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철학 - 음식 속에 숨어 있는 영양 가득한 철학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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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에겐 '밥상머리 철학'이 있었다.
아이는 밥상머리에 앉은 어른을 통해 먹을거리를 둘러싼 자연과 세계를 알았고, 배웠다. 음식(요리)을 통해 자연스레 아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어른이 되어갔다. 인류의 식문화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먹을거리에는 인류의 지혜와 사유가 담겨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존해야 하니까. 생존을 위한 제1법칙, 먹어야 산다. 요즘 하루에 한 끼 먹자는 11이라는 책 덕분에 그것이 유행처럼 번진다지만(내 주변에도 벌써 몇 명 생겼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시작부터 식문화는 빠질 수 없는 유산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세상을 향한 사유와 철학도 자연히 먹을거리에 녹아있을 수밖에.

인류의 모든 지혜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사유가 들어있는 소중한 밥상문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 먹을거리가 넘쳐나면서(그럼에도 굶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뼈아픈 사실!) 먹을거리에 대한 존중과 사유를 하지 않게 됐다. 그냥 액면 그대로 먹을 뿐이다. 배고프니까 먹고, 먹으니까 좋을 뿐이다. 밥상머리를 통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능력은 퇴행했다. 요리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디 그것들은 생각하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먹을거리를 만들고, 먹을거리를 먹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전설적인 요리사나 미식가들을 보라.
그들, 칼질이나 테크닉이 좋아서, 기막힌 미각을 지니고 있어서 전설이 된 것이 아니다. 요리에 담긴 자기만의 철학! 즉, 자연, 생명, 재료, 음식에 대한 철학과 사유. 생각 없이 가질 수 없는 무엇. 그런 요리를 먹는 사람들도 역시 사유를 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교감. 그것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요리는 전멸하다시피 하고, 요리기능공 혹은 요리숙련공만 넘쳐난다. 먹는 사람과의 교감 따윈 안드로메다로 갔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줄 알았던 인류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대신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다. 밥상머리 철학? 흘러간 옛노래로 전락했다.

요즘 아이들 먹을 것 귀한 줄 모른다는 어른들의 툴툴거림.
그것은 자충수다. 어른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은 과오다. 자신의 배와 제 가족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었다. ‘먹이면 된다는 것이 결국 많이먹이는 쪽으로 발달했다.

식탁 위의 철학은 음식을 통해 사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철학()을 직접적으로 들이대며 음식과 철학의 연관성을 획득한다. 저자 신승철은 일상에서, 그것도 가장 원초적이고 낮은 단계의 일상(먹는 것)에서 철학을 길어낸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맞다, 아니다를 떠나, 그것이 음식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임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가령, ‘잡채를 통해 전체주의와 독재적 권력의 사상으로 향할 요소를 내부에 갖는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것이 차별과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잡채처럼 다름이 섞여 새로운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잡채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생각을 확인시켜줘서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처럼 철학 용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종 다양성, 생물다양성, 문화다양성이 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잡채의 시간!

발효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천천히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기다림의 미학을 필요로 하는 것, 그리하여 삶 또한 내면의 발효에 의해 형성하는 것. 저자는 발효를 통해 삶은 본디 느림의 과정이며, 타인과 똑같지 않은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갖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소수자는 곧 양적 소수가 아닌 자신의 특이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견해와 더불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것이 생산될 수 있다는 이질발생의 개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둘러봐라. 지금 우리를 감싼 글로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것은 경쟁을 통해 내 것이 남의 것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수작인데, 그런 개수작을 요구하는 자본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 없이 투항하곤 한다. 진짜 글로벌, 진짜 세계화는 이 세계가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연결돼 있음을 알고, 지구 저 어딘가 나와 상관 없을 것 같은 남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교감하는 것이다. 어딜 가도 똑같은 이름의 커피브랜드, 패스트푸드체인을 만나는 것이 대체 무슨 감흥이 있단 말인가. 여기 저기 비슷한 풍경으로 도배한다면 우리는 대체 왜 그곳을 가는가 말이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브랜드만 중요한 똑같은 질문. 복제와 반복에 의한 동질발생.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주술인데, 우리는 그 주술에 주화입마를 입은 상태다.

따로 또 같이를 통해 뒤섞임의 미학을 자랑하는 비빔밥에 저자가 감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달라서, 다르기 때문에 어울릴 수 있는 것. 이질발생의 아름다운 맛과 향기.

