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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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편지를 모아 엮은 책 중 백미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뒤 경어체의 단정한 문장과 부드럽지만 강인한 저자의 비판적 시선에 반했고, 감옥이 때로는 사람의 정신을 견고하게 다지는 사색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로부터 십수 년의 시간이 지나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이 '느낌표'에 소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 벌써 3~4년 전의 일이니 어쩌면 나의 독서는 시대의 유행에 크게 뒤떨어진 뒷북 독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책을 만나 감동을 받는 데 유행이 어디 있을까? 뒷북이지만 지금이라도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제목 그대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조와 사색을 담고 있다면, <야생초 편지>는 같은 편지글이면서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보다 훨씬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읽는 마음도 부담이 덜하다.

아마도 그 생동감은 그가 야생초와 함께 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교도관의 삽질에 내동댕이쳐지고. 비바람과 가뭄에 스러지면서도 끊임없이 솟아나 생명을 이어가는 야생초를 보면서 어찌 삶의 의욕을 저버릴 수 있었을까? 저자는 글 중간중간 "내가 감옥에서 나가면 이러저러한 생활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내년 명절은 꼭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는데, 그의 그런 모습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야생초와 꼭 닮은 모습이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어놓은 권력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야생초와 비슷하다. 야생초가 자신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게 만든 바람을 원망하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듯이 저자 역시 원망과 증오보다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쪽을 택한 것이겠지.

그러나 있는 자리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모든 부조리를 덮고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생태"라는 넓은 틀 안에서 조용하지만 힘찬 몸짓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인간과 환경이 떨어질 수 없는 운명 공동체임을 알고 있기에 그의 노력이 고마울 뿐이다.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뒷북이어도 좋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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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 이철환 산문집
이철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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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던 책은 아니었다. 작가 이철환의 전작, <행복한 고물상>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가가 가난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고, 사람을 너무 착하고 순하게만 묘사하는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가난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보다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것이 더 사실적이지 않은가, 사람의 맘 속엔 선하고 아름다운 면과 함께 이기적이고 악한 모습도 함께 존재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의 이야기 속 사람들은 가난을 그저 낭만적인 한때로만 추억하고, 심성 역시 한없이 착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해 오히려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그런 느낌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했다.

옆 자리 직장동료가 꼭 읽으라며 억지로 손에 쥐어주어 읽기 시작했지만, 중반 무렵까지는 예전의 그 불만을 고스란히 느끼며 덮을까 말까 망설였다. 뭐, 쉽게 술술 읽히는 글이니 권해준 사람한테 미안하지 않게 그냥 예의상 읽어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책장을 넘겨갔다.

그러나, 중간쯤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책 속에 빠져들었다. 책은 잊고 있었던, 때론 억지로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을 건드려 다시 불러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받고 좋아했던 유년시절,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뒤 가슴아파 어찌할 줄 모르던 풋풋한 대학 시절, 암에 걸린 아버지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공포와 죄책감을 함께 느끼던 몇 년 전.... 책은 그런 기억들을 다시금 불러들였고, 나는 책을 읽으며 과거의 일로 웃고, 울었다.

책에는 읽는 이의 감성을 건드리는 이런 글 외에도, 제목 그대로 작가의 반성문 같은 자기고백의 글도 함께 실려있다. 군부독재 시절 장학금을 놓치기 싫어 시험거부에 동참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한, 학원강사 시절 자신의 학력을 본의 아니게 속였던 것에 대한 죄책감, 자신도 어쩌지 못했던 본능적 욕정에 대한 고백까지...

어쩌면 비겁했고, 어쩌면 교활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작가는 그래도 자신이 쓰는 글과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노라고 강조한다. 자기변명같기도 하여 거슬릴 수도 있으련만, 책장을 다 덮고 나니 그의 진심을 믿고 싶어진다. 너무 착해 오히려 가식같던 그의 글을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박수받는 사람보다 박수치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52p)'는 것을 알고 있고,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거짓말(133p)'이라는 것을 용감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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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라기
투이아비 지음,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김범경 옮김 / 하서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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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은 건 9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화 형식을 빌린 산문집들이 한동안 인기를 끈 적이 있었는데, 그 틈 속에서 특이한 제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책이 바로 이 책, <빠빠라기>였다. 나 역시 독특한 제목에 흥미를 느껴 친구에게 빌렸지만, 몇 장 읽고는 재미가 없어 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이 나와는 인연이 깊었던지 세월이 한참 지나 30대가 되어 내가 가르치는 학교의 학급문고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익숙한 제목에 반가움을 느껴 집어들고 조금씩 읽어나가길 일주일... 출퇴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만 짬을 낼 수 있는지라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고등학교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감동과 여운이 느껴졌다.

