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가 세상을 바꾼다
이창호.김은국 지음 / 한누리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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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셜미디어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지에 대해 최일선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과연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끌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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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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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구시렁거림부터.

이른바 (경제적으로) '쫌' 사는 나라들의 계모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뭔 국제적인 통계만 나온다 싶으면, 들먹이는 게 'OECD 중 몇 위', 이런 거다. 최근 몇 년 간, 우린 줄기차게 들었다. 또 듣고 있다. 인구 10만명 당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자살 사망률) 1위. 불명예뿐이랴, 슬프고 아프다. 겉으로 드러나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많으리라. 아마도.

 

OECD의 저주(?)는 계속된다.

최근 보도를 보면, 한국 사람들, 여전하다. 죽어라 일'만' 한다. 놀 줄 몰라서, 놀면 죽으니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다. 이 사회가 가진 심약한 지점. OECD 나라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무려 2193시간(2010년). 1등 좋아하는 나라라고 티내고 싶은지, 10년째 1위란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749시간이다. 25% 가량 더 일한다. 미친 거다. 대형마트는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설날에도 '정상'영업한다고. 이걸 떳떳하게 자랑질하듯 붙여놓은 '비정상'의 나라. 쉬파, 이땅엔 개미들만 사나?

 

뭐, 그게 끝이 아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도 최하위권이다. 200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비 기준은 58.2%. 칠레 47.4%, 미국 47.7%, 멕시코 48.3% 등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OECD 평균은 71.5%. 쉬파, 아프면 죽으라는 거지? 비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도록 일한다. 병을 얻는다. 건강보험 혜택도 별 못 받는다. 뒤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나 더 들까?  

곧,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수준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란다. 앞서 얘기한 것만 봐도, 그래, 아플만 하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아무리 '세상이 빅엿' 같아도 행복해야 할 아이들마저 이렇다는 건, 이 나라가 미쳤다는 거다. 전체가 병적인 불행감에 싸여 있고,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징표다.

 

이 집단 우울증의 근원은 무엇일까.

물론 하나의 이유로 귀결하고 싶진 않다. 허나, 이것 하나는, 걸고 넘어져야 하겠다. 지금의 교육(이라 쓰고, 사육이라 읽는다). 그것을 대변하는 학교. 학교,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오로지 입시 위주로 세팅돼 돌아가는 그 시스템.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불행에 몰아넣는 구렁텅이.

 

누군가가 그러더라.

지금의 한국 교육 시스템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고진감래'라고. 빙고. 당신도 생각해 봐라. 중고등학교, 지금은 초등까지 포함해야 할 텐데, '대학만 가면 넌 자유야'라는 감언이설. 대학을 위해 '쫌만 죽도록' 고생하란다. 그러면 세상을 얻을 것인양 꼬드긴다. 그렇게 대학을 가면? 이젠 취업이다. 취업을 위해 또 죽도록 고생하란다. 어딜가도 낙원은 없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데 어디 낙원이 있단 말인가. 

 

이 말도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신분 상승이나 계층 업그레이드가 비교적 쉬웠던 과거엔 틀린 말,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병이 온다. 시대에 맞춰 제대로 알려줘야 아이들, 착각하지 않는다. '고통 없이 무엇도 얻을 수 없다(No Pain, No Gain)'. 지금, 이건 나쁜 이데올로기다. 학부모나 교사, 학생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길들여졌고, 지금도 그리 길들인다. 그러니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즐기란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 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개뿔. 고통이라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

대수롭지 않게 부모가 아이에게 툭 던지는 이 말.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고, 이 말이 그렇다. 왜냐!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 그것을 대립으로 놓는다. 잘못된 인식을 박아놓는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공부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이 말, 되레 위험하다. 즉, 아이에게 공부는 재미없고 괴롭지만 나중을 위해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 된다. '공부=고통'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 아울러, 가학적인 취향까지 곁들인다. 그 고통, 누가누가 잘 견디나 게임을 한다. 집단적으로 고문 게임에 빠졌다. 이 땅의 교육은, 미.쳤.다!

