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워낙에 무심한 나는 건물도 길도 잘 못 찾고 못 알아보곤 한다. 거의 늘.

우리 집 근처엔 약국이 세 개 있는데 그 중 가장 손님 많은 K약국. 처음 약국 오픈하고 얼마 뒤 방문했더니 나더러 아는 얼굴같다고 학교를 물어봤었다. 우린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맞춰보고는 연관이 없다고 여기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수년이 지나도록 의문이 풀리지 않던 약사가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들춰보고서 울 언니에게 얘기했던 것.

그때가 금년 4월이던가? 암튼, 난 그때도 기억이 나질 않아서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치고도 못 찾았다. 결국 언니가 이 사람이네!하고 집어줘서 알았다. 난 문과였고 그 친구는 이과였고, 우린 같은 반은 한 번도 된 적이 없었건만, 오며가며 마주친 얼굴을 십 수년 지나서까지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월 이후 나는 그 약국에 가지 못했다. 딱히 가야할 건수도 없었지만, 있더라도 다른 사람 편에 묻어서 약을 사오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니까 말이지, 그 뻘쭘함을 상상해 보니 너무 막막해서.

어제 병원 진료를 받고 약을 타러, 문제의 그 약국에 갔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우린 평소처럼 서로 존댓말을 했는데, 그 친구가 묻는다. "염증약인데 어디가 아파요? "

"감기 때문에 코가 막혀서요. 근데,..... 동창!"

하니까 배시시 웃는다. 우린 서로 어색하게 웃었고 여전히 '존댓말'을 써야 했다. 하루아침에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것참 집에 돌아갈 타이밍을 찾는 것도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때 우리가 고등학교까지 맞춰봤더라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 성북구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은평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지금 사는 곳은 다시 성북구. 그 친구는 은평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맞췄을 테니 당연히 연고가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아무튼 쌍화탕을 고맙게 먹으며 우린 짧은 담소를 마치고 헤어졌다. 아, 어색해 어색해....(>_<)

하여간 너무 좁은 서울, 대한민국!

덧)오늘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나더러 연예인 닮았다고 했다. 누구? "마빡이요!"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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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1-18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준영머리요 ㅋㅋㅋ (하는순간 후회할거라는 걸 알고있음)

예전에 이 얘기 해주셨었는데, 어제 드디어 만났군요! ㅎㅎ ' 뻘쭘함을 상상해 보니 너무 막막해서'라는 말에 마노아님 성격이 탁 드러나요~ ㅎ

마노아 2008-11-18 13:15   좋아요 0 | URL
그런 머리는 송혜교만이 어울린다고 인정할래요ㅠ.ㅠ
전에 얘기했었는데 결과는 어제 나왔죠^^ㅎㅎㅎ
아, 민망한 땀 한방울 주르륵!

hnine 2008-11-18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렇게 찾아낸 친구 있어요. 지금도 아주 친하게 지내지요.
어색함, 곧 사그라들거예요 ^^

마노아 2008-11-18 13:14   좋아요 0 | URL
근데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별로 없어서 말이에요. 게다가 약국을 가야 얘기를 나누는 건데 약국을 슈퍼처럼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도 다음 번엔 좀 덜 뻘쭘하겠죠^^;;;

무스탕 2008-11-1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초등학교 1학년때 같은반이었던 친구를요, 26년만에 만났는데요, 그 친구가 절 알아보는거에요.
제 얼굴이 거의 안변했대요 -_- 초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오가면서 봤을텐데 전 솔직히 전혀 기억에 없는거에요.
저는요, 얼굴보다 목소리로 기억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어떤 아자씨는 저를 18년만에 만났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이 난대요 -_-
어떤 아주머니도 '이 아기씨야.그때 그 아가씨가' 그러길래 네? 그랬더니 얼굴은 기억 안나는데 목소리가 기억난대요.

저도 주준영머리 해보고 싶어요오오오~~~ (하는순간 자뻑으로 넘어갈지도 몰라요. 웬디님 메렁~ ^ㅠ^ 호호홋-)

마노아 2008-11-18 14:09   좋아요 0 | URL
오, 대단한 능력자들이에요! 그나저나 목소리로 기억한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걸요. 그 친구나 저나 고등학교 때랑 얼굴은 크게 차이가 안 나더라구요.
무스탕님은 주준영 머리 어울릴 것 같아요. 제법 자랐으니 함 도전해 보셔요^^

바람돌이 2008-11-19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사람이 저를 알아보지 제가 먼저 알아보는 경우 거의 없습니다. 길치 말고 얼굴치 이름치도 있어요. ^^
길거리에서 아주 친했던 사람도 못알아보고 버벅거리는 판에 별로 안 친했던 사람이야 말해 뭣하겠어요. ㅎㅎ 기억이 안나니까 당연히 저도 너무 너무 어색해하면서 피하는 쪽이에요. ^^

마노아 2008-11-19 08:24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라니 급 위로가 되고 있어요^^ㅎㅎㅎ
저도 길 걸을 때 주변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걸어서 아는 사람이 다가와도 툭 치기 전에는 못 알아봐요.
고교 3년 동안 말 한 마디 안 섞어본 동창을 못 알아보는 건 저로서는 당연한 일이지요ㅠ.ㅠ
그래도 담번엔 좀 더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할 테지요.^^

순오기 2008-11-19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창은 그래도 쉽게 어색함을 허물어 버리게 되더라고요.^^
성격~~ 그건 어떻게 못하는 거니까 평생 껴안고 잘 살자고요~~ㅎㅎㅎ
근데 공장장 사랑이 베바로 바뀌었어요????

마노아 2008-11-19 08:25   좋아요 0 | URL
사람 쉽게 안 바뀐다는 건 거의 진리죠^^;;;
수긍하고 살아야 한다니까요.ㅎㅎ
아, 공장장 사랑과 베바 사랑은 비교가 안 되지만, 사진은 좀 자주 바꿔줘도 되겠다 싶었어요.
제 사진을 걸어놓으면 반응이 별로인 것 같아서 무난(?)한 사진으로 걸었어요^^;;;

Kitty 2008-11-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창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면 반말이 잘 안나오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뻘쭘해서리 ㅎㅎㅎㅎ

마노아 2008-11-19 18:24   좋아요 0 | URL
그치요? 게다가 제 경우는 몇 년 동안 서로 존댓말 쓰던 사이라서 반말하기가 더 거시기 했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