'빠빠라기'는 사모아 말로 '하늘을 찢고(깨고)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서양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양인(유럽인)들이 처음 돛이 달린 배를 타고 사모아를 찾았을 때 바다 저 멀리서 돛이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듯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책은 사모아 섬의 추장이 자기 부족에게 자신이 본 서양의 문물을 비판하는 연설문(혹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과의 교감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돌상자(주택) 속에 갇혀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동그란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추장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잘 드러나 있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리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일 수 있다니, 참 '다르게 보기'의 위력은 강하기도 하다.

직접적인 비판의 화살은 유럽인들에게 향해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책은 인간의 문명과 지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소유욕과 탐욕으로 신을 욕되게 만들고, 사상과 사색이라는 명칭하에 예민한 신체 감각을 상실해 가며, 입으로는 신과 사랑을 들먹이면서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인간의 모습은 사실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도 혐오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맘만 먹으면 반나절도 안 되어 다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지만,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한 어투로 문명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책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사모아 섬의 주민들이 지금도 이 책이 쓰여졌을 때처럼 자연친화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모아 섬 관광 사이트가 줄줄이 올라온다. 책 곳곳에도 유럽인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드러나 있다. 문명은 이리도 빠른 속도로 자연을, 자연스런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침범하고 있다. 속도를 말하기 전에 그 방향이 과연 바른 것인지 돌아봐야 할 터인데...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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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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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라는 부제목이 적혀 있다. 굳이 따지자면 '농사'보다는 '세상' 쪽에 무게를 둔 책이고, 세상을 그냥 '사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세상을 '관찰'하고 '비판'하며 그 세상을 통해 나를 반성하는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소소한 자연의 변화와 세상사는 이치를 연관시키고, 농사짓는 마음가짐 속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원동력을 찾아내며,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부패와 부조리에 물들지 않으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얇은 책이지만 이 책을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각오와 마음가짐이 너무도 꼿꼿하여 한 줄 한 줄 넘어갈 때마다 자세를 고쳐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긴 글이 오히려 책에 담긴 뜻을 훼손할까 염려되어 짧은 리뷰로 남겨두련다. 언제까지나 꼿꼿하게 남아계실 줄 알았던 선생이 이미 3년 전 세상을 떴다니(미욱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야 알았다.)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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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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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엽서>를 산 후 나는 행복했다.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들고 다니며 볼 수는 없지만, 군데군데 찍혀있는 '검열 필' 도장이 가슴아프기도 하지만, 그의 글씨와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오늘, 나는 또 하나의 기쁨 <처음처럼>을 만났다. <엽서>의 글씨와 그림이 작고 소박한 느낌이었다면, <처음처럼>에 담긴 유려한 붓글씨와 선명한 색채의 그림은 한결 여유롭고 푸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그의 됨됨이... 그는 한없이 온화하고 겸손하지만 기존(旣存)과 권부(權富)에 몸을 낮추지 않겠다는 의기는 매섭기 그지 없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삶과 사회에 대해 사색하지만, 그 성찰과 사색의 결과가 항상 실천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참다운 변화는 우직한 사람들의 느린 한 걸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그의 믿음은 너무 아름다워 눈물겹기까지 하다.

<처음처럼>은 신영복의 다른 저작에서 글을 발췌하고 붓글씨와 그림을 덧붙여 놓은, 이른바 기획상품이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짧지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글이 있고,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그림이 있고, 쓴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엿보이는 글씨까지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는 책을 내면서 많이 망설였고, 독자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고 고백하지만, 덕분에 이리도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었으니 독자인 나는 그의 망설임과 미안함이 오히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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