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읽는 재미가 남달랐다. 상상력의 발칙함과, 문장의 호흡도 맘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펼쳐놓은 방대한 지식의 양이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현학적으로 흐르지 않고 독자의 무식함을 나무라지도 않으며 오로지 '책'에 대한 정보, 역사, 사랑, 양면성을 이렇게 펼쳐보인 작가의 저력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이 책은 책에 대한 헌사이며, 책에 대한 연서이며, 책에 관한 편집증적 집착이다. 한쪽 발을 담그고 나면 남은 한쪽 발도 담그고 싶게 만드는. 

작품은 총 10편의 단편과 각각의 작품의 해설과 동기부여와 추가 설명이 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 추가 설명을 읽으면서 내내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은 소설이면서 인문학서이며, 책에 대한 '백과사전' 노릇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블리오마니아 : ‘책’을 뜻하는 비블리오biblio와 ‘광기’, ‘벽(僻)’을 뜻하는 마니아 mania가 합쳐진 말로 애서광, 장서벽 등으로 번역된다.(102쪽)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는 파피루스였습니다. 파피루스는 잎사귀들의 끝을 맞춰서 풀칠하고 나무막대에 말아 두루마리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볼루멘 volumen 이라고 합니다. 책 한 권을 뜻하는 볼륨 volume 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지요. (116쪽) 

점토판과 거기서 발전한 밀랍판은 필기도구로서 꽤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밀랍판의 재료인 너도밤나무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boc'에서 영어의 ’book'이 유래한 것만 봐도 그 생명력을 알 수 있지요.(274쪽)

 첫번째 단편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은 발상이 아주 재밌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커다란 도서관으로 이루어진 저승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야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 자신의 인생을 표현할 때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고 외치는 무수한 사람들도, 막상 죽어 자신의 생을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라고 하면 난감해하며 남의 완성된 자서전을 기웃거리기 쉬울 것이다. 책 속 인물이 저승의 도서관에서 엄마의 책을 만나고 난 뒤 갖게 되는 충격이 반가웠다. 나도 없고 아빠도 없는 올곧이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의 엄마를 맞닥뜨리는 충격. 일종의 배신감도 들었겠지만 동시에 반성과 부러움도 함께 갖게 되었을 그 감정이 독자는 어쩐지 제대로 상상이 되었다. 우리들의 엄마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해설 부분에 가면 분위기가 싹 바뀐다. 정말 '책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죽은 책의 영혼이 잠자는 책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게니자’라 하여, 회당 안에 수명이 다한 문서와 책들을 묻는 곳이 있습니다. 카이로의 게니자는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책을 던져 넣도록 했는데, 1890년 회당을 수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더니 무려 1,000년 동안 쌓인 책이 썩고 있었답니다. 이슬람교에도 비슷한 곳이 있어서, 파키스탄 퀘타 근처의 칠탄 산 동굴지대에는 약 5,000권의 코란이 흰 수의를 입고 묻혀 있다고 합니다. 코란들은 불침번 서는 신도들의 호위 아래 편안한 안식을 누린다지요. (24쪽)

작가 김훈은 영감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자료'로 글을 쓴다고 했다. 자료가 없이는 아무 것도 쓸 수 없고, 자료가 있다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의 작가도 발칙하고 재밌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는데, 그런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실제 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이었다. 부지런한 작가, 공부하는 작가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해본다. 아니라면, 정말 천재던가. 
 

10편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지역과 시대를 오가며 종횡무진한다. 조선의 이야기가 있고 에도 시대 일본의 이야기가 있고, 중국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하며, 중세 유럽의 필경 수도사가 심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와 장소를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배경의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상상력의 세계는 그 끝이 없다는 듯 작가는 이렇게 넓고 깊은 곳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데 정신이 없을 법도 하건만 유쾌한 피로감이 지식욕을 자극한다.       


일찍부터 종이책이 등장한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실로 꿰매는 선장 제본이 발달합니다. 선장은 표지의 오른쪽을 꿰매는 것인데, 일본과 중국은 네 바늘을 꿰매는 데 비해 한국은 다섯 바늘을 꿰매는 것이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또 절접본이라 하여, 넓고 큰 본문종이를 길이와 너비 모두 한 번 이상 접어서 판형을 극소화한 책이 지도첩 등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런 제본방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 뒤에도 병풍처럼 연결한 선풍장이나 나뭇잎처럼 각 장이 떨어지는 엽장본 등 다양한 제책방법으로 책의 아름다움을 살렸습니다.(117쪽)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아홉번째, '책의 적을 찾아서'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가상의 도시에서 책에 관한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 처음에는 최고의 문학작품을 선정한다는 안이 있었지만, 그 최고의 기준에는 서양중심 사고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가 묻어 있었기에 폐기되었고, 다음으로 '최초의 책'을 찾는 안이 올라왔지만 역시나 '책'의 형태가 무형과 유형을 오가는 가운데 폐기되었고, 세번째 안 '책의 적'을 선정하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책의 가장 큰 적은 누구였을까? 언뜻 우리 생각에 분서갱유의 주인공 진시황이 떠오를 법하건만, 막강 후보가 세 명 더 등장한다. 히틀러와 테오필로스, 카라지치가 그들이다.  