 

그래, 학교를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는 근대의 유산이다. 큰 건물 하나에 벌집처럼 똑같이 생긴 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아이들을 모아놓는다. 교사가 있다. 교육이 이뤄진다. 그리고 거기,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개입한다. 그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임금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국가가 개입하고 주도한 의무교육의 요체였다. 그것은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이 다른 과목보다 서열상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와 수리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임금 노동자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른바 '문명'국들에선 하나 같이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질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학교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학교는 곧, 관계(망)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해관계가 철저히 얽힌 장소이기도 하다. 학교에 대한 고민,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학생, 교사, 부모 등 그 이해관계자의 고민을 담았다. 교육이 불가능해진 시대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놓을 수는 없다. 임금노동자가 세상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EBS의 시도.

1년 2개월. 국내외 교육 현장 취재. 학생 200명 심리 실험. 현직 교사 혁신 프로그램 도입. 초·중·고를 포함한 4,000명 학생들의 설문 참여와 다양한 교육 실험. 늦었지만, 당연히 했어야 할 시도다.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교육현장에서 길어낸 이야기들은 그동안 자본(기업)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학교에 대한) 관성에 금을 가게 한다. 다큐로도 방영된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는 진즉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교육이 불가능해지도록 우리는 무력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만당했다. 끌려다녔다. 학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면서도, 우리에겐 우리의 시선이 없었다. 책은 그것을 다시 조명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각자의 관점에서 학교를 고찰한다. 재조명한다. 교육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점수에 목 매단 지금의 교육은 잘못됐다! 

 

사교육은 '배움'이 아니다.

지금의 학교를 무너뜨린 장본인 중의 하나, 사교육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교육'이라고 일컬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건, '사육'이다. 국가에 의해 주도된 학교가 그나마 임금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자본이 은밀하게 주도한 사교육은 '노예'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배움(의 즐거움)? 사(교)육에 그런 항목은 없다. 사육하면서, 사육당하는 것들의 권리와 입장을 생각하는 것 봤나? '배움의 역주행'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적절하다.

 

뭐어? 선행학습? 

개뿔이다. '선행'이라는 레떼르를 붙인 것은 앞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그저 남들보다 앞서고, 남들을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가치관에 오염된 이들을 현혹하는.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을 지운다. 희망? 그전에 절망이 올 뿐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까닭이다. 불안을 심어주는 것이 권력자들의 간교한 계략이었다. 책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학생들과 부모들의 실태가 드러난다. 불안한 부모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교육과 선행학습!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라. 책은 그 당연한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을 지금처럼 거대한 괴물 아닌 한갓 액세서리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란 무엇인가》의 미덕, 이것으로 일단 충분하다.

사교육의 무쓸모를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학교를 말하면서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악화가 구축한 양화. 그것에 금을 가게한다는 것. 나쁘지 않다. 물론, 칭찬의 역효과를 보여줘 양육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부모와 자녀의 끈끈한 스킨십과 관계맺기(사랑)가 영재를 만든다는 것 등을 보여준 것도 미덕이다. 책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항목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 읽기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더 넓은 세계를 항해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 또한 좋다. 무엇보다 알아서 훌쩍 크는 아이들. 교육이, 학교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 남의 욕망이나 타인의 삶이 아닌, 나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에게 의문을!

자꾸 물어야 한다. 학교야, 넌 무엇이니? 지금의 학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니? 산업혁명으로 임금 노동자가 탄생하고, 이어 등장한 근대교육, 특히 20세기 이후, 학교는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잘못이다. 고대와 중세, 지금의 학교 형태는 아녔으나, 그것을 빼먹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그것은 이어지고, 그것을 핵심에 뒀다. 관계맺기. 즉, 대인관계를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후세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했다. 그것은 또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 그것을 잊었다.

회피일까, 망각일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상실한 지금의 학교는 폭력이 자연스럽게 고착화됐고, 분리하고 구획 짓는 것이 일상화됐다. 관계맺기의 파편화. 학교는 미쳤고, 서로 미워하고 무시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옥도, 그것이 학교에서 아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 부족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땅히 배웠어야 할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기술에 대한 배움이 없었으니까. 대인관계 능력, 떨어질 수밖에!

 

나는 늘 이 생각을 한다.