그래서 이런 사유는 정말이지 반가워서, ‘만쉐를 부를 뻔했다.
맛의 변형과 재창조는 음식의 역사가 흐름의 역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p.95)

, 이 저자는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밥상머리에서 철학을 길어 올릴 줄 아는 양반이구나. 감히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특히 커피를 만드는 사람인 내 입장에서 가장 반가운 대목은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것이었다. 커피에 담긴 세계의 불공정함, 그 불편한 진실을 꺼내준 것이 반가웠다. 커피는 식민과 착취의 부산물일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부려먹기 위해 모르핀처럼 주입한 검은 액체였다. 더 큰 문제는 기호와 취향을 획일화시키고 조정한다는 것이다. 거대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철 공장과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198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잠이 오지 않는 값싼 인스턴트커피를 먹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인스턴트커피는 노동 현장마다 한 켠에 준비되어 있었고 권장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취향과 기호를 평준화시키면서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고용주라면 인스턴트커피의 장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으면서도 생산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근과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카페인의 힘에 의지하여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p.127~128)

, 지금의 많은 커피는 내부 식민지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커피는 본디 사유하게 만드는 음용수였지만, 지금의 인스턴트커피 혹은 거대 프랜차이즈 커피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내 업무()로 국한돼 버렸다. 지배 질서의 커피 주술에 놀아난 결과다. 취향과 기호마저 저급해졌다. 고작 인스턴트커피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수준이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인스턴트커피를 권장하는 사회속에는 무의식적으로 더 빨리 일할 것, 더 오래 공부할 것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지배 방식이 존재합니다.”(p.130)

먹을거리는 세심하며 섬세하고 예민한 지점이다.
커피를 하고 계속 공부를 해가면서 나는 그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해서도 그리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즐겁다. 세상이 넓어지는 한편으로 혀의 감각처럼 촉수가 민감해지면서 미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넓고 깊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아직 부족하며, 영원히 채워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커피와 먹을거리를 통해 나는 달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보건대,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는 다름이다.
다름이 섞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획일적이지 않은 소수의 특이성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제가 된다고 나는 읽었다. 은근히 먹을거리를 통해 혁명을 부추기는 심보(!). , ‘이렇게 밥상머리 철학이 이뤄진다면 참 즐겁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소수이지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커피를 만들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획일적이고, 증식에만 관심 있는 종자들 아닌 특이성 생산을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

저자의 또 다른 키워드는 정치.
음식을 통한 정치. 나는 먹는 것이 곧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을 먹느냐, 그 작은 일이 미시정치를 일구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취향, 기호, 맛까지 다국적 기업 혹은 재벌의 농간과 협잡에 놀아나는 것, 끔찍하지 않나? 지배질서에 의해 노예로 내부 식민지화하는 것,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 아닌가?

우리가 먹는 것이 자본과 정치에 의해 조작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표를 잘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도 그래서 잘해야 한다. 깨놓고 말해서, 남 차려준 밥상만 깨작거렸을 생각 없는 박근혜 따위 찍으면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돕는 것이다. 그럼 문재인이나 안철수는? 물론 아직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 식민지화를 조금씩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후보 김소연을 찍는 것도 좋겠고.

이 책은 먹을 것 얘기하면서 은연 중 각성을 요구한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뭘 먹고 살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강조한다.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이 책의 기조에 완전 공감!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생의 감각을 깨우고,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든다. 먹는다는 건, 종종 강조하지만,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먹는 것을 존중하고 고마워하며,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섰다고 세간에서는 평가한다고 했다. 이 책을 만나서 당신도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타락이요, 근사한 방탕이로다. 혹시 그동안 먹을거리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았다면,유죄.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이 책, 필요하다. , 113쪽의 영화 <빵과 자유><빵과 장미>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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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 & 발렌틴 투른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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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것을 고르는) 행위가 왜 정치적인가에 대한 이야기, 종종 했다. ( 왜 먹는 것이 정치인가 : 식량 선택의 정치학 ,  당신도 자본에 의해 조작된 먹거리에 오염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넌 왜 먹는 것 갖고 그러냐'는 너의 타박(?) 받았다. 실실 웃으면서 생깠다. 그야말로 무식의 극치니까. 혹은 넌 거대식품자본에 포박된 노예니까. '무식한 노예'에게 무슨 말을 덧붙여 설득하겠는가. 그래, 니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그러나 실은 자본에 의해 길들여진 니 주디에 달콤한 것), 실컷 처먹어라. 속으로 그렇게 말해주셨다.  


물론, 나는 '네(사)가지'가 없어서 그리 했다만(설득력도 부족하고, 설득하느라 힘빼기도 귀찮고), 다시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 책, 너에게 다시 권한다. 내가 권한다고 색안경부터 끼고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연상될 수도 있겠다. 맞다. 두 책은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해서, 장 지글러의 책이 세계에 만연한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을 국제정치(의 허술함)에서 찾았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는 일상의 정치(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준다.