 고발된 네 명의 사람들 모두 막상막하의 책에 대한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칼레도니아 산림청 공무원 다니의 연설에 진짜 적은 뜻밖의 곳에서 나타난다.   

   
 

오늘 재판을 지켜보면서, 책 혹은 지식이 미워하는 건 무지가 아니라 또 다른 지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까 고발인은 카라지치가 인간을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야만일까요? 책을 읽는 문명인들은 책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짜 끔찍한 야만을 저지른 자들은 문명인들이었죠. 애초에 문명이란 게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것이고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누가 최악의 적으로 선정될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자 역시 한 명의 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헌신한 열혈독자였죠. 그러니까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 같아요. 책을 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듯 싶습니다.(252쪽)

 
   

사실, 그의 말처럼 책이 위험하다고, 그래서 책을 핍박하고 관련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책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책의 효과와 영향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뿐인가? 역사를 확대해 보면, 인류의 소중한 문명을 파괴했던 정복자들, 침략자들 역시 모두 문명인들이었다. 그들은 그 문명의 힘으로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믿었고, 그 가치관에 따라 악으로 분류되는 '다른' 문명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문명 자체를 파괴했다. 살아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인간들 말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면 결국 책의 적은 '책' 자신이 되고 만다. 나아가, 인류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말은 책이 곧 인류, 인간, 그리고 우리의 삶이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의하고 나니 한편으로 끔찍하면서 한편으로 뿌듯하기까지 했다. 뭐랄까. 소름이 돋는 섬뜩한 감동 같은 것?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마지막 단편 '순례자의 책'에서 臣은 황제의 명으로 '최고의 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끝내 목숨을 내놓는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만난 책은 온 세상이었다. 온 우주였고, 그 속의 자연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황제를 향해 자신의 불충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렀다. 황제가 그토록 찾던 최고의 책을 가져다 주지 못한 미안함과, 또 그 최고의 책을 자신은 알아차리고 눈감는 것에 대한 충만감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마음이었을까?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번역 일을 하며 책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그 책에 질려 도망치듯 빠져나오기도 했다던 작가. 또 도서관에서 오로지 책만 읽으며 살아낸 십 년 세월. 그 속에서 만난 책과의 인연을 더 많은 독자에게도 풀어내고 싶은 욕심과 자부심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작가의 의도와 바람은 성공한 셈이다. 여기 이 책을 읽고 벅찬 감동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독자 하나 있으니 말이다.  

책은 이중 커버로 되어 있다. 너무 평범한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양장본 껍데기의 빛깔이 '순례자의 책'에 더 어울려 보인다. 껍질을 벗겨서 보관하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ps. 옥의 티가 있다. '인피 장정'을 설명하면서 제임스 1세 왕을 죽인 헨리 자넷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암살을 시도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제임스 1세는 1625년에 죽었는데, 헨리 자넷의 인피로 만든 판결문 책은 1606년에 간행되었다. 무죄를 주장했던 그의 진실까지야 알 수 없어도, 사실 관계는 일단 정확하게 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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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6-3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는 과정에서 에러가 나서 글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순서를 제대로 찾아서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글 쓴 시간이랑 수정하는데 걸린 시간이 비슷하겠구만...ㅠ.ㅠ

turnleft 2009-06-30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재밌겠어요~ >.<

마노아 2009-06-30 07:58   좋아요 0 | URL
너무 재밌었어요. '책'을 소재로 이렇게 무궁한 얘기들이 나온다는 게 몹시 즐거웠답니다.^^

2009-06-30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07-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의 무식함을 나무라지 않는다니 저도 볼 수 있겠네요...ㅎㅎㅎ
재미있을것 같아요...

마노아 2009-07-02 00:10   좋아요 0 | URL
올라오는 서평을 보니 저마다 감상이 다르네요. 당연하지만요.^^
같은하늘님께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순오기 2009-07-0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책 하나로 토론도서로 선정할 예정인데 이 책도 후보로 올려봐요.
작가들은 참 대단해요~ 그 많은 자료들을 알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독서를 할지 짐작해봐요.

마노아 2009-07-02 10:26   좋아요 0 | URL
그 박학다식과 잡학다식에 감탄해요. 신기하다니까요.
일단 '속독'도 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하여간 너무 대단한 작가들이에요. ^^

다락방 2009-08-1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는 이미 선물 받아 읽은 작품인데,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이 리뷰에 땡스투 하고 갑니다. ㅎㅎ

마노아 2009-08-17 16:27   좋아요 0 | URL
후후, 선물 받는 분이 엄청 좋아할 거예요. 선물하기에도 참 분위기 있는 책이잖아요? 땡스투 고마워요. 오늘 유독 다락방님 생각이 많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