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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김경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엑토르는 수집벽이 있다. 그는 우표를, 면허증을, 부두의 배 그림을, 지하철 표를, 책의 첫 페이지를, 아페리티프를 저을 때 쓰는 플라스틱 막대와 과을 조각을 꽂는 플라스틱 꼬치를, 병뚜껑을, '너'와 함께한 순간을, 크로아티아 속담을, 킨더 장난감을, 냅킨을, 누에콩을, 카메라 필름을, 기념품을, 커프스 버튼을, 온도계를, 토끼발을, 출생신고서를, 인도양의 조개를, 아침 다섯시의 소음을, 치즈 라벨을, 한마디로, 모든 것을 수집했고 매번 같은 흥분을 느꼈다.
이런 그가 수집품 대회에서 2등을 받고는 좌절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실패했고, 그는 요양원에 있던 시간을 미국에 다녀온 시간처럼 꾸미기 위해서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보다가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 역시 미국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미국에 가봤던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엑토르는 사랑에 빠졌고, 끝네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병적인 수집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수집 품목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유리창 닦는 아내의 뒷모습'이다. 너무나 요염하다 못해 에로틱한 그녀의 모습. 엑토르는 아내 브리짓트의 유리창 닦는 뒷모습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유리창을 닦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유리창을 더럽혀 놓고, 그 유리창을 닦는 아내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남편의 모습.... 결코 심상치 않다. 급기야는 자신이 없는 사이 유리창 닦는 모습을 놓칠까 봐 카메라까지 설치하는 엑토르.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만 진행시키면 왠 변태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 것이다. 그러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꽤 평범치 않은 설정이지만 이들 부부, 은근히 귀엽다. 이 책의 제목만큼이나 말이다.
몰래카메라에는 아내의 유리창 닦는 모습이 아닌, 더 충격적인 모습이 찍힌다. 아내가 외간 남자를 들인 것이다. 아내가 바람핀다고 생각한 엑토르! 그러나 아내를 다그치지 못한다. 왜? 그녀의 유리창 닦는 뒷모습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리짓트는 정말로 바람을 피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데에 이 책의 특별함이 더해진다. 그리고, 엑토르가 반한 것은 그의 수집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 역시 아니라는 데에 독자는 즐거운 상상을 보탤 수가 있다. 제목을 다시 쳐다보시라. 그녀에게는 에로틱한 잠재력이 있다. 엑토르 뿐아니라 그의 친구 부부도, 또 친정 아버지까지도, 그녀에게 유리창을 닦아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에로틱한 잠재력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엑토르, 그의 수집벽은 이미 고쳐져 있다.
많이 개방적이 되긴 했지만 한국에서 성적인 소재를 가지고 책을 쓴다면 경계되기 일쑤인 게 사실이다. 십년 전 영화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가 개봉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의 열광과 달리 국내 반응은 차가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의 섹스 코드가 우리 정서와 걸맞지 않은 탓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톡톡 튀는 매력과 발칙한 상상력에 감탄했으면서도 정서적으로 후한 별점을 못 주게 된 까닭도 그와 비슷하다. 나란 사람이 그런 쪽으로 좀 더 보수적인 듯하다.
책을 다 보고 나서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디자인을 한 사람의 감각에 빙긋 웃었다. 엑토르가 미국 지도 위에 서 있는 브리짓트를 훔쳐보고 있다. 그녀는 섹시한 자세로 유리창을 닦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에 그려진 덩쿨 문양도 어쩐지 섹시하게만 보인다. 환타스틱한 느낌의 달콤한 핑크빛 표지색도 마찬가지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밖에 표지에는 등장인물들과 그들과 관련된 갖가지 소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소소한 즐거움이다.
젊은 작가가 만들어낸 못 말리는 페티시스트 엑토르. 그리고 그 못지 않게 톡톡 튀는 에로틱한 아내의 잠재력을 한 번 들여다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