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뿌듯할만큼 재밌고 놀라운 책을 만났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정조와 율곡 이이, 허균과 연산군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그들의 행보를 설명했으니 접근 방식도 무척 신선했다.  

제목에 박혀 있듯이 정조 편을 가장 기대했는데, 오히려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워져서 모범생 정조와 율곡 이이보다 풍운아 허균과 불쌍한 악인 연산군 편이 꽤 인상 깊게 읽혔다. 사실 정조 편은 인용한 책들이 읽은 게 많아서 반복되는 느낌을 주어서 기대보다 지루하다고 느낀 것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은 거의 보지 못한 듯했다. 예전에 종교개혁가 루터와 히틀러를 비교한 책을 본 일이 있었지만 리포트 때문에 급하게 읽고 깊이 생각지 못했던 기억이 스쳐갈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심리학이란 분야가 다른 분야의 학문을 깊고 넓게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주는 것 같아 관심이 마구 솟는다.  

알다시피, 정조는 아버지가 죽는 것을 어려서 지켜본 불행했던 과거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산군은 기억도 못할 만큼 어릴 때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 똑같이 불행했던 과거를 안고 있지만 왕이 된 후 그들의 행보는 극과 극으로 달린다. 정조가 성군으로 평가 받으며 그 죽음을 애석해 하는 것에 비해 연산군은 반정으로 쫓겨났고, 역사는 그를 동정할지언정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그것을 저자는 심리학적으로 파악, 분석해 놓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는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부모님'을 가졌는가!이다. 그러니까 정조는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었지만, 아버지를 잃기 전의 만 10년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건강한 심리 상태를 가질 수 있었다. 율곡 이이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하는 유약한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 거기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가 알듯이 훌륭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성격 이론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전략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이같은 기질은 제왕과 유학자로서 잘 어울리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책 보면서 든 생각은, 율곡 이이도 임금으로 태어났으면 조선의 역사가 기막히게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의미 없는 바람이긴 하다.) 

그러나 또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양 부모님의 혜택을 모두 받지는 못했으니,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크게 일조한 혜경궁을 어머니로 둔 정조, 그리고 무능하고 유약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갈등을 삭이느라 고생했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율곡 이이에게는 모두 상처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을 바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거대한 계획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늘 걸림돌이 되었고, 아버지와의 일도 반성하지 않아 끝내 정조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정조가 순수하게 병으로 죽은 게 맞다면, 거기엔 그 어머니 혜경궁과 외가쪽 일가붙이, 그리고 할아버지 영조의 역할이 크게 자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게 바로 홧병이 아니겠는가.  

율곡 이이는 잦은 사직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말았는데, 그가 무수하게 선조를 비판하고 또 관직을 마다하고 물러가기를 반복했던 것은 선조에게서 아버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그 아버지를 꼭 빼닮은 선조. 그 선조가 습성을 고치고 달라진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얼마나 고대했겠는가. 그러나 번번이 그 기대는 무너졌고, 그때마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이 그랬듯이 한발자국 물러나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붕당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정적들에게 비판의 빌미가 되곤 했고, 안타깝게도 명도 길지 않았던 율곡은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등져야 했다.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막연하게 사회를 향해 갖는 불안함을 설명 들으니 깊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스로에게도, 또는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던가. 

허균은 더 파격적이었다. 천재 시인이었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 허균이 정말로 역모죄로 죽었는지,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었다. 저자는 시원하게 설명해준다. 곧았지만 차갑고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허균, 그리고 더 모질기만 했던 엄마로부터 결핍만 느꼈던 허균. 그래서 18세나 차이가 나는 둘째 형 허봉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는데 그 형이 죽고, 이어서 누이(허난설헌)도 젊어 죽고 말았으니 그가 가졌던 그 결핍감이 얼마나 컸을까. 성격적으로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가 너무도 컸던 허균은 그 때문에 관직에 나갈 때도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으니 수령으로 떠받들려지는 그 기분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한테 참 욕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욕먹을 짓만 골라서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의 저변에는 모두 그의 심리학적 질병들, 마음의 병들이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간신 이이첨과의 대립으로 그의 생을 무상하게 끝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안정적이고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설령 천재라 할지라도 그 삶이 불운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연산군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그의 이야기와 너무도 달라서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를 죽게 한 할머니 인수대비를 극도로 증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할머니에게 엄청 집착했었던 연산군. 때문에 그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더 병들었던 연산군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어머니가 궁중 세 대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함정에 빠져들 시점이었고, 태어나자마자 이리저리 집을 옮겨다니며 여러 사람 손을 거쳐 자라야 했던 연산군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마마보이 아빠 성종의 편파적인 모습은 또 그의 어깨에 어떻게 얹히었겠는가. 그런데 기막히게도 연산군은 지금으로 치면 딱 연예인 스타일의 기질을 가진 아이여서 할머니에게 사랑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이 사랑은 표면적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재롱을 떨어서 얻어낸 사랑으로, 제 손으로 죽인 며느리의 아들을 마음 깊이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가짜 사랑에 불과했고, 그러니 연산군의 심리에 그 어떤 보험도 되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에 기대어 제 생명을 유지한 연산군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이기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자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그를 더욱 벼랑으로 몰았을 것이다. 비극은 그런 그가 왕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광기를 제어할 사람이 주변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병든 연산군을 부추겨서 제 욕심만 채우던 훈구파들도 연산군의 광기에 철퇴를 맞아 여럿 죽었으니 그 또한 역사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태생적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성격적으로라도 자신을 변화시켜줄 어떤 계기가 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복도 연산군은 없었다. 하긴, 태어나기를 그렇게 박복하게 났는데, 무엇으로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책의 맨 뒤에는 저자가 주로 사용한 성격의 유형들에 대한 표가 나오는데, 차라리 그걸 좀 더 쉽게 풀어서 앞에 제시하고 본문을 읽게 했으면 이해도가 더 높아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도자', '전략가', '어린아이' 같은 용어들은 미리 이 표를 보지 않고 이해하기엔 너무 전문적인 용어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저자가 그들 조선의 인물들을 분석하면서 현대의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예들을 들어주는 것은 무척 적절했고, 보여주는 시각도 건강하기 그지 없어서 무척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정조는 지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더라도 저 가난한 무리들은 절대 갚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신하에게  