그래, 두말할 것도 없다. 소비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낭비도 정치적인 행동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고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버리는 행위.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도 쉽게 행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에서 왜 또 '정치'를 끄집어 내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 것이나 먹게 만드는 것, 너무도 쉽게 식량(식품)을 버리도록 만드는 것. 그것 자체가 거대자본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현실 정치에서나 일상의 정치에서나 아주 폭넓게 개입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든다. 자본이 만든 룰에 포박된 채, 그 울타리안에서만 (선택의) 자유를 느끼도록 만든다.


책은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말이다.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맹(價盲)의 상태. 그들은 유통망을 장악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선택을 좌지우지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감별할 수 있는 우리의 '촉'도 무뎌졌다. 앞뒤를 다 장악하고, 화학으로 값싼(그러나 나쁜) 물질을 처넣었다. (로비를 통해) 법도 장악했으니, 두려울 게 무어냐.  


우리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가 먹어야 사는 생물(동식물)에 대한 고마움은 차츰 잊었다. 값싼 음식을 원했고, 이런 음식이 충분히 생산되기를 원했다. 자연히 형편없는 음식이 몰려왔고, 입은 싸구려로 전락했다. 후각과 미각은 좋고나쁨이 아닌, 자극에만 길들여졌다. 음식?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다. 식품의 품질이 떨어져도 누구도 불평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음식은 의미를 상실했다. 이로써 사람은 물론 자연과의 연계도 끊겼다. 


결국 이런 참사가 벌어졌다. "음식은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낭비할 수 있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p.6) 


너도 정말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먹는 것의 문제는 결국 그것의 처리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점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분배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식량의 생산부터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쓰레기'의 문제에 카메라를 돌렸다. 


아참, 참고로 이 책은 공저자이기도 한 발렌틴 투른의 '음식 낭비'에 대한 다큐 영화 <쓰레기 맛을 봐(Taste The Waste)>과 관련돼 있다.


어쨌든 음식 낭비를 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나를 살리고 나를 지탱하는 음식을 존중하지 아니하므로! 음식을 향유하는 법도 잊었다. 다시 말해, 제대로 음식을 향유한다면 낭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음식에 진정한 가치를 되돌려주는 태도이다. 음식(요리)는 경이로운 일이다. 음식을 먹는 우리 입에서 詩와 노래가 나오는 것을 봐라. 


책은 말한다. 우리가 먹는 양만큼 버린다고.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모든 식품의 '3분의 1'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미국과 같은 나라에선 식품의 절반이 입이 아닌 쓰레기통을 향한다. 미친 짓이다. 이렇게 버려지는 수치의 절반만 건져도, 아니 3분의 1만 건져도 굶주림은 해결가능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식량 낭비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적인 조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물론 너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해 음식물 쓰레기만 500만톤에 이르며, 18조~20조원에 달한다는 것. 이때 탄소배출량도 885만톤이나 된다. 우리나라 전체 승용차의 18%가 내뿜는 탄소량이다. 소나무 18억 그루가 흡수해야 하는 양이고. 이래저래 엄청난 수치다. 그럼에도 우리는 둔감하다. 맛과 음식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역시 미친 짓이다.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은 그런 면에서 '심리적인 기아 상태'의 장소이다. 음식 멘붕.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제품들로 인해 무엇이 맛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탈감각화를 유도한다. 자본의 수작이다. 진열장은 무조건 비면 안 되고(다른 마트에 손님을 뺐기니까), '유통기한'에 경도된 사람들은 닥친 날짜에만 급급하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먹을 수 있음에도, 마트는 유통기한이 다다르면 무조건 버린다. 버려야 수요가 일고, 버리는 것에도 이미 가격이 포함돼 있다. 그 사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음식 낭비, 너 역시 분개하지 않아? 분개한다면, 우리가 음식을 다루는 행태에도 분개해야 한다. 이 말을 되씹어보자. "낭비는 기아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수십 억 지구인들을 고려할 때 단지 윤리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 문제이자 생태 문제이기도 하다."(p.6)


그렇다면 이토록 엄청난 과잉생산과 식량 파괴에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누구일까. 책은 친절하게 꼽아주신다. 소수의 농업과 화학 분야의 기업연합 수장들, 은행과 주식 투기꾼들. 뭉뚱그려 말하자면, 자본이다. 이 탐욕덩어리의 수작과 협잡은 인류의 계몽과 이성마저도 무력화시킨다. 즉, 우리는 계속 너무 많은, 지방도 너무 많고, 너무 달고, 화학물질 범벅인 식품을 입으로 넣기만 한다. 무의식적으로 형편없이 먹는다. 다시 말하지만, 음식에 대한 존중이 소멸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나의 말이 이번엔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 모르겠지만, 내 말에 조금이라도 꿈틀대는 지점이 있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를 읽고 다시 이야기하자. 음식이 차고 넘치는데, 누군가, 그것도 숱하게 많은 인류가 굶어 죽는 명백한 사실, 그 배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정치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해야 하는 정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도 거대자본이 획책한 정치력이었다.  

