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E.F.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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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살면서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친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우리의 생활수준은 분명히 향상되는데 우리 삶의 여유는 점점 줄어들고 말그대로 삶의 질이 예전보다 향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일 것이다. 물론 절대빈곤의 시대보다는 지금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우리가 90년대 중반보다 지금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지. 분명 수치적인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높은데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각 분야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돈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증가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면 성장의 열매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분배되어 다 함께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맹신하는, 또는 우리가 그렇게 믿도록 부추기는 서구의 경제학에서 찾는다. 경제학도 하나의 학문이고 모든 학문의 목적이 인류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면 경제학도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지적에 의하면 그러한 수단에 불과한 경제학이 이제는 전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그 경제학이 기반하고 있는 대전제 - 즉 성장을 통해 전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는 불변하는 진리와 같이 맹신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를 둘러보면 모든 국가들이 각자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살인적인 경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서 이제는 한번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다시 그 경쟁에 끼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이른바 무한경쟁 시대...마치 모든 국가들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에 올라타서 기관차의 속도를 더욱 높이려고 애를 쓰는 모습같다. 그런데 과연 그 경쟁의 끝은 어디이고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양적인 성장이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준다는 명제는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단정한다. 그것도 30년 전에. 그리고 경제학은 그것의 본분을 깨닫고 다시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봉사하기 위한 인간을 위한 경제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체적인 대안으로서 저자는 작은 단위의 기업체, 일정 재산의 공유를 통한 소유권제도의 혁신 등을 들고 있다. 그러한 것이 모두 실현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되기에는 무리가 조금 있겠지만 경제학, 나아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관념들-예컨대 사유재산제도나 성장절대주의-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가치 또는 견해인지를 꿰뚫어보는 저자의 혜안은 실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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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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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 또는 민주화된 사회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주의라는 단어자체가 엄청나게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적어도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막연한 생각에 따르면) 독재자가 군림하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또는 세습이 이루어지는 왕정국가에 대비하여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대표자들을 뽑는 제도가 보장되어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이해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앞에서와 같이 일종의 정치체제라고 보는 한에서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수한 점이 단순히 대표자를 선거를 통해서 뽑는 점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의 독재자가 국가를 잘 다스린다면 국민의 삶의 질은 기본적인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높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질로만 정치제제의 우수성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최장집 교수의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사회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거쳐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일단은 민주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면 민주화된 이후의 우리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최장집 교수의 대답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민생과 동떨어진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 그로인해 정치에 점점 무관심해지는 국민들, 그리고 의사를 반영시키기 위해 무조건 시위부터 하는 아니 시위 말고는 특별한 의사반영 수단이 없는 답답한 현실 등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논의로 되돌아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나 제도에 비해 우수하고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장집 교수가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사회가 서로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건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정치체제이고 서로 다른 이해 관계가 합리적 대안으로 조직되고 상호 갈등하고 경쟁하면서 그 내용이 풍부해지고 그 사회적 기초가 튼튼해지는 과정을 거쳐 일정한 타협과 합의를 만들어 갈 때 유의미한 의사결정구조가 되기 때문이다.(p33)

