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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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시집을 마지막으로 읽은 건 2005년 '돼지들에게'였다. 그 때 시 전반에 깔려 있는 증오와 분노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난감했고, 불편했다. 그 이후 그의 시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14년 만에 용기를 내어 14년 만에 다시 그의 시를 읽었다. 시도 시인 따라 나이를 먹는다. 청춘의 표상과도 같았던 그의 시에 이젠 나이먹어 삐걱거리는 관절의 아픔이, 치매 어머니 간병의 고단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아픔과 고단함에 주저앉지 않는다. 씩씩하게 밥을 앉히고, 아는 똥은 더럽지 않다며 씩씩하게 똥을 치우고, 씩씩하게 사업자 등록을 신청하여 출판사도 차리고, 치열하게 '은'과의 재판도 이어간다.

 

여전히 삶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사는 시인의 모습은 머리로 쏟아지는 냉수처럼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그리고 적당히 포기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여전히 치열한 그가 무척이나 고맙다.

잊지 못할 과거는 없어.
소독 못할 환부는 없어.

(‘너를 보내며‘ 중에서)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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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풀꽃도 꽃이다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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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길고, 지나치게 등장인물이 많고,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지나치게 훈계조다.

 

현 세태를 반영한답시고 구겨넣은 아이들의 비속어는

현실감을 준다기보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교육문제에 대한 비분강개가 지나쳐

작가는 소설이 아니라 일장연설을 하고 있고,

책을 읽는 독자는 선생님께 꾸중듣는 학생 같은 심정이 되고 만다.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과 의견이 담긴 에세이였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읽는 내내 아쉬웠다.

지나친 것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안타깝게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엄마들 사랑? 그거 자식들 죽이는 독약이에요.? (1권 p.114)

`엄마, 제발 생각을 좀 바꿔. 엄마와 난, 엄마와 딸의 관계일 뿐이지 내가 엄마의 소유물은 아니야.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고,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거야. 서로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거라고. 엄마들은 다 대학 나왔으면서도 왜 그 쉬운 걸 구별할 줄 모르는지 몰라." (1권 p.230)

자신은 그나마 좋은 일 때문에 따를 당해도 이렇게 외롭고 슬픈데,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뚱뚱하다고, 말을 좀 더듬는다고, 몸집이 작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어리버리하다고 따를 당하는 애들은 얼마나 외롭고 억울하고 슬프고 분했을 것인가. 이제야 그런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졌다. (1권 p.270~p.271)

교육이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실천이었다. 지식의 일깨움이나 전달은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세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반대로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공부가 강조되고, 경쟁이 신봉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실종되어 그 자취가 묘연했다. (2권 p.90)

고민이 생겼을 때 누구와 상담하느냐는 질문에 학생들 40.2퍼센트는 `친구`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0.9퍼센트였다. 그런데 60퍼센트의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자신을 대화 상대나 상담 상대로 생각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얼마였을까? 엄마는 아예 없었다. --- <중략> --- 그러나 엄마만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선생도 가차 없이 버려 상담 대상으로 0.1퍼센트도 나오지 않게 해버렸다. (2권 p.137)

전후의 혹독한 굶주림 속에서 ‘넝마주이‘라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도시의 청결을 해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듯이 오늘의 가난한 청소년들도 법이 보장하는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밑바닥 경제를 그렇게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업주들만 가엾은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돌고 돌듯 우리 사회, 우리들 모두가 그 갈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었다. (2권 p.212)

민주주의는 교실에서부터 - 문병란 -

민주주의는 / 교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사는 진실을 말해야 하고 / 학생들은 그 진실을 배워야 한다.
교단은 비록 좁지만 천하는 굽어 보는 곳
초롱한 눈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
자유로이 묻고 / 자유로이 대답하고
의문 속에서 창조되는 진리
아니오 속에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외우는 기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일등짜리만 소용되는 출세주의 교육
꼴찌를 버리는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일등하기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음독 자살하고
참고서 외우는 죽은 교육 싫어서 목을 매달고
점수에 납작 눌려 있는 초조한 가슴들
교실이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친구의 목을 누르는 경쟁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이면 오손도손 정이 익어가고
눈과 눈들이 별이 되는 꽃밭
서로의 가슴에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교실은 너와 내가 하나 되는 공동체
각기 다른 빛깔로 피는 꽃밭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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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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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권여선의 책이다.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엔 '너무 오랜만에 읽는 단편소설이어서 적응이 되지 않았나...' 했다. 그러나 한 편, 또 한 편... 읽어보아도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에잇, 재미없어!' 라며 그만 읽을 수도 없었다. 낯설고, 그래서 꺼려지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묘한 매력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도 묘한 매력과 익숙해지지 않는 낯설음..이라는 상대적인 두 감정이 팽팽하게 유지된다. 왜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기괴하고 내 주변엔 없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이 소설집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정 주기 힘든 밉상들이다. 알레르기로 진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심각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상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가을이 오면'의 주인공), 심각한 거식증과 대식증으로 자기자신을 학대하며('반죽의 형상'의 주인공), 주변 분위기와 상관없이 주절주절 제 하고픈 얘기만 늘어놓는 진상을 떨기도('문상'의 등장인물)  한다.