교과 과목 바꾸기. 서열 뒤집기. 임금 노동자 양성을 위해 강조된 근대 교육의 핵심인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이 아닌, 내가 원하는 과목은 이런 것이다. 사랑, 우정, 이별, 가족 등과 같은 관계맺기를 위한 과목과 더불어, 음악, 미술, 문학, 낭만, 아름다움 등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다룬 과목 앞세우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詩와 현재의 중요성(카르페 디엠)을 알려준 키팅 선생님은 극중에서 그랬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詩와 미美,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 무용이나 미술이 주요 과목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인생의 목적인 무용이나 미술이 수학이나 영어만큼 강조되지 않는지. 그것은 과학으로도 설명된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음악지능이나 신체운동지능, 시각지능 등 모두 다 독립된 인간 고유의 지능이며 동등하게 가치 있는 본성이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말했다. "교육의 목표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지능과 본성 모두를 훈련시키고 개발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가 의사와 검사·변호사가 돼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학교에 의문을 제기하자. 그리고, 학교는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왜 지금 학교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본거지가 돼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학교가, 아프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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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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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리 보이는 계기는 무엇일까?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계기나 순간,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가령,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로, 애써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달리던 내가 ‘일단 멈춤’을 택한 것은 그 어느 해 가을날의 햇살 때문이었다. 햇살은 고왔는데, 내 삶은 질척거렸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어떤 간극이 자꾸만 생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갑갑했고, 우울했다.


그런 날, 내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 한 잔. 어쩌면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관성처럼 바라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달리 보였고, 달리 보게 됐다. 내 생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허위로 날 지탱하던 직업을 그만 뒀고, 나는 커피를 만들기로 문득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고의 커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에스프레소나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드립커피를 내리는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간극은 좁혀졌고, 나는 이전보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나의 원래 속도를 찾았다. 커피, 아 템포(본래의 빠르기로).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된 첫 계기는 질병의 역습이었다. 서른네 살의 유럽여행, 심각한 신경장애 증상을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또는 세균성 병원체가 그를 덮쳤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졌고, 모든 신체기능들이 고장 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밖에 없었다. 질병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앗아갔다. 행간을 보건대, 절망으로 도배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한다. 제비꽃 화분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건. 달팽이가 그에게 왔다.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느림보 생명체가 느닷없이 다가왔다. 세상 모든 속도가 급하게 멈춘 그에게, 달팽이는 유일하게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다. 두 생명은 의기투합했다. 《달팽이 안단테》는 그러니까, 두 생물의 동거의 기록이다.


흥미로웠다. 세상의 주류 속도에서 생래적 혹은 불가항력의 사고로 이탈한 두 생명의 교류와 교감. 물론 저자의 일방적인 관찰처럼 보이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생명은 눈을 맞추고 속도를 맞추는 순간,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받는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이 형성하는 생물 환경.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공진화(coevolution)’인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달팽이의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나와 관계된 인간 세계는 반대로 점점 더 멀어졌다. 나와 같은 종은 너무 크고 너무 경솔하며 너무 혼란스러웠다.”(p.55) 


그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부터는 방문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데 몰두하는 자신도 발견한다. 달팽이와의 동거와 관찰이 야기한 새로운 시선이다.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p.57)


내게 커피가 그랬다. 커피의 우아한 맛은 나를 평화의 상태로 이끌었고, 커피의 역사와 유통을 통해 나는 세상의 불공정한 교역실태를 새삼 깨달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양한 변수에 의한 변덕(?)은 사소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뭣보다 나는 내 생에 맞는 속도를 찾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생에 묻은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보면서, 그에게 있어 달팽이가 내겐 곧 커피임을 알았다. 

읽는 내내, 그에게 이입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질병이 바꾼 저자의 삶은 더욱 격했을 터이다. 삶이라는 질병이 내게도 틈입했지만, 그는 거기에 바이러스의 침공까지 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과거나 지금이나 존재하긴 매 한가지이지만, 그에게 닥친 질병의 무게는 그를 더 고립상태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그것을 토로한다.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는 변하는 상황에서 고립은 그를 더욱 깊이 병들게 하기도 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달팽이는 구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작고 사소한 달팽이라는 생명이 주는 영향력이었다.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p.152)


그것에서 나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고 말한,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저자는 달팽이(들)가 아니었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삶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관찰자인 저자에게도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달팽이가 작고 느리다고 멸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오만이다. 다윈이 자신의 일기에 썼다는 한 다짐이 떠올랐다. 어떤 생명체를 논하든,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저자는 되레 달팽이의 존재감이 인간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달팽이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리라. 달팽이는 주로 죽은 것들을 먹어치우고 배설물로 분비하여 토양에 영양분을 되돌려주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반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다. 오히려 해만 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오만으로 똘똘 뭉친 채.


