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이 화제다. 드라마 중반까지는 정조가 즉위하는데 큰 도움을 준 홍국영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그려졌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한 뒤 가장 큰 활약을 하게 될 인물은 바로 다산(茶山)정약용(1762~1836)이다.
정약용은 정치와 경제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은 일등공신이다. 이산의 이병훈 PD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재미없는 사람”이라고까지 평한 그의 업적을 통해 드라마 이산을 미리 살펴보자. 단, 스포일러(?)가 두려운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란다.
정약용은 정조의 ‘영재육성프로젝트’로 탄생한 인물이다. 정조는 즉위한 즉시 왕립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을 만들고 37세 이하의 관료를 뽑아 3년 동안 규장각에서 공부를 시키는 ‘초계문신제도’를 운영했다.
정약용은 1789년 치러진 식년시에 급제해 바로 초계문신에 뽑혔다. 정약용은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첫 해 규장각에서 본 시험에서 5번이나 장원을 차지했다. 초계문신은 당파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선발됐고, 매달 두 번씩 치르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면 방출됐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에 ‘정조의 사람’을 키워 중용하려던 정조의 계책이라고 할까.
초계문신으로 뽑힌 해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전하기 위해 한강에 놓을 배다리를 설계하라는 어명을 받는다. 당시 조선에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없었다. 배다리는 수십 척의 배를 강을 가로질러 사슬로 엮어 만든 임시 다리. 배 위에 가교를 건설해 마차와 말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편하고 신속하게 건널 수 있었다.
정약용은 뚝섬에 배다리를 놓아 사도세자의 유골을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1795년 대규모 왕실의 행렬이 수원을 방문할 때 정약용은 공사기간을 대폭 단축해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는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이 배다리로 말 779필과 인원 1779명이 건넜다고 기록됐다.
정약용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수원 화성 축조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건설하기 위해 서양의 과학을 도입해 거중기를 만들고, 당시 최첨단 성곽기술을 수원 화성에 적용했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 때 참고한 책은 ‘기기도설’(器機圖說)이다. 기기도설은 명나라로 귀화해 등옥함이라는 이름을 얻은 스위스 과학자 요하네스 테렌츠가 지은 과학책이다. 서양 물리학의 기본 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장치가 수록됐다. 12개의 도르래로 이뤄진 거중기를 이용하면 장정 한 사람이 240kg의 돌을 거뜬히 들 수 있었다.
화성 축조에는 거중기 외에도 많은 기계 장비가 사용됐다. 짐을 싣는 판이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유형거’, 도르래와 물레를 하나씩 사용해 만든 작은 거중기 ‘녹로’, 소가 끄는 수레인 ‘대거’ ‘평거’ ‘발거’가 쓰였다. 거중기는 한 대만 쓰였지만 유형거는 11량, 녹로는 2개, 수레는 200량 넘게 쓰였다. 수원 화성의 공사 기간이 단축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수원 화성은 기존의 성곽 체계를 탈피한 당시 최첨단 방어요새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성벽을 타넘던 전투가 화포로 성벽을 부수는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다. 수원 화성은 화포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됐다.
일단 높이가 낮아 화포 공격으로 하단이 일부 무너져도 성벽 전체의 무게를 버틸 수 있었고, 흙, 돌, 벽돌이 적재적소에 위치해 화포 공격으로 성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다. 화강암을 사용해 돌이 화포 공격에 쉽게 깨지는 단점을 보완했고, 돌 뒤에는 흙벽을 쌓아 충격으로 돌이 빠지는 문제를 방지했다.
하지만 정약용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주로 신봉하는 남인에 속해 있었다. 그가 천주교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노론 벽파는 이 일을 구실 삼아 정약용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정약용이 계속 공격을 받자 정조는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발령한다. 잠시 조정을 떠나 백성을 직접 돌보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과거 천연두로 자식 3명을 잃었던 정약용은 곡산 부사로 일하며 천연두 치료방법을 연구해 ‘마과회통’을 썼다.
조정의 당파 싸움을 피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정약용은 정조가 승하한 뒤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다. 그는 그곳에서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썼다.
특히 흠흠신서에는 과학적 부검법이 나온다. 정약용은 “독살을 밝히려면 사체에 은침을 꽂아 색변화를 살펴보거나 사체의 입에 넣어둔 밥을 닭에게 먹여 생사 여부를 관찰한다. 혈액이 응고하는 현상과 검상의 깊이나 방향을 분석해 사건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고 흠흠신서에 밝혔다.
정조에게 받은 사랑을 백성에게 베푼 정약용. 그는 1818년 18년에 걸친 유배가 끝난 뒤에도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를 하다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됐다면 조선시대 백성은 좀 더 살기 좋아졌을까. 어쩌면 백성을 사랑한 정약용은 지금 가장 필요한 인물일지 모른다. (글 : 전동혁 과학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