 

책이 말한 바를 나도 강조하고 싶다. "지구는 기분 날 때마다 마음껏 이용하는 할인매장이 아니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너나 나나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은 건강한 환경, 깨끗한 음료수, 충분히 건강에 좋은 식량 그리고 교육과 공정한 삶의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다. 충분히 너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행동이다. 장을 보러갈 때, 음식을 대할 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우리는 정치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낭비를 줄이고, 누군가 굶어 죽지 않게 하는 정치적인 힘이 된다. 


책은 쓰리알(RRR)을 요구한다. 줄이기(Reduce) 재분배하기(Redistribute) 재생하기(Recycle). 그렇지 않아도 먹는 것에 약간 까칠하다는 평을 듣는 나는, 이 책을 읽고 좀 더 까다로워지기로 했다. 니가 나랑 만날 때는 충분히 감안해주길 바란다. 너도 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우린 '투 까칠'이 될 거다. 


'슬로푸드'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슬로푸드 인터내셔널 회장 카를로 페트리니의 말씀으로 끝맺을게. 너와 더불어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음식을 진짜 향유하면서 말이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버리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즉 우리가 먹는 음식의 배후에 뭣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하면, 삶은 더 아름다워지고 의미 있게 될 것이다."(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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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일본영화) - 할인행사
쿠보츠카 요스케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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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허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강력한 현실이고,

이 허구와 현실을 이어주는 것은 날조와 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이며, 이 기억이 만드는 집단적 정체감이 개인을 개인으로 정립시킨다.

현실적 실체가 된 상상의 공동체가 억압과 폐쇄의 위험을 벗어버리려면 ‘열린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민족적․문화적 소수파(이방인)의 존재다.


-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민족은 없다> 중에서 -


뜨겁다. 계절도 그렇지만, 올림픽 때문이다. 공식적인 국가대항전. 자본이 숨은 주인공이지만, 어쨌든 나라를 걸고 싸운다.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 없이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는 올림픽 공식 멘트는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다.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져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지만, 기억은 거기까지. 이긴 자만 기억하는 세상은 여전하고, 꼭 이겨야만 하는 그런 나라, 있다! 


후끈하다. 한국과 일본. 식민과 피식민의 기억은 영원할 마당. 쥐새끼는 느닷없이 바다를 건너 독도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뜬금포.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한일 양국 시끌시끌하다. 축구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점이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3·4위전. 한국이 이겼다. 그것도 2대0. 잘 했고, 이겼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공식적' 멘트도 막상 경기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고스란히 나는 태극전사였다. 한국팀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쏠렸다. 울트라 닛뽄은 그냥 들러리였다. 이겨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도 승리의 기쁨 앞에선 그저 거품에 불과했다. 


살짝 궁금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면 달랐겠지?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겠지? 독도에서 찍찍 거리는 쥐새끼, 당장 쥐어패고 싶었겠지? 일본에서 태어나서 조용한 외교라는 명분아래 일본에 슬쩍 마음을 두던 평소와 달리, 뭔 뻘짓을 한 거야? 흠, 그렇다면 재일교포라면 어떤 심정일까? 재일교포도 물론 살아온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그 층위가 다르겠지만. 스기하라에게 묻고 싶었다. 


스기하라? 뉴규? 의 주인공이다. 


아참, 이 글은 나(스기하라)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다


나? 태어날 때 선택 따윈 못했다. 당연하다. ‘수십억분의 1’의 경쟁률을 힘겹게 뚫고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처지잖아. 어쭈구리,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족쇄가 나를 묶고 있었다. 가족의 일원, 국가의 구성원, 민족의 자손. 오호,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닌데, 그렇게 주어졌다. 


어쨌거나, 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코리안저패니즈.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만 살았어. 일본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그런데 남들은 나를 “재일한국인”이라고 불러. 이런, 이건 누가 붙인 이름이야? 이봐, 사자는 자신을 사자라고 안 불러. 너희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잖아. 난 나라구! 왜 날 너희 맘대로 만든 틀에 묶어 놓구 평가하나? 그렇게 이름을 붙여 차별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차이를 차별로 내모는 또라이들.


