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 또는 민주화된 사회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주의라는 단어자체가 엄청나게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적어도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막연한 생각에 따르면) 독재자가 군림하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또는 세습이 이루어지는 왕정국가에 대비하여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대표자들을 뽑는 제도가 보장되어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이해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앞에서와 같이 일종의 정치체제라고 보는 한에서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수한 점이 단순히 대표자를 선거를 통해서 뽑는 점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의 독재자가 국가를 잘 다스린다면 국민의 삶의 질은 기본적인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높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질로만 정치제제의 우수성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최장집 교수의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사회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거쳐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일단은 민주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면 민주화된 이후의 우리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최장집 교수의 대답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민생과 동떨어진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 그로인해 정치에 점점 무관심해지는 국민들, 그리고 의사를 반영시키기 위해 무조건 시위부터 하는 아니 시위 말고는 특별한 의사반영 수단이 없는 답답한 현실 등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논의로 되돌아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나 제도에 비해 우수하고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장집 교수가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사회가 서로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건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정치체제이고 서로 다른 이해 관계가 합리적 대안으로 조직되고 상호 갈등하고 경쟁하면서 그 내용이 풍부해지고 그 사회적 기초가 튼튼해지는 과정을 거쳐 일정한 타협과 합의를 만들어 갈 때 유의미한 의사결정구조가 되기 때문이다.(p33)

그런데 우리 사회에 이런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과거 수십년간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어 온 결과 권위주의 헤게모니를 신봉하고 권위주의 정권의 주세력을 이루는 여당과 그와 실질적으로 정책적인 차별성이 없이 무늬만 야당인 보수양당체제가 확립되어 왔고 그러한 양당체제로는 민의를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다양한 갈등구조를 반영할 수 없는 양강 보수정당 체제가 유지되어 왔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을 동원하지 못하고 '갈등의 사유화'를 통해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만 정쟁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가능하게 해 준 데에는 냉전반공주의가 큰 몫을 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후 남한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들의 이익 충돌, 갈등 상황을 남북한 간의 냉전적 극한 대립 상황 속에서의 생존문제를 내세워 모두 덮어버리고 억눌러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해 수많은 교육과 선전이 뒤따랐음은 당연하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일본에 공산당(사회당인지도 모르겠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국가체제는 어렴풋이 자유주의(그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혼재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였고 일본은 내가 알기로는 자유진영에 속한 자유주의 국가였는데 그런 일본에 공산주의 정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이 권위주의 정권이 열렬하게 이용한 냉전 반공주의는 많은 국민들에게 이분법적이고 폐쇄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즉 남북한 간의 냉전체제의 고착화와 이를 권위주의 정권이 악용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을 하는 것(냉전적 사고에서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약4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아직도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나와 다른 것을 사회 전체의 공공선이라는 더 큰 논리를 내세워 배제시키고 무조건 비난하는 태도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런 상황을 지난 수십년간 악용하여 기득권을 취해온 자들 뿐 아니라 그 권위에 억눌려 있다가 투쟁을 통하여 지배적 세력이 된 자들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아 씁슬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장집 교수는 그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대표적으로 민노당의 출현을 최장집 교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를 포함한 사회의 주요 계층 및 그 이해관계간 충돌의 결과인 갈등을 표출하고 이를 국가 운영에 반영시킬 건전한 정당 내지는 정치집단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주 원인이 시민사회와 괴리되어 있는 정당 즉 정당제도의 미성숙에 있기 때문에 정당과 시민사회(서민들의 관심사와 고충)와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유권자와 정당(또는 정치엘리트)간의 수직전 통제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그 일례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실현되었다. ) 등을 고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제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이해하는 원리, 원칙, 가치는 서로 다른 이념적 원류로 분해 가능한데 예컨대 생명보존에 대한 권리, 사적 자유, 품위, 자기표현, 행복추구, 재산권 등과 같은 요소는 본래 자유주의적 가치의 소산이고 공익의 존중, 참여의 권리, 책임성 등은 공화주의에 원류를 두고 있다(p222)고 전제한 다음 우리 사회에서 보수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세력에 의해 버려진 자유주의(p227)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기득권을 공익을 위해 일정하게 제한한다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기력증, 우울증, 위화감을 고려하면 훌륭한 처방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오늘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 제시한 '총체적 인간'에 대비되는 '부분적인 인간'을 옮기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우리 사회를 꿈꿔본다. 지금은 모순적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나는 우리의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권위주의에 대항했던 투쟁은 개인의 자율성과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나, 시민적 휴머니즘을 핵심으로 하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발전시킬 여지를 주지 못했다...(중략)..이 과정에서 배태된 인간 유형은 총체적 변혁을 추구하면서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투척하는, 자기희생적 변혁에 복무하는 인간...(중략)..'총체적 인간'이라 하겠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를 이상화하는 동시에,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개인에게 부과한다. 이들이 실제의 민주주의를 대면했을 대 총체적 인간에 대한 강조가 강했던 것칸큼, 민주주의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면적 자기부정이든 혹은 자기반성이든 지난날의 자신과 급격히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중략)..민주화 이후의 오늘날에는 총체적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운동이든, 민주적 정치과정이든 그것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선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참여자는 정체성을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대문이다. 민주화 이후 운동의 급속한 해체는 이러한 현상의 한 측면이다. 오늘날 총체적 인간이 창출해 낸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정치적 무관심, 투표불참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비오가 말하듯이 '민주주의의 과도함만큼 민주주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한다.(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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