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빠라기
투이아비 지음,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김범경 옮김 / 하서출판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은 건 9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화 형식을 빌린 산문집들이 한동안 인기를 끈 적이 있었는데, 그 틈 속에서 특이한 제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책이 바로 이 책, <빠빠라기>였다. 나 역시 독특한 제목에 흥미를 느껴 친구에게 빌렸지만, 몇 장 읽고는 재미가 없어 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이 나와는 인연이 깊었던지 세월이 한참 지나 30대가 되어 내가 가르치는 학교의 학급문고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익숙한 제목에 반가움을 느껴 집어들고 조금씩 읽어나가길 일주일... 출퇴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만 짬을 낼 수 있는지라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고등학교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감동과 여운이 느껴졌다.

'빠빠라기'는 사모아 말로 '하늘을 찢고(깨고)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서양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양인(유럽인)들이 처음 돛이 달린 배를 타고 사모아를 찾았을 때 바다 저 멀리서 돛이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듯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책은 사모아 섬의 추장이 자기 부족에게 자신이 본 서양의 문물을 비판하는 연설문(혹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과의 교감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돌상자(주택) 속에 갇혀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동그란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추장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잘 드러나 있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리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일 수 있다니, 참 '다르게 보기'의 위력은 강하기도 하다.

직접적인 비판의 화살은 유럽인들에게 향해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책은 인간의 문명과 지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소유욕과 탐욕으로 신을 욕되게 만들고, 사상과 사색이라는 명칭하에 예민한 신체 감각을 상실해 가며, 입으로는 신과 사랑을 들먹이면서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인간의 모습은 사실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도 혐오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맘만 먹으면 반나절도 안 되어 다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지만,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한 어투로 문명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책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사모아 섬의 주민들이 지금도 이 책이 쓰여졌을 때처럼 자연친화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모아 섬 관광 사이트가 줄줄이 올라온다. 책 곳곳에도 유럽인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드러나 있다. 문명은 이리도 빠른 속도로 자연을, 자연스런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침범하고 있다. 속도를 말하기 전에 그 방향이 과연 바른 것인지 돌아봐야 할 터인데...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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