그 뿐인가? 소설의 결말들은 어찌 그리 볼일 본 후 밑도 닦지 못하고 급히 나온 뒤의 느낌처럼 찝찝하고 불쾌한지... 뭔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해볼까 하는 찰나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산송장이 되고('약콩이 끓는 동안') 느닷없이 사라진 한 사람 때문에 평화롭던 공동체가 서서히 무너지고('솔숲 사이로') 남편의 후배와 밀회를 즐기던 여자가 저녁 산책길에 느닷없이 목이 졸려 납치를 당하는('위험한 산책') 결말은 몇 번을 읽어도 적응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밉상 인물들이 구질구질, 찝찝, 불쾌하게 살다가 기괴하게 끝맺는 이야기라도 쉽게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건 상식적이고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고있다고 자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내부에도 설명할 수 없는 악취와 사악함, 비루함 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는 그늘진 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있다. 거북하고 외면하고 싶지만 쉽사리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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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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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뭐,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빠져있는 절망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더이상 추락할 수 없을 때까지 추락한 뒤, 바닥을 치고 스스로 올라오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런 절망의 극한에서 자신을 이기고 다시 삶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굳이 등산용어를 몰라도 상관없다. 처음엔 낯선 용어일지라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감으로나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독서의 흐름을 끊어가며 용어를 찾아 읽는 것보다는 감으로 내용을 이해해가며 술술 넘겨 읽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를 더욱 살려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가장 두드렸던 단어는 생뚱맞게도 '모럴'이었다. 네이버에서 한글로 '모럴'을 치면 '집단의 구성원에 의하여 형성되는 집단 내의 심리적 상태'라는 설명이 뜬다.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이 책에서 사용되는 '모럴'이란 개인의 양심이 만들어내는 내면적 규범 내지 도덕이라는 뜻인 듯 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 모럴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상민은 등산가로서의 모럴을 지키기 위해 가능하면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산을 오르려 하고, 영교는 가족에 대한 모럴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형제간의 우애를 갈구하며, 정선생은 원치않는 아이였지만 자신의 자식에 대한 모럴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꿈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럴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에 대한 댓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따르던 선배의 죽음과 이혼, 살인미수라는 범죄, 자식의 출가... 이쯤 되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다시금 모럴이다.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험하기로 소문난 촐라체 북벽을 오르는 것... 이것이 인생의 막장에서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상민과 영교의 조난과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다. 베이스캠프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기다렸던 정선생의 마음 역시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순간순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때는 나 역시 "그래, 차라리 죽어라. 그게 더 편안하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라 했던가...? 그들은 끝없는 절망과 추락의 낭떠러지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았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그 모럴을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손가락과 발가락, 발목과 무릎을 잃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헛되지 않음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으니 남은 생애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그들은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을 터이다.

작가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고 밝혔다. 등산 얘기에 무슨 존재고 시간일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삶의 크레바스를 만났을 때, 상민과 영교를 기억하며 그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올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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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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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미지가 없어 yes24에서 퍼왔습니다.)

책 속지를 보니 99년 12월에 구입한 책이다. <비명을 찾아서>를 너무 재밌게 읽은 뒤 복거일이란 작가에 혹해 구입했다가 실망하고 10년 가까이 구석에 쳐박아 두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음이 동해 다시 꺼내들었다.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재미있게 느껴졌다.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책이다. 책의 맨 뒷 장에서 작가는 "기지촌에서 힘든 삶을 마감하신 부모님 영전에 바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책은 중학교 1학년이던 주인공 재근이와 그 가족들이 30년 동안 미군부대 캠프 세네카 주변의 기지촌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전형적인 친미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캠프 세네카의 사령관은 주민을 위해 학교와 고아원을 지어주고, 정부 관리들을 압박해 마을에 전기를 끌어다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마을을 돕는 선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마을 주민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학교 뜰에 공적비를 세운다.

미군들의 성 노리개가 되는 여성들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이른바 양색시들과 관계를 맺는 미군들을 "신랑"이라고 부르고, 그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살림집"으로 일컫는다. 미군의 행패로  여자가 사망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시체를 둘러매고 부대로 찾아가 항의하는 주민들을 근엄하게 타일러 해산시키고,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만 주민들은 아예 문제를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조용하게 일을 마무리한다.

캠프 세네카가 쇠퇴하면서 미군이 있던 자리를 국군이 차지하고, 주민들을 통제하는 팻말을 붙이자 "주인"인 미군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객"인 국군이 나서서 무슨 짓을 하느냐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80년대 들어 캠프 세네카가 더욱 쇠퇴하고 미군들마저 초라해 보이자 "가장 멋진 나라", "좋은 나라"였던 미국이 예전의 미국같지 않다며 당혹해 하기까지 한다.

복거일이 처음 영어 공용화를 주장한 게 1998년이라 한다. 사실 나는 그가 주장했던 영어 공용화론에 대해 자세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가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기지촌 주변에서 살았던 경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의 내용이 온전히 작가의 경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작가가 하고있는 이야기는 작가가 머리와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그려왔던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미국에 대해 이러한 이미지와 생각을 갖고있는 한 한미간의 관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주인"을 닮아가는 첩경인 것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지. (이런 시각이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라고 비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복거일이 최근 대학생들과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 (대학생 웹진 i-bait.com) 그는 아직도 자신의 영어 공용화론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 방향을 잘 잡았다고 하면서도 학교에서 억지로 몰입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엄마 품에서부터 두 개의 "모국어"로 말하는 영어 공용화론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작가가 글만 쓰며 사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지만, 작가가 사회를 향해 사람들을 향해 쓴소리를 지르는 게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가 글 잘 쓰는 소설가로만 남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소설로만 본다면.. 개인적으로는 꽤 재미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설의 작가가 복거일이라는 것... 아무리 그냥 소설로만 읽으려고 해도 그가 주장하는 이야기들과 맞물려 그럴 수 없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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