달팽이를 다시 생각했다. 속도를 다시 돌아봤다. 이 책, 달팽이의 속도에 대한 찬양복음서 같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p.181)


그것은 아울러 너무 급하게, 너무 빠르게, 관성처럼 달려온 삶이 불러온 파열음을 알아채자는 호소다. 그런 파열음에서 비롯한 균열이 우리 세계와 자신의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하자는 성찰적 호소. 느닷없이 다가온 질병에 이어 달팽이는 저자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꿨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독자는 달팽이가 주는 사유에 동참할 수 있다. 암세포의 속도보다 달팽이의 속도가 인류 본연의 것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한없이 늦춰진 속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입증했다. 《달팽이 안단테》, 그것의 명백한 증거다. 커피와 함께 한 달팽이의 속도. 나는 내게 맞는 속도, 나만의 속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역주행도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라'는 주술을 거부할 순 없다. 그것이 내겐 '달팽이 안단테'이기도 하니까.  


주류 속도와는 명백히 다른 빠르기.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렴, 세상이 달리 보이거나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일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만을 위해 내리는 나의 커피, 아마도 우연이 빚은 사고(?)일 것이다. 《달팽이 안단테》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 죽기 전 다시 들춰보고, 살아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축복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3,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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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와의 대화 이슈북 1
함세웅.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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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의 증언을 듣자니, 분노를 넘어 슬픔이 뚝뚝 묻어난다. 여전히 껍데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한층 더 두터워진 껍데기가 세상을 에워싼 느낌으로 인해. 도저한 절망의 시절을 ‘여전히’ 우리는 관통하고 있구나. 껍데기는 왜 이다지도 견고한가. 변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금의 풍경이구나. 그러니까, 이것은 분노의 기록이라기보다 슬픔의 기록이다.


“껍데기는 가라”고 읊조린 신동엽 시인의 시절을 생각했다. 내가 겪지 못한 그때. 시인이 “가라”고 외친 덕이었으리라. 독재와 군사적 긴장이 야기한 거짓과 위선, 불의 등은 꼬리를 내렸다. 詩의 힘은 그렇게 세다. 詩에 공명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던 덕분이리라. 인민들이 기어코 바라던 것이 이뤄졌다(고 착각했다). 평화와 민주주의, 화합을 열망하는 1960년대 인민들의 바람을 신동엽 시인이 대필(!)한 셈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이 야금야금 그 자리를 삼켰다. 영악했다. 앞선 독재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일념(!). 몰염치한 자본은 껍데기를 몇 겹이나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인민들은 독재보다 센, 아니 흉악무도한 적을 만났다. 껍데기의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나쁜놈들 전성시대.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사제들이 이 땅에 있는 본디 임무. 함 신부의 증언은 그래서 더욱 생생하다. 사제들마저도 나쁜놈들의 유혹(?)에 직간접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프다. ‘가톨릭 마피아’라는 레떼르가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마저도 그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통함과 슬픔을 동반한다. 물론, 사제들도 ‘인간’임을 감안하면, 못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로마 가톨릭이야말로 바티칸에서 2,000년 동안 지배한 국제 마피아의 원조인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바티칸을 마피아라고 꾸짖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잊고 권력과 돈과 명예의 노예가 된 부끄러운 점을 고백한 겁니다.”(pp.43~44)


함 신부가 손석춘 교수와 함께 다시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 이유, 충분히 짐작이 간다. 더구나 지금은 하 수상한 시절. 독재의 아이콘이 딸의 몸과 마음을 빌어 복권을 꾀하고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도, 이 사회는 병들었다. 껍데기의 무차별한 공습에 정신줄을 놓은 상태다. ‘멘붕(멘탈 붕괴)’이라는 유행어, 지금-여기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회의 멘탈 붕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이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빌어 발표했던 ‘삼성의 차명계좌 비자금 조성 실태’. 그러나 이 사회는 입을 닫았다. 귀도 막았다. 마음을 상실했다. 함 신부는 책을 통해 덤덤하게 증언하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절망과 슬픔이 있었을까. 행간을 통해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교회공동체마저도 물질, 재물, 황금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현상이 ‘삼성’이라는 기표를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우리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권력-자본-언론의 신성삼각동맹이 왜 우리를 지배하도록 놔뒀을까. 궁금하고 궁금했다.


