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의 세계사 - 수렵채집부터 GMO까지,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공정무역 커피하우스를 운영한다. 하고 많은 커피 가운데, 나는 공정무역 (유기농 혹은 자연산)커피를 택했다. 동티모르 사메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멕시코 치아파스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에티오피아 시다모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가 그것이다. 설탕(시럽) 또한 파라과이의 공정무역 유기농 비정제 설탕을 쓴다.


우리는 그렇게 가능하면 공정무역과 유기농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리 한다고, 나를 윤리적 인간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말라. (나는 공정무역 제품 소비를 ‘착한 소비’라고 일컫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그저,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공정무역 제품을 택했다는 것.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그것들을 소비자들에게 연결시켜준다는 것. 왜 정치적 선택일까?


공정무역은 기존 자유무역 체계가 지닌 극심한 불평등과 불공정, 거대 자본의 횡포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한다. 즉, 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주(자본)와 거대 커피회사(와 유통업체)의 뱃대지를 불리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하기 싫다. 그런 의미도 품고 있다. 저임금 (커피)노동자와 그 가족의 지속가능한 삶과 우리가 하나의 연결된 세계임을 인식하는 것 또한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멕시코 치아파스 커피는 특히 멕시코 혁명군 사파티스타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 것이다.  


유기농도 그렇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우려이자 무차별적 생산을 위한 땅과 식물에 대한 자본의 학대에 반대하는 의미다. 유기농이 몸에 좋다고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생각해보자. 대형 마트의 확장이나 이용을 보이콧하는 행위. 거대 커피체인을 이용하지 않는 행위. 이는 거대 식품복합체 중심의 시스템에 반대 혹은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이들의 확장이 인간과 사회를 획일화 시킨다고 본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앗는다. 그들은 싸고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과 사유를 앗아가는 교묘한 정치적 행위다.   


식량 선택의 정치학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황교익 선생은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했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왜? 어렵지 않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다. 그것이 무엇이든 먹는 것을 놓고 핑퐁하는 것이 또한 정치다. 그러나 한국인, 오랫동안 속았고 여전히 속고 있다. 먹는 것이 정치와 상관없다는 세뇌(!) 때문이다.


그런 족속들이 있다. 먹을거리 선택이 비정치나 탈정치로 여겨지길 바라는 족속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과 판매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비춰지길 바라지 않는다. 왜 먹는 것 갖고 그러냐고 되레 반격한다. 식량의 정치학에 우리가 제대로 눈을 떠야 할 이유가 그것에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니까!


《식량의 세계사》는 식량이, 먹는다는 것이 왜 정치적인지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한다. 식량이라는 창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책에 의하면, 식량은 사회 변모, 사회적 조직, 지정학적 경쟁, 산업 발전, 군사적 충돌, 경제적 팽창 등에 촉매 작용을 했다. 즉, 문명의 기반이자 권력의 시초였다. 이 말을 보자.

 

“화폐가 발명되기 오래전에 고대사회 전체를 통틀어 식량은 곧 부였고, 식량의 지배는 곧 권력이었다.”(p.5)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법,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였었다. 먹을 것을 지배하는 자가 곧 권력인 것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아랍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혁명.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곧잘 표현됐지만, 그 궁극은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였다. 민주주의는 곧 먹을 것과 통한다. 우리의 1980년대도 그랬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말도 그것을 표현한다. “비교적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적은 없었다.” 

 

먹지 못하면 인류는, 아니 어떤 인간도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먹는 것 자체에 대한 근심이 비교적 덜 한 지금의 한국, 식량에 대한 논의나 사유가 건강 측면에 치우친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식량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어떤 식으로 바꿨고, 우리 역사에서도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사유가 없으니, 많은 우리는 먹을 것을 너무 우습게 본다.

 

그런 면에서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의 발명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설탕과 감자가 산업시대의 동력으로 역할을 했다는 이 책의 관점은 신선하고 타당해 뵌다. 즉, 노동자들에게 설탕과 감자라는 저렴한 먹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산업혁명은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 없이 산업혁명은 완수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아울러, 식량 무역 경로가 ‘세계화’의 단초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식량만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었다. 문화와 종교도 바다를 건넜다. 특히 특히 향신료를 둘러싼 이전투구는 흥미진진하다. 아랍의 향신료 무역 독점을 깨트리려는 유럽의 열망이 신세계의 발견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이 이뤄진 한편 식민시대를 열었다.

 

“유럽 국가들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식량은 인류 역사에서 그다음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p.6)

 

물론 그전에 농사가 있었다. 농사는 결국 땅을 착취하는 일이라는 내 생각에 이 책은 좀 더 깊은 역사를 들려준다. 주2일 노동(?)이면 충분했던 수렵채집민의 생활을 주7일 노동으로 바꾼 것이 농업이었다. 생활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수렵채집이 다채롭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었다면 농사는 정착을 빌미로 단조롭고 고된 삶으로 인류를 몰아넣었다. 

