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 인조실록 - 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그 이름과 가장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임금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인조가 으뜸이지 않을까.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지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가당치 않은 이름의 주인공 인조.
그는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가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광해군을 뜯어내릴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선 그가 걸었던 길과 반대의 길로만 가야 했다. 그 결과 두 차례 호란을 겪었고 치욕적인 항복의 순간도 겪어야 했다. 임금 홀로 감내해야 하는 치욕이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어도 사람 대접 못 받았던 무수한 여인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 자신도 전쟁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 여기까지는 백 번 양보해서 운이 지지리도 나빴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게서 대체 그는 어떤 교훈을 얻었던 것일까? 나라의 힘이 약해서 툭하면 국경을 침범당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도 없고, 헐벗은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어떤 개혁도 시도하지 않던 한심한 임금 인조. 뿐이던가. 그 잘난 왕 자리에 집착하여 저 대신 고생하는 아들을 정적으로 겨냥해 죽여버리는 천인공노할 짓까지 서슴지 않았던 이 사람. 그것도 모자라 며느리와 그 가족, 친손주까지 죽게 만든 이 패륜적인 사내. 그러니 그가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하던 광해군의 죄질이야 귀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조의 행적을 살피다 보면 묵직한 체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역사 속의 문제 많은 인물을 보아서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보여지는 비슷한 인간 류를 같이 체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권좌를 위해서 백성(국민)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군주(대통령),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부도덕한 일도 가차 없이 해내며 자기들까리 똘똘 뭉쳐 서로를 보호해 주는 정당. 그 와중에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목숨까지도 내놓게 되는 가엾은 민중들. 그리고 명분만 좇아 망해가는, 혹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상하며 현실 정치는 외면해버리는 무모한 외사랑. 그리고 마땅히 손잡아야 할 상대에 대해서는 배척으로 일관하는 뚝심! 아, 말하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저자 역시 이 책을 쓰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는 역사 속 모습들에 아찔함을 느낀 듯하다. 이 책은 지난 해에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촛불'에 대비되는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촛불에 비견할 수 있는 사건은 고종실록까지 가야 가능하지 않을까.
선조 때에는 그래도 이순신 같은 인물이라도 있어서 가슴의 화기를 좀 다스려주었는데, 인조실록에서는 최명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약하기는 했다. 게다가 권력에 아첨하는 인물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꼭 저같은 사람들만 옆에 끼고 있던 인조.
항복을 결정했을 때 정온은 할복을 했으나 죽지 않았고, 김상헌은 목을 매었으나 자식들 덕에 살았다. 사실 자식들 보는 앞에서 목을 매었는데 어찌 죽을 수 있을까. 진심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시류에 영합하기만 했던, 애초에 도망부터 쳤던 자들에 비하면야 그들의 절개가 추켜세울만 하지만, 그 드높은 기개가 향한 '대의'라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 눈에는 너무도 답답한지라 또 다시 가슴이 묵직해진다. 대체 성리학은 조선에 무엇을 주었을까. 현실론자 최명길이 양명학으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김상현이 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자빈 강씨를 사사할 때 인조가 부렸던 억지를 저자가 따박따박 토를 달아둔 논평이다. 저렇게 논술 쓰면 망한다는 지적에 웃자니 속이 쓰리다. 임금이 죽이려드는데 살려내기가 쉬웠겠냐마는, 폭주하는 임금을 막아내지 못한 신하들도 창피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강바닥이 다 파헤쳐지기 전에, 우리는 더 거세게 항의를 해야겠지?)
줄친 부분들을 모두 한글 파일에 담았더니 8장이 나온다. 막판에 꾀가 나서 타자로 치지 않고 사진으로 찍었다. 일종의 자료 보관용이다.
저자는 이번 편이 편집팀에게서 몇 가지 부족하단 평을 받아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지적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일견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가님을 지지한다. 이 답답한 내용을 어찌 유머와 재미로 접근하겠는가. 아니어도 작품은 진지함으로 이미 감동을 주었고 그 공에 감사하게 만든다.
재료비 인상으로 부득불 책값을 올리게 되었다고 양해를 부탁하는 말이 책 마지막에 쓰여 있다. 이 정도면 친절하다 못해 예의바른 출판사가 아니던가. 독자는 이런 책을 꾸준히 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강하고 있다. 건승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