함 신부와 손 교수가 합창한 《껍데기는 가라》는 그런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그것이 더욱 와 닿는 것은 그들이 독재와 경제권력에 맞서 현재진행형의 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을 일관되게 지키는 사람들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967년에 처음 터져 나온 “껍데기는 가라”는 외침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인다. 수구와 비열한 기득권 세력의 창궐에 일침을 가하는 이 대화집이 고마운 이유다.


올해는 유신정변 40년이 된 해이자, 연말 즈음 대통령 선거라는 큰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있다. 아버지에게 효녀이고 싶은 딸의 심정은 인정하나, 독재의 복권은 용납이 힘들다. 함 신부가 언급한 박근혜의 정체는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녀는 유신시대 2인자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독재자로서 권력을 누렸다. “독재자와 공범자”라는 함 신부의 말씀, 고개를 끄덕인다. 책이 드러낸 박근혜의 실체는 여전히 함 신부가 독재와 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여나 박근혜가 가엾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친 생각이리라. 조선일보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죽음이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까지를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했다. 그 기간, 젊은 나이에 대학 이사장을 하고, 엄청난 재력을 가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최고 권력이 아니었을 뿐, 기득권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박근혜가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자연히 이 책은 12월 대선을 향하게 만든다. 자본이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 시대,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자 정의임을 자각하게 만들고 있다. 마음에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공약인양 포장하는 거짓된 자는 가라. 함 신부는 거짓된 자는 “악마”라고 했다. 거짓의 표상. 그리하여, 함 신부와 손 교수의 “껍데기는 가라”는 외침은 묻는다. 지금-여기의 정치란 무엇인가. 올 겨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책, 그 선택에 충분한 도움을 준다.


지난 10월 1일, 세상을 떠난 명민한 혁명주의자 에릭 홉스봄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미완의 시대》) 우린 여전히 미완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미완이라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가슴에 꾸욱 담는다. 그리하여 함 신부의 증언, 홉스봄의 것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잊고 있던 화두를 꺼낸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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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종말 -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
해나 로진 지음, 배현 외 옮김 / 민음인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소설가 김훈뼛속깊이 마초인 남자이렇게 말했다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마초수컷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리라아무렴그것은 여전히대한민국 남자의 목을 죈다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한다면수컷의 자격은 없다그래서 외친다남자는 괴로워한국뿐이랴일본에도 동명의 영화가 있다그래서 가부장제는 유효했다괴로운 수컷의 입지가부장제라도 주어져야지수컷들일자리를 더 많이 가져야지그래야먹여 살리지. 숭고한 길인데, 아무렴. 

 

그러나 그것, 균열이 왔다증거는 곳곳에서 나온다요즘 한 법무부도 가세한다지난 215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 비율이 41.7%에 달했다고 발표했다사상 최고치여성 합격자 비율이 40%를 넘어선 것은 2010(41.5%) 이후 역대 두 번째손쉬운 말로 여풍(女風)’. ‘월드컵 저주라는 남자들의 변명이 따라붙는다. 6월 말사시 2차 시험이 월드컵 기간과 겹쳐 남자 고시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단다비겁한 변명얼마나 못났으면 월드컵에 책임을 돌리나.

 

여자들의 득세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똑똑하니까나는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한다각종 강연을 가면여자들이 훨씬 많다모든 공부의 장여성들 숫자가 압도적이다남자희귀동물이다과거지성의 영역은 남자의 몫이었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본디 지성의 영역은 여성의 몫이었던 양상대적으로 수컷공부를 멀리 했다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디지털문명이 여성의 음기를 사회적으로 순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나는 남자들의 뻣뻣함이 사회의 유동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성의 유연함에 밀려서라고 해석한다수컷은 점점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있다.

 

미국 통계에서도 그것은 확인할 수 있다. 2009노동력의 추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다역사상 처음 그렇게 여성 노동력이 남성을 능가한 뒤여성은 계속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남자의 종말은 그것을 조목조목 확인해준다저널리스트답게 통계와 취재를 바탕으로 남자들이 왜 종말의 상황에 도달했는지를 증명해준다사실현실에서도 느낄 것이다남자다움의 낡은 구조는 설 곳을 잃고 있다거기서 수컷의 딜레마가 생긴다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롭고 명확한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남자들설 곳이 없다그러니이런 말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것은 액세서리뿐말하자면 맨세서리(mancessory)’들뿐이다.”(p.19)

 

