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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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의 전작 <괭이부리말 아이들>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 명희가 "다시는 혼자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하는 부분이 있다. '혼자 잘 사는 삶'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겠다는 주인공의 다짐이 담겨있어 읽으면서 콧등이 시큰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거대한 뿌리>를 읽으면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그 문구를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그 다짐은 주인공의 입을 빌린 작가의 다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특히 혼혈 아동)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두천의 기지촌과 현재 살고있는 I시(인천)의 M동을 교차시키는 시선도 흥미로웠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통해 혼혈아에 대한 차별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제물건은 좋아하면서 왜 절반이 미제인 우리는 싫어하느냐."라고 울부짖는 재민이의 아픔은 "이주노동자를 돕는 활동가는 괜찮고 이주노동자를 사랑하고 아기를 가지면 안 되느냐."고 외치는 정아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재민이와 정아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작가는 '핏줄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엇나가는 재민이를 끝까지 기다렸던 어머니의 사랑이 '핏줄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그런 어머니에게로 돌아온 재민이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을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 끝까지 기다려준 사람에 대한 깊은 고마움... 인종과 상관없이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 이런 것들이 '핏줄'에만 국한된 좁은 사랑보다 훨씬 깊고 넓고 아름답다는 것을 저자는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영향 때문인지 이 책도 청소년 추천도서로 되어있던데, 고등학생이라면 모르겠지만 중학생이 읽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었다. 청소년보다는 사회 안에서 청소년을 가르치고 길러야 할 어른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내 자식'이라는 핏줄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에서 함께 기르는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과 이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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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 전9권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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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객주>는 최근에 나온 재개정판이 아니라 1992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개정 2쇄판이다. 초판본이 나온 것이 1981년이었고, 1992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2003년에 재개정판이 나왔으니 꼭 11년마다 한 번씩 개정판이 나온 셈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은 것은 대학입시를 막 끝내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온 뒤였다. 술만 퍼마시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영 마뜩찮아 그 좋아하는 수다도 제대로 떨어보지 못하고 구석에 조용히 박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까마득한 85학번 선배(물론 술이 떡이 된...)가 다가와 이것저것 주절주절 떠들다가 입학 때까지 남은 기간 동안 책이나 많이 읽으라며 권해준 게 바로 <객주>였다.

제목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누가 썼는지,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오리엔테이션에서 돌아온 이튿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이 책을 덜컥 사 버렸다. 처음엔 재미없으면 한 권만 읽고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1권만 샀지만, 그 다음부터는 두 권, 세 권을 한꺼번에 사들고 왔던 기억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했던 생각은 내가 모르는 순 우리말이 정말로 많다는 거였다. 그러나 생경한 우리말이 문장 안에서 겉돌지 않고  질펀한 사투리와 실감나는 구어체에 잘 어울려 있다.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낱말을 찾아가며 읽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즐거움이 과연 이런 거구나... 절감할 수 있었다.

<객주>는 양반이나 왕궁안에 갇힌 궁녀들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부상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피땀흘리는 수많은 민초들의 삶을 이만큼 생생하게 나타낸 소설은 아마도 없지 싶을 정도로 현실감있다. 

또한 <객주>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대하 인생 드라마'이다.  물론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인물이 있긴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고유한 삶의 모습과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여 읽는 맛을 살리고 있다. 지적이거나 논리적인 문장은 아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언어와 삶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객주>의 최대 장점이다. 

입시를 끝내고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예비 대학생들, 긴긴 겨울 밤 옆구리가 시려 밤잠을 설치는 싱글들에게 강추! 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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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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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등장인물 없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져있는 것도 독특하고, 장소의 이동, 배경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는 것도 독특하다. 그런 독특함 때문에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몰입이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컴컴한 취조실 안, 전등갓도 없는 알전구 밑에서 밑에서 수갑을 찬 채 고통스럽게 진술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심리묘사는 시종일관 불안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마음까지 그려보일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이 책은 죽은 사랑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련한 한 남자의 절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은 급기야 환상 속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 현실에서 다하지 못한 부부의 연을 이어나간다. 환상이지만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여행을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은 가련하고 안쓰러워서 내 옆에 그가 실제로 있다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울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내용의 엉성함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자기 소설에 대한 패러디(경마장의 오리나무에 대한...), 사건 하루만에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수집하고 주인공을 추궁하는 보이지 않는 경찰관의 비현실적 모습은 소설에의 몰입을 간간이 방해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며, 진실이 무엇인지 참 사랑과 참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이 철학적인 소설을 어찌 가치없다 폄하할 수 있을까...!