 

그렇다. 농사는 자연적인 일이 아니었다. 세계를 변화시켰고,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방식은 또 어떻고.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식량에서 자연산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대부분 식량은 선택적 품종 개량을 거친 결과물이다. 식물이나 동물 모두 마찬가지다. 당근이 원래 지금의 주황색이 아닌 흰색이나 보라색이었다면, 쉽게 믿어지는가? 옥수수도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란다. 허허. 내가 그리 좋아하는 옥수수가 품종 개량을 한 변태라니, 놀랍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문명을 부양한 세 가지 식량은 밀, 쌀, 옥수수란다.

 

저자는 이렇게도 단언한다. “만약 농업이 오늘날에 발명된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농업은 문명의 근거다. 길들여진 식물과 동물이 현대 세계의 기반 자체를 만들었다. 문명적 인식의 기반을 농업에 두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새삼 재밌는 건, 농업이 계층을 분리했다는 주장이다. 농업이 집중화되면서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농민으로 나눠졌다. 오늘날 누가 누구보다 재산을 더 많이 가진 것이 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가 존재한 이래 대부분 기간 이런 일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업의 확산으로 식량으로 부와 권력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졌다.

 

하긴 음식점을 놓고서도 우리는 이미 계층적 분화의 모습을 본다. 아주 값비싼 음식점과 싸구려 분식점. 식량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것이다. 식량이 곧 부였고, 식량을 지배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으니까.

 

“식량에 대한 지배가 곧 권력이었던 까닭은, 사람과 동물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p.57)

 

헌데, 이 책이 내놓은 역사적 사실 하나는 지금의 풍경과 너무도 다르다. 거물. 이른바 권력층이자 (오피니언) 리더였을 텐데, 당시의 거물은 남보다 더 일찍, 더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이건 기본이요), 남에게 부를 나눠줄 때에야 존재감을 빛내고, 반드시 큰 잔치를 베풀고 신용을 쌓아야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집단을 부양하고 재분배를 통제하는 능력으로 지위를 평가받았다.

 

하다못해 멜라네시아에서는 집단을 부양하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몫을 차지하는 지도자는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까지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를 보라. 지도층의 위치에서 부패하고 사적인 부를 뒷주머니에 축적한 이명박(으로 대변되는)을 '거물'로 둔 우리들.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 있나?

 

다시 식량 선택의 정치학으로 돌아가서. 왜 식량이 정치인가. 문명의 시작부터 식량의 정치적 위치를 조목조목 알려준 책은 1791년을 일단 주목한다. 식량을 이용해 폭넓은 정치적 쟁점을 드러내는 방법이 본격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예제를 반대한 사람들은 설탕을 보이콧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며 생산된 설탕. 그 설탕을 보이콧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예무역의 지지자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한 것은 아니나 노예제를 조장한 데 일조했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의 의미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설탕 불매!

 

나는 이 정치의 시즌에, 다시 정치를 생각한다. 먹을거리를 재차 생각한다. 아, 역시 식량은 독특한 정치적 위력을 지니고 있구나! 어떤 먹을거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톰 스탠디지(《식량의 세계사》저자)의 말마따나, 사회적 신호 표시의 유력한 유력한 수단이다.

 

우리는 먹어야 산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산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엄청나게 많은 먹을거리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는 선거보다 훨씬 만흔 저치적 표현의 기회를 가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먹을거리를 선택한다는 것. 투표를 대체할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먹을거리 선택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임을 알 때, 우리는 좀 더 좋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향한 발걸음임을 자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것이나 먹겠다는 생각, 이제는 버릴 때가 됐다. 개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턱 대고 거대 자본의 프랜차이즈에 가선 안 되겠다. 무조건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단순해 보이는 식량의 선택이 거대자본이 돌리는 착취구조에 협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존 질서에 의해 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 것이라도 작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거나 방조하는 일이다.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정치적인 선택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담긴 정치적 인문학적 성찰이다.  

       

“식량 선택의 결과와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우려에 대한 피뢰침으로 작동하는 소비재라는 식량의 이례적인 지위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즉, 여러분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건 간에, 그 정치적 견해에 따라 여러분이 꼭 구입하거나 또는 절대 구입하지 않는 종류의 식료품이 있게 마련이다.”(p.272)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의 말로 끝맺자.

“국가의 운명은 어떤 식량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는 멘붕(멘탈 붕괴)된 작자들의 미친 짓이고, 해서는 안 될 더러운 작태였다. 그 FTA를 몰아붙인 이들에게 '거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순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99%의 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 식량 선택만큼 또 하나 중요한 시즌이 온다.

 

4월11일, 우리가 4년 동안 먹을 식량(?)을 선택하는 날이다. 강정마을과 구럼비 바위도 그렇고, FTA도 그렇고, 보편적 복지도 그렇고. 잘 선택하고 볼 일이다. 단순히 권력의 주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돼야 한다. 먹을 것 고르듯이!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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