고개를 끄덕인다이 책일리가 있다새로운 남자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가 왔음도 자각할 수 있다명백하다. ‘남자다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마초적 위상은 점점 약발이 딸린다요즘 남자들특히 젊은 남자들과도기에 놓일 만하다더 이상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데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른다배운 적이 없다그렇다고 유연하지 않은 남자들어찌하오리까저자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수사를 쓰면서 남자들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의 처방전은 이렇다. “새로운 역할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려면 일정한 자질이 필요하다유연성재빠름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감각 등이 그것이다.” (p.27)

 

그러니까, '남자의 종말'은 '남자의 몰락'을 얘기하는 것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몰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관성과 관습에 얽매여 어떻게든 거부해 온 여성성을 온 몸과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자는 것이다남성 우월주의의 틀인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것능사가 아니라는 것해나 로진은 그것을 가모장제라는 표현으로도 대신한다.

 

이 책은 달라진 섹스의 주도권부터 언급함으로써 충분한 주의를 끈다여성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수 있고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남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시절이 왔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아직 시차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바람직한 변화다. ‘성 혁명으로 명명된 이것은 여성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세상의 공고한 질서를 흔들었다문제는 남자들의 자세다그것은 성 혁명이 남성을 바꿔놓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기보다 남자들이 저항을 한 것이다뭔가 뺏긴 것 같고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난 남자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여자들은 전통적인 부양자’ 역할에 발을 들이고 있으며고개 숙인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건복종이다남자들의 의기양양함을 부추겼던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 엔진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그건 남자다움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이미 전 지구적 경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성공하는 곳이 되었”(p.167)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잡는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p.170) 대학을 장악한 여성의 수도 그렇고온갖 시험에서 수석이나 다수를 차지하고야 마는 여성들도 그렇다.

 

이 사회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극적인 것이 있다바로 에 대한 선호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남아선호는 쉬이 바뀌지 않을 단단한 현상이었다그러나 지금다르다아들은과격하게 말해서 별로 쓸모없는 애물단지처럼 낙인 찍혔다반면 딸은 가정의 중요한 자산이다딸딸이 부모라고 구박 당하지 않는 집도 상당히 늘었다아들 더 낳겠다며 용을 쓰는 집도 보기 힘들어졌다. (물론아이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 시대이기도 하다!)

 

남성성참으로 버거운 것이었다남자들에게도 그랬다강한 척센 척용감한 척삼척으로 겹겹이 둘러싸야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했던 현실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남자들(최소한 이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허장성세요자존감 없는 자의 비애였다.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바에 따르면남성성이란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서여러 세대를 거쳐 남자들이 착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전투용 가면이나 갑옷의 일종이다이는 가면이나 갑옷이 벗겨지면 자신의 부드러움이 발각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354)

 

그래서 이 책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생존하기 위해 남성은 결혼이 필요하단다주변을 둘러봐도 그건 타당한 주장 같다남자들은 홀로 서는데 익숙하지 않다. 취약하다. 유연하지도 않다. 가부장제의 관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물론저자가 지적한대로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한데요즘 혼인 시장의 문제는 여성의 약함이 아닌 여성의 새로운 지배 때문에 초래되는 것 같다여자가 남자보다 교육을 잘 받고똑똑하여 결혼은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높은 지적 수준의 여성이 이른바 골드 미스로 남는 경우다.

 

여성의 위치 상향이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만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성 역할의 반전은 이전과 또 다른 현상도 야기함을 책은 지적한다여성의 폭력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사례가 그것이다저자는 영악하고 잔인한 여성 살인자 등을 예로 든다그녀가 인터뷰한 베스트셀러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은 그것에 대해 이리 분석한다. “여성이 적절한 힘을 가질수록 여성의 행동은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아 갈 겁니다.”

 

저자가 남자의 종말여자의 부상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했음을 증명하는 건여성 지배가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며여성의 부상엔 자본의 요구와 같은 요인이 있었음을 밝힌 대목이다여성이 지배하면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일까그렇지 않다그런 환상은 외려 위험할 수 있다.