“구제하여 살리는데 뜻이 있으니 잃어버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고 답하는 군주였다. 이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들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올려주면 자본가들이 힘들어져서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자, 대통령이 ‘민중이 가난한데 자본가들만 살찌는 경제성장을 하면 무엇 하며, 민중에게 돌아간 돈은 결국 다 국가 안에 있는 것이니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조는 극소수 기득권세력의 왕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백성을 위한 왕이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보수 세력에게는 ‘먼저 부자들에게 돈을 모아주어야 국가가 성장한다’는 성장제일주의, 친부자 정책을 집행할 대변자가 필요했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는 왕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뿐이었다. 기득권세력은 정조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했다. (111쪽)

 
   
   
 

이미 세상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다는 선조의 넋두리에 대해 이이는  

“그 자리에 맞는 임금이 있고 그 자리에 맞는 재상이 있으면, 이는 회복할 수 있는 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실로 그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으니, 일을 하는 데도 공이 없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못 보았습니다.”  

두 손 놓고 비관에 빠지기 전에 이이의 간곡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나의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천하를 얻더라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온 세상을 얻더라도 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어기지 않으며 살았던 이이가 참으로 그리워진다. (201쪽)

 
   
   
  왕의 여흥을 위해서는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연산군의 태도는 마치 1970~80년대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정권이 청와대 뒷산을 통제하고 도시를 정화한다며 빈곤층의 집을 철거하던 정책을 연상시킨다.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원화성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백성들과 끊임없이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으려 한 정조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왕의 권위는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존경심을 획득할 때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을 과시하고 법을 앞세우고 금표를 세우는 식으로는 백성들의 반발심만 키우게 되므로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연산군은 개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므로 가시적이고 강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실과 백성들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356쪽)
 
   

이 책이 시리즈로 나와서 좀 더 다양한 인물들을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파헤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저자에게는 무척 수고롭고 고된 작업이 될 테지만, 보람 역시 클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다른 심리학 도서도 좀 더 챙겨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잘 만든 책인데 생각보다 입소문을 못 타고 있는 듯해서 살짝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표지 참 멋지게 잘 나왔다. 제목은 좀 평범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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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6-2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책인걸요...
심리학하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것 같이 느껴졌는데...
이 책은 웬지 재밌게 볼 수 있을것 같은데요...

마노아 2009-06-21 01:38   좋아요 0 | URL
심리학 강의를 들으면 무척 재밌을 것 같아요.
책으로 만나는 것보다 더 신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09-06-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밑줄 긋기 해놓은 부분들을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처음에 제목만 들었을때는 요즘 한없이 가볍게 나오는 역사책들의 시류를 따르는 것 같아 별 관심이 없었는데 말이죠.

마노아 2009-06-21 01:49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유행을 탔죠? 저도 그래서 가벼운 책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뜻밖에 제대로 건졌다는 기분이에요.^^

순오기 2009-06-2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토론도서로 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노아 2009-06-22 12:59   좋아요 0 | URL
회원분들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9-06-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 특종 당선 축하 드려요!!
늘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마노아님^^
이 책 재미있겠어요.

마노아 2009-06-27 05:23   좋아요 0 | URL
헤헷,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책 홍보도 되네요. 참 즐겁게 읽었답니다. 그래서 더 기분 좋아요.^^
프레이야님도 당선 축하해요.^^

마냐 2009-06-2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 덕분에 놓친 리뷰, 즐감했습니다. 전 약간 으스스.....제가 어떤 엄마이냐가 늘 찔려서요..^^;;

마노아 2009-06-28 10:18   좋아요 0 | URL
엄마를 '모신'이라고 하는 이유를 절감했다니까요. 진짜 으스스하긴 해요. 연산군 편에선 더 했답니다.
마냐님의 당선도 축하해요.^^

순오기 2009-07-0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우수리뷰로 뽑아줘야 더 좋았을 특종이란 말예요.^^

마노아 2009-07-02 10:27   좋아요 0 | URL
요새는 다음 블로거 특종을 거의 '리뷰'에 주더라구요. 전 우수 리뷰 뽑혀본 지는 두 해가 되어갑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