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기 전날, 이 책의 원작을 먼저 읽었다. 몇 쪽 안 되는 분량의 단편이기 때문에 잠들기 전 몇 십 분의 투자로 금세 읽을 수 있었던 책.  

원작과 영화는 설정을 제외하면 전혀 닮아 있지 않았다. 원작에서 벤자민 버튼은 1860년에 70세 노인의 외형으로 태어난다.(이때 이미 키가 170cm였다.) 외형만 노인일 뿐아니라 성향과 특성, 성격까지도 노인의 그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태어난 직후 시가를 물어 피고, 아이들이 노는 장난감이 재미가 없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젊어지면서 취향과 성격도 젊은이로 변한다. 나이든 마누라가 지겨워지고, 젊고 건강한 육체로 대학생을, 고등학생을 지내면서 즐거워한다.  

반면, 영화는 다르다. 일단 출생 자체가 1918년이고 대략 80세 노인의 외형이지만, 베이비로 태어났다. 백내장에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노인의 몸이지만, 속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기 그 자체였다.  

영화의 내용은 익히 알고 있듯이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해를 거듭할수록 젊어지는 삶의 윤곽을 부드럽게, 때로는 나른하게 보여주고 있다. 몇 십 년에 걸친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준 브래드 피트의 연기도 훌륭했고, 그보다 그 섹시 가이를 이런 노인으로, 또 이렇게 소년처럼 보이게 만든 특수 분장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1/16인치 페이퍼를 붙였는데 그게 얼굴의 주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었다고 한다.  

내가 궁금했던 부분들은 노인 역으로 나올 때 브래드 피트의 얼굴은 맞는데 저 작은 체구의 몸은 어떻게 했을까였다. 아마도 '합성'이 아닐까?  

또 다른 동영상을 보니 얼굴 근육을 인식하는 선을 붙여놓고 표정 연기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폴라 익스프레스'를 찍을 때 톰 행크스가 그렇게 촬영했었던 것 같다.  

제일 쇼킹했던 장면은 십대의 벤자민이었는데, 실제로 브레드 피트가 나이가 좀 있기 때문에 20대까지는 어찌 해도 10대는 다른 배우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그야말로 너무나 멀쩡한(!) 얼굴의 브래드가 아닌가 말이다.  

머리 카락으로 주름도 가렸고, 배경도 좀 어둡긴 했지만, 그래도 저 표정은 정말 '소년'의 그것이 아닌가. 이 장면을 보면서, '스타' 이전에 이 사람이 진정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옷을 입혀놔도 마땅히 일정 선 이상은 해내는 프로의 모습.  

(국내 배우로 이 영화를 찍는다면 난 단연코 '이병헌'을 추천한다. 저런 눈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면 말이다!) 

 

 

일전에 다른 분 글에서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걸 보고서 왜 울었을까 궁금했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꽤 긴데 후반부에 접어들때까지 울 만한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자민이 그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났을 때, 마음만은 두고 갔을 때, 돌아갈 수 없지만 늘 돌아가고 싶었던 그 마음을 엽서에 담았을 때 나도 같이 울고 말았다.  

영화 '비밀'에서 불의의 사고로 엄마와 딸의 영혼이 뒤바뀌어 딸 아이의 몸에 엄마의 영혼이 들어간 내용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딸 아이의 몸으로 부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차마 부부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딸 아이를 '시집' 보내고 만다.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아끼지 않았음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과 내가 걸어갈 길이 마땅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벤자민이 그랬다. 사랑하는 데이지는 점점 젊어지는 그의 특수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다 감당하겠다고 했지만, 벤자민은 그들 사이의 딸을 포함해서 아이 둘을 키울 수는 없다고, 아이에게 마땅히 기둥이 되어줄 남편을 찾으라 말하고 떠나버린다. 첫 마음은, 야속 그 자체였다. 데이지는 왜 그를 붙잡지 않았을까. 생활이 어려웠던 것도 아닌데, 감내하며 살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며... 

영화는 전반적으로 꽤 수작이지만 다소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들도 있기는 했다. 영화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죽기 직전의 병상에 누운 데이지였는데, 바로 그 날 자신의 딸 캐롤라인에게 벤자민 버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은 그 시점에서 그 긴긴 이야기를 그날에서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극적이기는 했다.  




버려진 아이 벤자민을 친아들처럼 헌신적으로 키워낸 어머니 퀴니가 참 좋았더랬다. 벤자민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60%가 그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데이지 역할은 다코타 패닝의 동생 엘르 패닝이 맡았는데, 다코타의 좀 더 어릴 때 모습을 보는 듯했다.  

케이트 블란쳇은 젊었을 때 모습보다 늙어 쇠잔해져갈 때의 모습이 더 고아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늙는다면 그것도 참 멋진 일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한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영화같은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능한 축복일 것이다. 만약, 벤자민이 계속 데이지와 함께 살았더라면, 데이지가 어린 딸을 키워내면서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는 남편을 함께 건사해야 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삐걱거렸을지도 모르겠다. 헤어져야 했던 그 마음은 지독히 가혹했겠지만, 그랬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 숭고하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는 노인의 몸으로 살고, 늙어서는 노인의 체력과 기억과 건강으로 살아야 했던 벤자민의 삶.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그가 마지막에 기대어 쉴 상대가 데이지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찾을 수 있게 최소한의 보험을 들었던 것은 너무도 다행인 일이었다. 데이지가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마지막 헌신을 그를 향해 베풀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밤, 함께 있지 않아도 늘 서로에게 했던 그 인삿말, 굿나잇 데이지, 굿나잇 벤자민!  그 소박한 인삿말이 참 가슴을 저민다.