아차, 좀 오바했군. 이건 나의 연애 이야기였지. 잊어버려...^^;


나 좀 묶어 두지 말고 내버려 둘래?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애국, 통일, 동포, 친선

지배, 억압, 예속, 침략, 편견, 차별 … 제기랄

배타, 배척, 선민, 혈족, 순수, 혈통, 단결 … 지.겨.워.”


아빠는 이런 족쇄에서 나를 풀어주려고 국적을 바꿨다. 엄마와 하와이를 간다는 핑계로 대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는 내게 구시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재일교포니, 일본인이니, 엿이나 먹을 짓이다. 이 넓은 세상. 국경선 따위가 나의 행로를 제어할 게 무어냐고. 


그래서 닭들이나 할 짓인 ‘슈퍼그레이트치킨레이스’는 그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원 밖의 강한 적들과 싸우면 된다. 나를 둘러싼 이 허구의 세상과도 마찬가지. 다른 건 없다.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나는 즐긴다. 


사쿠라이(나의 여자친구지)! 그런데 넌 왜 그래? 내 피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그렇게 뭉개버리다니.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안 따라온다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피는 더럽다고? 이런,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론데 나는 ‘재일한국인’이 되는 순간, 왜 피가 더러워지는 거지? 웃기는군. 너처럼 자유분방해 뵈는 애가. 그것도 아빠 얘기라며 그걸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우스워.


아,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였지. 너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인데 너를 이렇게 묘사하면 안되지...^^; 어쨌든, 넌 예뻐서 좋아. 팬티가 보여도 쪽 팔리는지 모르는 네가 좋아.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건, 어느 민족이건, 정말 상관 않는 거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라잖아, 하하.


살아있다, 사랑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이야기, 너무 무겁게 보인다고? 걱정마. 이건 발랄하고 경쾌한 사랑이야기니까. 그냥 내 연애이야기야. 살아있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즐겁고. 그래, 사랑 그놈, 부질없는 짓인줄 알지만, 그래도 어떡해. 내겐 사랑이 우선이고 최고야. 친구 정일의 죽음도 사쿠라이, 널 향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순 없어. 민족, 국가, 그런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물론 국경이 있고, 핏줄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잘 알아. 그렇지만 나 호들갑 같은 거 떨지 않아. 한국 국적이라고, 단일민족 한핏줄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내 나라 내 동포 내 민족이라고 감싸 안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지 않아? 5·16 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일이라고 빡빡 우기고, 공천을 현금으로 장사하는 족속들과 내가 한 동포라는 테두리에 들어갈 이유? 없잖아! 독재자의 딸이자 독재자 DNA를 그대로 물려 받은 자를 향해 거짓 충성을 맹세하는 권력 불나방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 받는 것도 기분 나빠. 완전 나빠! 


아, 또 깜빡했군. 이건 내 연애이야기일 뿐이야. 넘어가지...ㅋㅋ 정치적 발언? 그런 건 없는 걸로~ 내가 뭔 정치이야기 같은 걸 하겠어, 킁킁. 


그래, 불만있냐?


뭐, 하나가 돼야만 직성이 풀리고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배알 꼴리겠지만, 별 수 있나? 난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이야. 당신들에게 동질감이나 민족 감정을 느껴야할 이유 따윈 없어!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것도 없고 ‘민족’을 기치로 연대해야 할 의무도 없지. 그 광란의 한-일전. 난 어느 편도 아니야. 내가 응원하고 싶은 쪽을 응원할 뿐이야. 어느 편인가 묻는 당신에게, 조까라 마이싱~! 


아, 내 연애이야기는 이걸로 끝. 난 사랑에 빠졌고 너무 아프다.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 내가 지껄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래. 불만있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난 당신들에 의해 내 삶의 선택과 주체성을 휘둘리고 싶진 않다! 다 맞아주마. 다 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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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 이야기 -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 광장시장의 100년사!
김종광 지음 / 샘터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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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니까, 시장통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시장통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된. 사설 상설시장의 최고 언니이자,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소매 시장인 광장시장. 이젠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가장 오래된 시장의 무용담. 


그래서 왁다글왁다글합니다. 여느 시장통을 떠올리면 그러하듯, 복작복작 고래고래 왁자지껄 업&다운. 소릴 질러 손님을 끌고, 한 푼이라도 더 받고자 하는 상인과 에누리하려는 손님 사이의 흥정이 꽃 핍니다. 빽빽한 시장통이 가지는 활력도 있습니다. 저잣거리는 늘 흥미로운 법이니까요. 모름지기 시장은 떠들썩해야 하는 법. 중구난방, 오도방정, 그게 또 시장의 매력이죠.  