6년 만에 다시 꺼내읽은 이 소설은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독서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꺼내 읽는다면, 그 때는 주인공의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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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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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내가 읽은 <고등어>는 이 책이 아니라 웅진출판에서 나온 초판 30쇄 판이다. 내가 산 날짜는 1995년 4월 10일, 책을 구입한 장소는 학교 구내서점이었다.

책을 펼쳐드니 공지영이 이 책을 처음 썼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다. 아마도 작가는 30대에 접어들어 자신의 20대를 떠올리며 이 책을 적어내려갔겠지. 나 역시 30대에 접어들어 나의 20대를 떠올리며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읽다보니 최근에 읽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고등어> 사이에 형식상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의 각 장이 유고일기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윤수의 유고일기(블루노트라는 이름이 붙은~)로 시작하고 있다면, <고등어>는 노은림의 유고일기로 소설의 각 장을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각 장에 붙어있는 주인공들의 유고일기는 작가가 하고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20대에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참 눈물을 많이도 쏟아냈었다. 운동권에 대한 후일담 소설이라는 당시의 비판과 상관없이 나는 이 책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어긋난 사랑, 주어진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되찾고자 하는 꿈에 더욱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읽은 책은 물론 그 때만큼 감동적이거나 눈물겹게 슬프지는 않다. 가끔 매우 성숙한 어른인 척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주저없이 별 다섯 개를 준 것은 나는 공지영의 진심(사람과 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이 386 세대임을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며 다른 사람들보다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자위하고 있다는 어느 리뷰의 비판은 일리있다.

하지만, 열광적인 민주투사가 보수정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이른바 기득권층이 된 운동권들이 자신의 운동경험을 이미지를 위해 팔아먹는 구역질나는 세태에 비하면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경험을 인간 생명에 대한 사랑(<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보여준 사형제 폐지와 같은...)으로 확대시키는 그녀의 변신은 오히려 아름답고 올바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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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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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십 년도 지난 일이 되어버렸지만, 대학시절 나는 공지영의 책을 몰래 읽었었다. 언젠가 한 번 과방에서 공지영의 "고등어"를 읽고 있는데, 내가 따르던 선배가 "그 따위 통속적인 후일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어딨냐?"며 질책을 퍼부었던 탓이다. 90년대 초반... 80년대를 광풍처럼 휩쓸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그 시절의 뜨겁던 열정을 잊지 못하는 복학생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어거지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히고 학습을 시키려 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통속적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이별, 불행과 고통, 화해와 용서가 담겨있는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학교를 오고가는 지하철 안에서, 내 방 안에서 틀어박혀 그녀의 책을 읽었을 뿐, 사람들에게 "이 책 한 번 읽어 봐."라거나 "요즘 이 책 읽고 있는데, 무척 재밌어." 따위의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도원 기행> 이후 몇 년 만에 읽은 그녀의 소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붙잡고 권하고 싶을 만큼 성숙하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신파와 통속이 적절하게 어우러져있는 그녀의 문체는 여전했지만, 그 속에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담는 능력은 십여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라있는 듯 하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삶은 무엇이냐?" "죽음은 무엇이냐?" "인간의 존엄이란 어디에 근원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형을 앞둔 죄수와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던 여자와의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소통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아이러니한 제목 안에 위치시키고, 읽는 이의 불편한 감정을 끊임없이 유발하며 앞의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도록 다그치는 것이다.

답은.. 나는 그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책의 끝부분에서 "신비롭게도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더더욱 신비롭게도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 데 또 일생이 걸린다. -세네카-"라는 문구를 읽어내려가면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삶은 그 자체로 황홀한 사건이고, 설령 죽을 날짜를 받아놓고 사는 시한부 삶이라 해도(어차피 시한부 아닌 삶은 없지만) 삶의 의미와 무게는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보면 사랑 이야기이고,  사형제 폐지라는 작가의 주장이 너무 티나게 담겨있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은 여느 철학책 못지 않다. 이전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을... 이 책을 통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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