리고 우리의 삶이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의하고 나니 한편으로 끔찍하면서 한편으로 뿌듯하기까지 했다. 뭐랄까. 소름이 돋는 섬뜩한 감동 같은 것?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마지막 단편 '순례자의 책'에서 臣은 황제의 명으로 '최고의 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끝내 목숨을 내놓는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만난 책은 온 세상이었다. 온 우주였고, 그 속의 자연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황제를 향해 자신의 불충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렀다. 황제가 그토록 찾던 최고의 책을 가져다 주지 못한 미안함과, 또 그 최고의 책을 자신은 알아차리고 눈감는 것에 대한 충만감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마음이었을까?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번역 일을 하며 책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그 책에 질려 도망치듯 빠져나오기도 했다던 작가. 또 도서관에서 오로지 책만 읽으며 살아낸 십 년 세월. 그 속에서 만난 책과의 인연을 더 많은 독자에게도 풀어내고 싶은 욕심과 자부심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작가의 의도와 바람은 성공한 셈이다. 여기 이 책을 읽고 벅찬 감동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독자 하나 있으니 말이다.
책은 이중 커버로 되어 있다. 너무 평범한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양장본 껍데기의 빛깔이 '순례자의 책'에 더 어울려 보인다. 껍질을 벗겨서 보관하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ps. 옥의 티가 있다. '인피 장정'을 설명하면서 제임스 1세 왕을 죽인 헨리 자넷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암살을 시도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제임스 1세는 1625년에 죽었는데, 헨리 자넷의 인피로 만든 판결문 책은 1606년에 간행되었다. 무죄를 주장했던 그의 진실까지야 알 수 없어도, 사실 관계는 일단 정확하게 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