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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그까이꺼 아나토미'를 재밌게 보곤 했다.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혹은 2주에 한 번 접하게 되는 누군가의 고민에 공감하고, 거기에 대한 당찬 충고에 감탄하기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글 모음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당연히 기꺼이 지갑을 열 용의가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한 번 보고는 쉽게 덮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겼다. 재밌겠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거! 제대로 만난 거다. 이런 게 편집의 힘인 것일까? 중구난방 다양했던 질문과 고민을 주제별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임 에피소드와 깊은 충고가 이어졌다. 아, 이 책 사기를 너무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일년에 한 번 만나곤 하는 후배의 생일 선물로 한 권 더 주문했다.(그날은 알사탕 1,000개 주는 날이라서 더 구미가 당겼다!)
주제는 다섯 가지다.
1. 나, 삶에 대한 기본 태도
2. 가족, 인간에 대한 예의
3. 친구, 선택의 순간
4. 직장, 개인과 조직의 갈등
5. 연인, 사랑의 원리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첫 번째 순서가 '나'라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올곧이 나 자신! 나를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나 밖의 다른 세상도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 사회는 나를 관찰하고 나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의 아우성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너무 인색했다. 그게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지, 혹은 그게 왜 필요한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다. 다른 누군가도 그럴 테지만, 나는 분명히 그랬다. 그게 서글펐고, 그래서 동시에 기뻤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이 책을 내가 마흔 한 살에 만난 게 아니라, 서른 한 살에 만날 수 있어서. 스물 한 살에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때는 지금만큼의 고마움과 감동, 감탄으로 마주서지 못했을 듯하다. 그래서 때라는 게 있는 가 보다. 혹은 궁합,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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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란 거, 이거, 사실, 곧이곧대로,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그리고 그 속에 숨는다. 그리고 공감해줄 사람 찾는다. 피치 못 할 사연 있었단 거지. 자긴 원래 그런 사람 아니란 거지.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객관화의 임계점이란 게 있다.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 온다. 도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단한 분량의 용기가 지성과 함께 요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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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장창 강조해 주는 한 마디, '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라는 것!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래오래, 내가 안고 있는 고민과 불만과 설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 원인의 가장 큰 대목을 나의 밖에서 찾고자 애썼다. 변명하고 싶었고, 핑계를 대고 싶었고, 모자라고 부족한,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또 인정하기 싫어서 생각하기를 회피하고, 선택하는 것을 미루고, 그렇게 시간을 버텨왔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지 못하자, 시간이, 또 다른 상황이 나를 선택하도록 나를 '방치'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혹은 인정하지 못하면서.
그러니까 그것들이 결국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 결정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를 올곧이 치러낼 자신이, 없었다. 그걸 감당한다는 게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래서 외면했고, 그래서 더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내가 책임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대체 그 무엇이 책임질 수 있다고 그렇게 어리석게 굴었을까.
가족 파트는,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더랬다. 오래도록 내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존재를 부정할 순 없는데 그 존재가 버거웠던 내 가족의 그림자를 한겹 벗겨낸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진한 위로를 느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가족이라는 고리가 내게 준 어떤 시련들을 당장 벗겨내진 못할 것이다. 거기엔 시간이 필요하고 역시나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적어도 가족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게 존재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깊이 새겨본다. 모두에게 친절할 수 없고,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거다. 그런 콤플렉스 따윈 버려라. 그들을 위해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것, 잊지 말고 꼭 기억하자. 거절하는 훈련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혹은 가족이니까 더더욱!
김어준 씨는 '어른'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어른의 선택, 어른의 사랑, 어른의 책임. '어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생물학적 나이로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어 있는데, 다른 지각과 자각이 그 생체적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역시 첫번째 파트의 문제다. '나'와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에 성장이 더디다. 무정차 통과란 없다. 월반도 없다. 한 번은 아파야 하는 것이고, 또 부러져 봐야 성장이, 변화가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앞서서 이 책을 더 늦게도 아닌 더 이르게도 아닌 지금 만나서 기뻤다는 말, 진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기까지의 나. 내가 선택해 온 내가 감당해온 만큼의 지금의 나. 부족한 게 많고 답답한 것도 많건만, 여기까지의 내가, 대견하다. 초라하고 때로 비루할 때도 있지만, 그 조차도 결국 내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더 멋진 나로의 비상도 가능하다는 걸 충분히 믿는다. 그건 사회적 성공, 물질적 충만함을 넘어선 자존감일 것이다. 내 스스로 존중해 주는 나의 모습이란, 아름답고도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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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란 그런 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거.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엔 더 이상 타인에게 날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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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넘어가고 있고, 다시금 한 달도 안 남은 시간 뒤에 새 나이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다른 때와 달리 그 사실도 싫지가 않다.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사람이 성숙해지고 진국이 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이 때에 알아가게 되는 삶의 면면들이 분명 있으니까. 그 연륜이라는 시간의 띠가 보여줄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하고 벅차게 반갑다. 그렇게 시간마저도 긍정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는 게 다시금 만족스럽다.
모두가 행복해지길 원하는데, 행복을 막아서는 외부적 조건들이 너무 거세어 휘청거리기 일쑤인 나날들이다. 그럼에도, 무지개 너머 행복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나 자신을 믿어본다. 지금 이 순간 몹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미 한 발을 내딛었다고 과감히 말해 본다.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이 한 마디를 외쳐야겠다. "건투를 빈다."
ps.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지나치게 유치한 일러스트 그림이다. 김어준씨의 독특한 말투 때문에 부러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지한 메시지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이 되어버렸다. 한겨레 신문에 실렸던 그 일러스트가 오히려 분위기에 더 맞았는데 안타깝다. 게다가 표지의 색깔도 안타깝다. 이 책이 '자기계발서'에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먼저 준다는 것도 분하다. 그래도 잘 팔리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다. 역시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