 

여성적 유토피아의 상상 뒤에는 늘 우월감이 숨어 있었다더 친절하거나 부드럽다거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반드시 여성의 가장 큰 특성은 아니다트웬지 교수가 알게 되었듯이여성은 사회적 신호에 반응하여 시대의 허용치에 맞추기 위해서 인성을 바꾸는 성향이 있다.”(p.258)

 

더구나 우리는 지금물론 예단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며 언어유희를 펼치는 대선후보를 알고 있다. 저자도 이에 긍정적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만 인지할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더구나 그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행보에서 여성으로서의 장점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외려남성적이거나 퇴행에 가까웠다정상의 위치에 여성이 올라가야 하는 명제에는 동의하나, ‘어떤’ 여성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울러십 수 년 전부터 유리천장 운운하며 여성 임원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분석경제학자 조던 시겔을 필두로 한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연구팀이 한국의 사례를 살펴본 뒤이리 종결 짓는다. “여성 임원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의 원동력은 공평성이나 형평성의 추구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경쟁력을 찾는 예리한 시각이었다.”(p.331)

 

이렇게 또한 연결된다.

 

세상은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갖출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못해 의식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전환점에 서 있다시겔의 분석에 따르면여성 임원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들은 결실을 누린다시겔은 기업이 여성 관리자들을 늘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32)

 

물론 그것나쁘다는 것은 아니다여성의 가능성과 역량을 발굴한 것이 기업(자본)이었다는 점은, 좋은 말로 기업의 센스가 돋보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성장에 매달렸던 까닭이었겠지. 그것이 또한 다른 주체와 사회를 추동한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여성 임원의 탄생과 고위직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이 책을 읽는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줌과 동시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이건 뭐랄까이른바 잘난 여자들의 경우에 국한된 한계가 있다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는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의 울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계급의 문제가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한계다. 다국적 기업 등의 여성 경영자나 임원은 여성 중에서도 소수다. 숱하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지배'와는 먼 세계에 살고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소외돼 있다. 육체노동의 약화가 여성 노동력의 증대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남성 대신 여성을 택한 자본의 꼼수도 있다. 똑똑한 여성의 도약과는 명백히 다른 지점이다.


특히, 여성이 왜 주부양자가 되는지 심층 있는 고찰은 부족해 뵌다. 단순히 여성 노동력이 지배적이 됐고, 그 증가를 확인하는 것에 끝날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과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지 좀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 여성이 노동시장에 나가는 다양한 이유를 캐고, 잘 나가면 결혼을 왜 하지 않으려 하는지, 좀 더 알고 싶다. 자아성취가 아닌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닥 달갑지 않은 상황도 분명 있을 테니까. 성과 함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풍성하게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세상은 하룻밤 새 뒤집어지지 않으나물방울 하나하나가 바위를 갈라지게 한다. 4만 년의 남성 지배에 금이 가게 한 여성들의 도약은 불과 40년 전부터다여전히 지뢰밭이요장애물이 포진해 있다이 책은 여성들의 보다 굳건한 지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남자의 몰락을 당연한 것으로 조롱하는 책도 아니다변화의 양상지배 질서의 흔들림을 잘 보면서 여남(女男)이 서로에게 삼투할 것을 권한다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두 성()의 깨달음과 성찰그리고 현상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돕는다.

 

한국 엄마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저자의 저널리스트적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아들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가르치고분홍색 봉제인형을 사 주고태권도 대신에 요리와 발레 학원에 보내는 엄마의 이 말. “저는 새로운 시대에는 마초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그리고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면아들에게도 여성적인 면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은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후대까지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구나여성은 유연하고 민첩하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그것뻣뻣한 남성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힌트다.

 

처음으로 돌아가소설가 김훈이 정한 남자의 정의.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뼛속 깊이 보수임을 자처한 김훈의 삶과 생활에서 우러나온 보수성을 타파할 수는 없다다만보다 젊은 남자에게 필요한 새로운 남자의 정의는 이런 것아닐까.

 

남자는 여자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남자라고 했는데이 말은 민감하고동정적이며자기 기분을 잘 아는그러니까 언제 웃고 울 지를 아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이다.”(p.357)

 

나라는 수컷, 이런 남자가 돼야 할텐데. 관념과 생각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감수성을 좀 더 연마하고 닦아서 몸과 삶에서 이런 기운이 퍼져나와야 할 일이다. 쉽진 않겠지만, 인생에서 꼭 해봄직한 것이 아닐까. 진짜 남자라는 것. 


참고로, 여자들이 수컷들을 만날 때 꼭 챙겨봐야 할 것이 있다. 삶의 미시성이다. 겉으로 진보나 보수를 언명하는 것, 그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부엌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부엌에서의 행태, 진짜 남자와 수컷을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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