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진술>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등장인물 없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져있는 것도 독특하고, 장소의 이동, 배경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는 것도 독특하다. 그런 독특함 때문에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몰입이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컴컴한 취조실 안, 전등갓도 없는 알전구 밑에서 밑에서 수갑을 찬 채 고통스럽게 진술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심리묘사는 시종일관 불안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마음까지 그려보일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이 책은 죽은 사랑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련한 한 남자의 절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은 급기야 환상 속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 현실에서 다하지 못한 부부의 연을 이어나간다. 환상이지만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여행을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은 가련하고 안쓰러워서 내 옆에 그가 실제로 있다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울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내용의 엉성함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자기 소설에 대한 패러디(경마장의 오리나무에 대한...), 사건 하루만에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수집하고 주인공을 추궁하는 보이지 않는 경찰관의 비현실적 모습은 소설에의 몰입을 간간이 방해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며, 진실이 무엇인지 참 사랑과 참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이 철학적인 소설을 어찌 가치없다 폄하할 수 있을까...!

6년 만에 다시 꺼내읽은 이 소설은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독서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꺼내 읽는다면, 그 때는 주인공의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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