그러다 보니, 시장에는 이야기가 꼬리처럼 따릅니다. 더구나 광장시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피고 졌을까요.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잉태한 이야기의 보물창고. 《광장시장 이야기》에 묻은 삶의 흔적, 사회의 변화는 고스란히 이야기입니다. 광장시장 자체가 하나의 사소하고 거대한 이야기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사람들이 살았고 여전히 살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돈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곳, 쌀값과 금값을 기준으로 해서 경제 동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할 수 있는 곳, 시장의 거상들의 동태로 호경기 불경기를 짐작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온갖 말발이 좌웅을 가리는 곳……"(p.221)


버스를 타고 오가는 길, 버스 안에서 늘 맞닥뜨리는 곳이 광장시장입니다. 직접 밟아보진 못하고 눈길에 담기만 하던 그곳. 《광장시장 이야기》를 통해 슬쩍 속살을 엿봤습니다. 광장이 '廣場'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더군요. 광()교와 장()교의 사이에 있다하여 너르고 긴 '廣長'으로 시작, 넓은 곳집 '廣藏'으로 바뀐 역사를 만났습니다. 동대문시장으로 불렸다는 것도 알았고요. 왜 남대문시장만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광장시장이 동대문시장이었다니! 


광장시장.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답게, 시장의 시장이었습니다. 광장시장의 위상, 생각보다 대단했더군요. 광장시장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하긴, 없는 게 없다는 말, 들은 적 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저희 커피하우스 컵도 만들었긴 해요. 제가 직접 안 가긴 했지만요. 다음엔 꼭 함께 가야겠어요. 뭣보다, '기록되지 않은 다수의 시장'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백호는 기록되지 않는 조선 사람 다수의 시장은 동대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다수 조선 사람은 5일장이 유지되지 않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했듯이, 서울의 사람은 동대문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없었다면 기본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동대문시장이 확대될 수도 없었지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종로의 화신백화점, 명동의 일본인 백화점, 그 최첨단 백화점들이 아무리 떵떵거려도 동대문시장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테다. 이 재래시장이 없으면 안 되는 조선 사람의 삶과 함께하기 때문이다."(p.55)


그래서일까요. '정치쇼'를 하기에도 제격이었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이런 시장을 놓칠리야 없죠. 시장의 시장, 서민들의 온 삶이 묻은 곳, 오래된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곳. 충분한 이유가 있죠. 서울 시장이 꼭 얼굴을 들이밀고, 국회의원 나리들께서도 때가 되면 '서민용' 코스프레를 위해 사진(촬영)기자를 동반해 다녀가시죠. 


그러고 보면, 광장시장만큼 얼굴을 많이 판 시장도 없을 듯해요. 다만 재수없게, 이명박도 이곳에서 출마선언을 했었네요. 지금 아마 시장 상인들은 그걸 얼마나 수치스럽게 여길까요. 하하.  

 

"광장시장은 정치 1번지, 경제 1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까지도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도 광장시장에서 대통령 출마선언을 한 것이고, 서울 시장들도 광장시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p.221)


하지만, 이제 이곳. 예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않습니다! '(대형)마트'라는 이름의 폭군 때문이죠. 이들, 거의 모든 시장을 울렸습니다.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가격경쟁력이라는 미명 하의 '가격후려치기(가치 떨어트리기)'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시장 현대화는 순전한 거짓말입니다. 유통을 교란하고, 낭비를 조장하며, 뭣보다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 자본의 쌩얼입니다. 


대형마트, 세상에 그 많던 시장을 '재래시장'으로 몰아넣고, 구닥다리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지지고 볶는 재미를 빼았습니다. 편리하고 쾌적함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네들 이윤만 자리합니다. 소비자의 권리? 뻥카입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을 교란시켜 주머니에서 낭비를 조장하겠다는 흉포한 생각만 똥처럼 차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시장에 이야깃거리가 떨어집니다. 시장에서 좌판으로 아이들을 키워 시집 장가까지 보냈던 무용담은 과거지사가 됐습니다. 시장에서 꽃 피는 사랑도 흘러간 옛사랑이 됐고요.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손가락 두 개를 잃고 생선 가게 일을 주로 하는 지게 짐꾼 오빠를 사랑하는 신식 여성의 이야기는 더 이상 없습니다. 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의 고통과 슬픔만 남습니다.


재래시장의 축소는 곧 이야기의 축소입니다. 그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우린 불과 15~20년 전만해도 삶이 힘겹고 아플 때, 혹은 생이 느슨해졌다고 느낄 때, 시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곤 활력을 얻었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했습니다. 시장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삶이자 존재가 부대끼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로 잰 듯한 구획과 어디에도 없는 부대낌. 지지고볶는 번잡함이 없습니다. 그저 잘 차려진 밥상입니다. 잘 줏어먹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혹자는 마트를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던데, 글쎄, 그 기분은 쾌적함 같은 것이지, 시장이 주는 삶의 활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 않나 싶기는 합니다. 