3시간에 육박하는 긴 영화였는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화였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전쟁터에서 총을 버리고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되돌려진 삶의 영상 등등, 벤자민의 특수분장 외에도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는 무궁했다. 세븐 같은 영화와는 너무도 다른 축을 자랑하는 이 영화를 보며 감독의 역량에 다시 한 번 감탄해 본다.  

개인적으로 브래드 피트의 영화 중 최고였던 것은 '죠 블랙의 사랑'이었다. 참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가진 스타 중의 스타이지만, 그의 나이스 바디를 강조할 수 있는 영화보다, 그가 표현해내는 따뜻한,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나는 더 반갑다. 안젤리나 졸리가, 엄청 부러워지는구나!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09-03-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발씨의 영화 중 그래도 저는 파이트 클럽이 인상에 남습니다. 그때가 한참 그가 몸과 얼굴이 아닌 연기로 영화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할 때라고 보고 싶기도 하고요.

마노아 2009-03-04 15:41   좋아요 0 | URL
그 영화도 데이빗 핀쳐 감독이지요? 애석하게도 못 봤어요. 에드워드 노튼 때문에라도 꼭 보고 싶은 영화이기는 해요. ^^

비로그인 2009-03-04 17:24   좋아요 0 | URL
제 친구한테 빵발이 영화 볼래? 빵발이 마누라 영화 볼래? 했더니 못알아듣더군요.
파이트 클럽 마지막에 좀 놀랐죠. 마노아님 봐보세요 재밌어요.

마노아 2009-03-04 17:43   좋아요 0 | URL
'빵발'이란 표현을 알게 된 지 저도 얼마 되지 않아요. ㅎㅎㅎ
파이트 클럽에 관심도 수직 상승 중이에요. ^^

프레이야 2009-03-0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빵발이 이제 알았어요.ㅎㅎ
이병헌이라면 저런 눈, 동감입니다~~
그해여름,에서 순수해보이는 소년의 눈이더군요.

마노아 2009-03-04 20:28   좋아요 0 | URL
그 해 여름 포스터가 새겨진 옷은 있는데 정작 영화를 못 보았어요. 수애도 좋아하니까 나중에라도 챙겨볼 생각이에요. ^^

Kitty 2009-03-0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도 보셨군요 ㅠㅠ 빵발씨 ㅠㅠㅠㅠㅠㅠ
버튼씨(벤자민 아버지)가 애기를 버리고 갈 때부터 계속 울었던 1인;;
다행히 제 친구도 옆에서 같이 울어줘서 좀 덜 챙피했죠 ^^;;
저도 퀴니 아줌마 연기가 참 좋았어요. 실제로는 빵발씨보다도 젊은거 같던데 ㅋㅋ
근데 중간중간에 벼락맞은 할아버지 너무 웃기지 않아요? ㅋㅋㅋ

마노아 2009-03-05 12:22   좋아요 0 | URL
제 리뷰에 키티님 등장하잖아요. 영화보다가 울었던 사람...ㅎㅎㅎ
퀴니 아줌마 눈이 너무 선해 보였어요. 사랑이 가득 담긴 그 모습.
벼락맞은 할아버지 에피소드가 3개 나왔잖아요. 2개 더 듣고 싶었는데 아쉬웠어요.ㅋㅋㅋ

무스탕 2009-03-0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발씨... ㅋㅋㅋ
요즘 아니 올해들어 영화를 하나도 못봤어요 ㅠ.ㅠ 이렇게 슬픈일이 현실이에요 ㅠ.ㅠ
암만해도 이번달도 힘들것 같은데 마노아님의 리뷰는 제 속을 달달 볶아 주시네요.
이 영화가 무지 궁금해요!!

마노아 2009-03-05 12:22   좋아요 0 | URL
아이고, 여전히 바쁘고 불안한 나날이군요. 마일리지는 그렇게 많은데도 여건이 안 되다니..안타까워요...

순오기 2009-03-1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영화 우수리뷰 당첨 축하해요~~
이 영화, 참 좋았어요~ 브레드 피트 나오는 영화 중 실망한 건 없었어요.^^
데이지와 벤자민, 둘 다 현명했다 싶어요~~ 사랑도 감당할 수 있어야 지속이 되니까요.
그해 여름은 기대만큼은 아니었어요. 이병헌 눈빛은 순수였지만...

마노아 2009-03-15 13:39   좋아요 0 | URL
코코코, 감사해요, 순오기님^^
브래드~, 맞아요! 실망을 안 시키죠. 작품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아까 광고 보니까 브래드랑 조지 클루니 주연의 코미디 영화가 나오나봐요. 두 배우라도 코미디는 좀 거시기할 것 같았는데 코엔 형제 감독이라네요. 그럼 또 봐야죠!
사랑도 감당할 수 있어야 지속된다! 명언이에요!(>_<)

프레이야 2009-03-23 20:07   좋아요 0 | URL
앗, 오기언니.. 이런 명언을..
역쉬 연륜은 못 속여요. 사랑도 감당할 수 있어야 지속된다.
이말요.^^

마노아 2009-03-24 00:41   좋아요 0 | URL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명언이에요~

프레이야 2009-03-2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리뷰 당선 축하해요~~~ 마노아님^^

마노아 2009-03-24 00:42   좋아요 0 | URL
캄사합니다, 혜경님.^^ 아카데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더 리더보다 벤자민이 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