그런데 우리 사회에 이런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과거 수십년간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어 온 결과 권위주의 헤게모니를 신봉하고 권위주의 정권의 주세력을 이루는 여당과 그와 실질적으로 정책적인 차별성이 없이 무늬만 야당인 보수양당체제가 확립되어 왔고 그러한 양당체제로는 민의를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다양한 갈등구조를 반영할 수 없는 양강 보수정당 체제가 유지되어 왔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을 동원하지 못하고 '갈등의 사유화'를 통해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만 정쟁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가능하게 해 준 데에는 냉전반공주의가 큰 몫을 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후 남한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들의 이익 충돌, 갈등 상황을 남북한 간의 냉전적 극한 대립 상황 속에서의 생존문제를 내세워 모두 덮어버리고 억눌러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해 수많은 교육과 선전이 뒤따랐음은 당연하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일본에 공산당(사회당인지도 모르겠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국가체제는 어렴풋이 자유주의(그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혼재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였고 일본은 내가 알기로는 자유진영에 속한 자유주의 국가였는데 그런 일본에 공산주의 정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이 권위주의 정권이 열렬하게 이용한 냉전 반공주의는 많은 국민들에게 이분법적이고 폐쇄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즉 남북한 간의 냉전체제의 고착화와 이를 권위주의 정권이 악용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을 하는 것(냉전적 사고에서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약4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아직도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나와 다른 것을 사회 전체의 공공선이라는 더 큰 논리를 내세워 배제시키고 무조건 비난하는 태도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런 상황을 지난 수십년간 악용하여 기득권을 취해온 자들 뿐 아니라 그 권위에 억눌려 있다가 투쟁을 통하여 지배적 세력이 된 자들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아 씁슬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장집 교수는 그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대표적으로 민노당의 출현을 최장집 교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를 포함한 사회의 주요 계층 및 그 이해관계간 충돌의 결과인 갈등을 표출하고 이를 국가 운영에 반영시킬 건전한 정당 내지는 정치집단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주 원인이 시민사회와 괴리되어 있는 정당 즉 정당제도의 미성숙에 있기 때문에 정당과 시민사회(서민들의 관심사와 고충)와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유권자와 정당(또는 정치엘리트)간의 수직전 통제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그 일례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실현되었다. ) 등을 고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제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이해하는 원리, 원칙, 가치는 서로 다른 이념적 원류로 분해 가능한데 예컨대 생명보존에 대한 권리, 사적 자유, 품위, 자기표현, 행복추구, 재산권 등과 같은 요소는 본래 자유주의적 가치의 소산이고 공익의 존중, 참여의 권리, 책임성 등은 공화주의에 원류를 두고 있다(p222)고 전제한 다음 우리 사회에서 보수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세력에 의해 버려진 자유주의(p227)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기득권을 공익을 위해 일정하게 제한한다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기력증, 우울증, 위화감을 고려하면 훌륭한 처방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오늘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 제시한 '총체적 인간'에 대비되는 '부분적인 인간'을 옮기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우리 사회를 꿈꿔본다. 지금은 모순적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나는 우리의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권위주의에 대항했던 투쟁은 개인의 자율성과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나, 시민적 휴머니즘을 핵심으로 하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발전시킬 여지를 주지 못했다...(중략)..이 과정에서 배태된 인간 유형은 총체적 변혁을 추구하면서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투척하는, 자기희생적 변혁에 복무하는 인간...(중략)..'총체적 인간'이라 하겠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를 이상화하는 동시에,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개인에게 부과한다. 이들이 실제의 민주주의를 대면했을 대 총체적 인간에 대한 강조가 강했던 것칸큼, 민주주의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면적 자기부정이든 혹은 자기반성이든 지난날의 자신과 급격히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중략)..민주화 이후의 오늘날에는 총체적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운동이든, 민주적 정치과정이든 그것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선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참여자는 정체성을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대문이다. 민주화 이후 운동의 급속한 해체는 이러한 현상의 한 측면이다. 오늘날 총체적 인간이 창출해 낸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정치적 무관심, 투표불참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비오가 말하듯이 '민주주의의 과도함만큼 민주주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한다.(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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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이해인 산문집
이해인 지음, 하정민 그림 / 샘터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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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해인 수녀님의 짧은 편지나 삶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바쁜 생활에 찌들어 잊고 지내는 소중한 사람들과 삶의 가치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너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구나. 맞아, 내가 소중한 사람들을 충분히 소중하게 대접하고 있지 않구나. '는 등의 생각이 든다. 그냥 이렇게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놓쳐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항상 상기하며 삶으로 실천하고 또 그런 생각과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이쁜 글로 표현하는 것 - 그래서 이해인 수녀님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고 간직해 두면 좋은 구절들을 몇 개 적어본다.

고운 말씨 수첩 - 왼쪽엔 내가 평소에 하는 말 중에 부정적이거나 고치고 싶은 말을 적고, 오른쪽엔 좀더 긍정적이고 남에게 기쁨을 주게 될 아름다운 말을 적어놓고 기회가 올 적마다 연습을 해봅니다. 또 어떤 페이지에는 내가 실수해서 남에게 상처를 준 말, 남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말을 적어두기도 합니다. 문득 잊고 있던 우리나라 고운 말을 어느 대화나 책에서 발견하면 이것도 적어두었다가 적절히 사용합니다.(p214)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구체적 방법임을 알아듣게 됩니다. 함께 사는 이들에게도, 밖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시간의 허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가능한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어야 서로 마음이 트이는 계기가 되기에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p110)

'무엇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잘 실행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행복은 스스로 가꾸어가야 하는 것.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을 나는 자주 기억합니다. '(p113)

'손님맞이를 할 때는 자신의 시간이 축나고, 하려던 일들이 더러 밀려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끌탕을 하거나 초조해지기보다는 마음을 평온히 갖는게 좋습니다.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는 오늘을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쓰면 마음 안에 조용히 피어나는 기쁨이라는 꽃.'(p35)