당시 최고의 직업이라는 은행원을 남편으로 둔 언니가 희순에서 했던 말에서 우리는 (광장)시장이 우리 삶에 어떻게 삼투했는지 엿봅니다.  


"나는 말이야, 사는 게 재미없어지면 나들이옷을 떨쳐입고 동대문시장으로 장 보러 가. 시장 사람들의 그 치열한 아우성과 싱싱하고 풍성한 푸성귀와 수산물이 내뿜는 활기를 쐬면 너무 좋아. 시장의 치열함과 활기를 쐬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는 결핍이랄까. 내 안에 불균형이 있는 것 같아."(p.66) 


예능프로 <1박2일>에서 광장시장을 다뤘을 때, 꽤 화제가 됐었나 봅니다. 전 그때도 크게 당기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선 광장시장에 진짜 발을 밟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보고, 어떤 이야기들이 광장시장을 떠도는지 살펴보고 싶어졌어요. 


《광장시장 이야기》. 무난한 이야기에 광장시장에 대한 흥미를 살짝 북돋은 건 사실이지만, 좀 더 깊숙한 이야기, 정곡을 찌르는 무언가가 빈 느낌이에요. 글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은 안 되는데, 소설도 아니요, 르포타주도 아닌 이런 방식은 광장시장 100년사를 압축해 놓은 나열에 불과한 것 같아요. 성실한 기록인 것은 알겠으나, 광장시장 사람들의 활기찬 역사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이 다소 공허하게 들리거든요. 좀 더 고민했으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무난해서 아쉬운 그런 책이었어요. 그래도 시장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 광장시장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시장(에 대한 의미)을 다시 길어올렸다는 점, 좋아요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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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울 - 2000년대 최고의 소설과 함께 떠나는 서울 이야기 사전
김민채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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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옛날부터 이런 표현들, 가끔 궁금했다.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간다. 서울은 오르는 곳이었다. 위에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물론 그것도 북반구 기준에서다. 남반구 기준으로 보면, 서울도 위에 있질 않다. 어쨌든 재밌는 건, 서울보다 위(위도 상)에 있는 곳에서도 서울에 가는 것에 대해, 저런 표현을 쓴다는 거다. 서울은 어떻게든 올라야 하는 곳이고, 위에 있는 곳이었나 보다. ‘상경(上京)’이라는 관성적 표현도 그런 것을 증명한다.


때론 거슬렸었다. 아마 서울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고, 서울을 일상적 애정의 장소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도 서울을 동경했었다. 촌놈에게 서울은 뭔가 휘황한 곳이었다. 서울,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라도 갈라치면, 어찌나 좋아했던지. ‘서울’ 노래를 불렀다. 서울은 그렇게 어떻게든 촌놈이 가야할 곳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발을 디뎠다. 진짜 서울에 올라왔다. 부산촌놈, 서울내기가 된 것이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에 발 디뎠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바다가 그리워도, 두고 온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도,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촌놈다웠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조용필의 노래, 아름다웠다. 뭣도 모른 채.


그러니까, 촌놈에게 서울은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개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촌놈의 욕심이 향한 곳. 서울을 사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을 더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은 촌놈이 정복해야 할 곳이었던 게지. 그저 자신의 욕망이 이룰 장소였을 뿐이었다.


물론 그 치기어린 욕망, 오래가지 않았다. 청운의 꿈이라고 여겼었던 것, 한낮 허황된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서울을 애정한 것, 아니었다. 이미 익숙해진 곳. 그냥 내 몸뚱이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처럼 포장한, 비루한 욕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바뀌었다. 욕망은 점점 비대해졌다. 삶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사람의 가치는 외려 떨어졌다. 서울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서울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었다. 성형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더 서울》의 저자 김민채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뉴요커를 흉내 내고 파리지앵을 부러워하며, 런더너를 지향하는 것. 그것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서울의 비굴함이 싫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다운 고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서울답던 풍경은 근대화 이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고 고층빌딩숲을 서울의 고유함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 서울은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새로 만드는 공간이나 건물들은 ‘유럽풍’. ‘서양식’ 등을 최고의 수식어로 여기는 듯 설계되고 홍보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습관이나 문화가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의 행동 방식을 열심히 따라한다.”(pp.100~101)


그럼에도 서울‘턱별시’는 사람을 조금씩 매혹시켰다. 서울, 하면 드러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별천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 아파트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높은 고층빌딩을 사람을 위압하지도 않았다. ‘지갑을 열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계명도 없었다.


