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게 말걸기
대니얼 고틀립 지음, 노지양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대니얼 고틀립. 그는 서른세 살에 전신마비가 되어 30년 가까이 휠체어를 탄 채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어느 날, 자동차를 몰고 아내의 생일선물을 찾으러 가던 그에게 닥친 거대한 차. 그는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벌어졌는데, 아내와 이혼(아내도 암으로 고생했다)했고, 누나와 부모님 마저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자신의 손자인 샘이 자폐증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저자 자신이 심리학자였기에 자폐증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바로 저자가 자폐증환자인 손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놓은 책이다. 나는 그 책을 보며 가끔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는데, 아래 문장은 오랜 시간동안 기억에 남는다.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서 파커J.파머가 ‘상대방에게 충고하기보다 그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줄 사람 곁으로.”

저자는 오랜 세월동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인지(전신마비이기에 대. 소변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 집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항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절실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깨달은 삶의 방식은 ‘내려놓음’의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하게 요구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주목하는 것, 내 자신과 주위사람, 그리고 세상을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했으면 하는 방식으로 이끌거나 고치려 하기보다 현 상태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저자는 책 중간에서 큰 딸 알리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은 슬프다 못해 가슴이 아려왔다. 나도 저자처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고 아이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가슴 아플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식으로 표현하면 상처받은 아이를 끌어않지도,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상황이다.

내용은 큰딸인 알리가 얼마 전에 사랑하는 개 모리스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9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알리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개 한 마리 죽은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 후 알리는 사람 만나는 것도 기피하고, 저자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전화통화가 되어 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지금은 괜찮다며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저자는 그런 딸을 보며 울었다고 한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딸에게 도와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뭐라고 한 마디 위로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자 스스로가 평소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돕기보다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인생보다는 아이들의 감정과 권위를 존중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진정한 도움은 열린 손을 내미는 것이다. 아이들을 돕고 싶을 때는 먼저 이런 질문부터 해야 한다. ‘혹시 내가 필요하니?’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우리의 무력감과 두려움 같은 감정을 미리 잘 다스려서 아이들에게 도리어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아이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있다. 아이들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기에 그들의 아픔을 줄어주겠다고 나서기보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때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아플 때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을 주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렇게 한다는 게 쉽지 않다. 특히 힘들어하는 아이를 그저 바라만 본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고, 저자도 당연히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가끔 내 아이를 바라보며, 학생들을 바라보며 뭔가 도와줘야 하는데, 뭔가 좋은 말을 해 줘야 하는데, 뭔가 경고를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하면 반드시 후회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저자 말대로 그들의 인생을 내가 대신할 수 없다면 그들의 회복력(상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믿고 바라봐주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란 생각도 든다. 안타깝고 어렵지만 말이다.

몇 년 전 저자에게 한 아버지가 전화해 스물세 살 난 아들을 만나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대학도 자퇴하고 무슨 일이든지 꾸준히 하지 않아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들과 면담을 진행하면서 아들의 문제가 자신보다 아버지로 인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포기하고 아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아버지,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들은 고마움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자신의 인생부터 돌보세요. 그것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기쁨과 충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자아’나 ‘정체성’이란 말을 자주 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가로막은 최대의 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있기에, ‘나’란 존재를 한정짓고 있기에 세상의 많은 것들을 검열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에서 상대방과의 관계도 일정 선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내 안에서 들리는 이런 말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 ‘이런 말은 내가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인데...’ 또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 내가 바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나라면 최소한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 나를 비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검열 속에서 차단된다.

책 내용 중에서 개의 모습을 우리의 행동과 비교한 구절이 있다. 개는 기쁘면 기쁘고,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게 눈앞에 있어도 먹지 않는다. 그들은, 물론 아프고 고통스럽고 싫은 것을 감지할 능력은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도 되나? 혹시 나중에 고통 받는 것 아냐?’하며 딴 생각을 하거나, 먹을 것을 줬을 때 배가 부르더라도 ‘혹시 지금 먹지 않으면 나중에 굶는 것 아냐?’ 하는 의구심으로 꽉 찬 위장에 꺽꺽대고 밥을 쑤셔 넣지는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고마우면 고마운 것이지 그 이외 다른 생각을 하며 이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경청’하려면, ‘현재’에 살려면 우선적으로 ‘나’란 존재를 지워야 한다는 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항상 ‘나는 이래야 하고, 이런 생각과 저런 행동을 해야 하며, 나에게 알맞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상대방에게 보여줘야 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 만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짐을 바라보며 주위사람과 세상을 원망한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왜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을까 하면서 말이다. 내가 만들었다는 것도 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 뭔가를 규정짓고 이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만 털어내도 그만큼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래에 있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꼭 내가 생각하는 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스럽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괴롭혀 온 그 오랜 불안과 열등감과 서서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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