'판단은 보류하고 먼저 들어주는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배웠습니다/ 잘 듣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기다리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편견을 버린 자유임을 배웠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고 주제넘게 남을 가르치려고 한 저의 잘못이 떠올라 부그러웠습니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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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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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베스트셀러인지 여부가 책을 선택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느낌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후 책일기 열풍이 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따라 베스트 셀러를 책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나 역시도 종종 그런 기준에 따라 책을 고른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반드시 좋은 책이라거나 독자 개개인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책은 적어도 베스트셀러의 이름값은 충분히 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배, 기독교 예술사, 루브르 박물관, 기호학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과 소설적 허구의 장치들을 완벽하게, 그것도 영화적인 스릴과 재미를 가미하여 배열하고 있다.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벌써 소설에서 제시된 사실들 -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한 사이였고 그 후손이 존재한다는 것, 교회가 권력유지를 위해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몰아 박해하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 아니고 예언자인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 등 - 의 진위에 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에 대해 왈가불가할 자격도 없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관해 품었던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신의 자녀인 예수님이 하필이면 '백인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신의 아들이라면 무언가 더 큰 공통분모를 가진 모습이 아니어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한국인으로 탄생하면 어떠했을까라는 소박한 의문말이다.

수천년에 걸쳐 이룩된 역사적 축적물들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파격적이고 불경스러운 가설이 어쩌면 답이 존재하지 않을 내 어린시절로부터의 의문에 대한 수많은 답들 중 한가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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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1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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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1권을 읽고 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2권을 주문해서 읽게 되었다.  어차피 이 책이 운동권의 필독서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기에 어느정도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역사관과 파격적으로 다른 내용이 전개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느낌은 많이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사실 책 중간부분을 넘어서부터 정말 엄청난 짜증과 싸우면서 이 책을 끝마쳐야 했다.

책 초반에는 이승만 일당이 미국을 추종하고 그토록 협조적이었던 이유가 친일 전과가 단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그 대가로 이승만 정권이 막대한 정치, 경제적 특혜를 얻었고 이에 군고위 장교들과 매판 자본들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북한이 비교적 충실하게 친일파들을 숙청하여 역사청산을 이룬 반면 남한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해방후에도 권력을 잡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과거사 청산 문제가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후 남북한의 발전 과정을 그리는 부분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북한에 지나치게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북한에 인도적인 원조를 하고 있고 북한을 개방하려는 우리나라의 손길을 거부하고 고집스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계속하는 북한의 모습이 마치 6. 25. 직후의 한반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저자의 주장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단지 내가 수십년에 걸친 반공교육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그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있었을 것도 같지만 적어도 지금 남북한 국민의 삶의 질을 비교하면 북한에 대해서도 어떤 비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극악한 인권유린과 수많은 모순점에 대해서는 (물론 남한 사회에도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지만) 너무나도 관대한 저자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책 중간에 미국이 박정희의 쿠테타 저지를 위한 군대의 출동은 거부했으면서도 1964년 학생탄압을 위해 군대의 출동을 허가했다는 사실은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민주정부를 뒤엎고 군사독재를 은밀히 후원한 사실을 상기한다고 할지라도 꽤 충격적이었다. 물론 저자가 거짓으로 사실을 날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이의 저작물에 수록되어 있는 의견을 역사적 사실처럼 단정하여 기술하거나 인용되어 있는 사실적 자료를 재인용 표시없이 참고한 서적만 단순인용함으로써 오류의 가능성을 많이 남기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다.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경제 성장은 무의미한 것인지?(p163) 외국에서 들어오는 공장설비가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적합한 것이고 산업설비가 노후되었다는 것은(p164) 자본의 논리에 의하면 당연한 것이 아닌지.박정희 정권의 무뇌아적으로 미국의 사주와 조정을 받는 꼭두각시로 묘사하는 것은 그 정권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침해와 독재적인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그 당시 경제성장의 결과 현 우리 사회의 수많은 모순이 생겨났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누구나 그 당시 정권을 잡았더라도 지금정도의 상태는 되었을 것이라는 독단적인 가정에 근거한 편협하고 치우친 역사관이 아닌지.

매판자본이 비싼 원자재를 수입하여 헐값에 수출하여 아무런 이익도 남기지 못한 채 제국주의적 이익에만 봉사할 뿐이라는 주장(p173)도 그런 면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지금 남북한의 현격한 경제력의 격차와 삶의 질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이 책에 어느정도의 사실과 왜곡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정일의 권력세습 마저도 김정일의 탁월한 능력과 인민의 사랑때문에 정당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북한의 외교, 경제분야에 대한 평가는 북한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우리나라의 모든 정책과 사회현상을 미제국주의와 그 조정을 받는 군사독재정권과 그에 항거하는 민중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단세포적이고 편협한 시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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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9-05-2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쓴지 거의 5년이 다 되어서 내가 썼던 서평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다만,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함이 없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평을 읽다 보니 저자는 남한사회의 모순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문득 며칠 전 100분 토론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손꼽히는 이상돈 교수의 발언과 약간은 서평이 통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상돈 교수는 그날 너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이 보였다. 평소 이상득 교수가 쓴 균형잡힌 여러 글에 비해서 그날 토론은 솔직히 좀 실망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이상돈 교수같은 진짜 보수도 이 땅엔 너무 소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