부암동이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아끼는 그곳에는 커피가 있고, 운치가 있다. 낭만이 있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쉬고 싶은 장소가 있으며, 자연이 살아 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조금씩 그것을 해치는 요소들이 틈입하긴 하나, 그래도 부암동은 부암동. 그곳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장소 한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 (행정구역상으론 청운동이다.)


《더 서울》의 김민채 저자가 휘날레로 장식한 곳. 그래서 반가웠다. 그도 이곳을 사랑하는 구나.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나도 그도,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구나. “내리 3일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랐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갈 때마다 새롭고 경이로웠다. 두 발에 닿는 언덕의 경사가 즐겁고, 두 뺨에 닿는 언덕의 바람이 사랑스러웠다.”(p.327)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여럿이 함께였다. 일종의 소개를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혼자 찾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좋았다. 그 야트막한 언덕, 사랑스러웠다. 아무나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너와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김민채의 마음에 공감했다.

 

“누군가와 함께 다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찾는다면, 내가 누렸던 순간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고, 난 그저 그의 뒤에서 말없이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걷고 싶다고.”(pp.327~328)


거기에 덧붙여, 윤동주 시인의 詩를 연인을 위해 읊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낭송회를 연다면 그곳으로 하고 싶다. 바람에 스치는 별을 함께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만의 윤동주가 되고 싶다.


김민채의 서울이야기는 지극히 감상적이다. 더 서울, ‘the’이기도 하고, ‘more’이기도 한데, 때론 그 감성에 공감하면서도 너무 개인적이라 뜬구름 잡는 것 같았다. 약간은 실험적인 형식인데, 혼자만의 감성만 너무 넘친다. 이해하기보다 느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쉬이 그 느낌에 젖어들지 못했다. 다시 책을 본다면 모를까, 처음 본 감상은 그렇다. 꼭 소설가 지망생 혹은 작가 습작생의 글을 본 느낌이다. 서울이 지닌 보편적 감상보다 개인의 감상만 줄줄 흐른다.


‘서울과 친해지는 30가지 방법’이라지만, 자신의 경험과 느낌만 늘어놨을 뿐, 서울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혼자만 친해졌을 뿐, 다른 사람은 파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서울이라고 했을 때의 기대감이 꺾여서 그럴 것이다. 나의 필요와 요구에 맞지 않을 뿐이다. 문학(소설)과 어우러진 글은 감각적이다. 누군가에겐 참 좋은 시도이자, 즐거운 책 읽기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서울을 애정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개미마을의 이야기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마을공동체의 하나인 그곳. ‘철거’라는 멘붕(MB)시대의 시대정신이 할퀸 그곳. 물론 그전부터 철거는 개미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거로부터 자신을, 삶을, 마을을 지켰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서울에서.  


“무허가촌이었다는 개미마을은 오랜 시간 동안 몇 번의 철거 사태를 겪어냈다고 한다. 마을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낡아왔다. 언덕 위의 무허가촌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2009년, 금호건설의 후원을 받아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개미마을에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 벽화를 즐기고, 사진으로 홍제동에서의 추억을 남긴다. 이제 그곳은 사람들의 마을이 됐다.”(p.45)


그리고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걷고 싶음’에 대한 단상도 꺼낸다. 맞장구 쳤다. 걷고 싶은 서울을 향한 마음. 자동차에 잠식당한 인도에 대한 안타까움. 나도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을 위한 다리가 아닌, 차를 위한 다리에 대해 늘 가졌던 불만이었다.


“한강은 아름답지만, 한강의 다리들이 어색한 이유. 한강의 다리들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의 다리들은 철저히 자동차 위주다. 인도는 최소화되어 있다. 길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다. 다리에 오르는 길을 찾기 어려운 다리도 많다.”(p.293)


분리되고 격리됐으며, 외따로 떨어진 서울의 삶에, 마을공동체가 꿈틀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다. 20년을 넘은 서울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다. 때리고 부수어서 바뀔 줄만 알았던 서울이 얼굴보다 마음을 신경 쓰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터를 사유하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내 삶의 자치권을 남에게 넘겨준 것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김민채의 서울에도 그런 단초가 담겼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다시 서울을 살아내야 한다. ‘더’ 서울을 살아가는 태도. 서울을 다시 생각한다. ‘더’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각박한 서울이 마을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의 서울에게 ‘더’ 주어진 과제다. 


“젊은 날 함께 같은 꿈과 희망을 나눴었어도 결국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

시간이 흐르면 존재의 형식은 변한다.

예전의 우리만을 기억해서는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우리 존재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p.51)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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