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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철학 - 음식 속에 숨어 있는 영양 가득한 철학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0월
평점 :
과거, 우리에겐 '밥상머리
철학'이
있었다.
아이는
밥상머리에 앉은 ‘어른’을 통해
먹을거리를 둘러싼 자연과 세계를 알았고, 배웠다. 음식(요리)을 통해
자연스레 아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어른이 되어갔다. 인류의 ‘식문화’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먹을거리에는
인류의 지혜와 사유가 담겨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존해야
하니까. 생존을 위한
제1법칙, 먹어야
산다. 요즘 하루에 한
끼 먹자는 《1일1식》이라는 책
덕분에 그것이 유행처럼 번진다지만(내 주변에도
벌써 몇 명 생겼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시작부터
식문화는 빠질 수 없는 유산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세상을 향한
사유와 철학도 자연히 먹을거리에 녹아있을 수밖에.
인류의 모든 지혜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사유가
들어있는 소중한 밥상문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 먹을거리가
넘쳐나면서(그럼에도 굶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뼈아픈 사실!) 먹을거리에 대한
존중과 사유를 하지 않게 됐다. 그냥 액면
그대로 먹을 뿐이다. 배고프니까
먹고, 먹으니까 좋을
뿐이다. 밥상머리를 통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능력은 퇴행했다. 요리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디 그것들은
생각하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먹을거리를 만들고, 먹을거리를
먹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전설적인 요리사나 미식가들을
보라.
그들, 칼질이나
테크닉이 좋아서, 기막힌 미각을 지니고 있어서 전설이 된 것이 아니다. 요리에 담긴
자기만의 철학! 즉, 자연, 생명, 재료, 음식에 대한
철학과 사유. 생각 없이 가질
수 없는 무엇. 그런 요리를
먹는 사람들도 역시 사유를 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교감. 그것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요리‘사’는 전멸하다시피
하고, 요리기능공 혹은
요리숙련공만 넘쳐난다. 먹는 사람과의
교감 따윈 안드로메다로 갔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줄 알았던 인류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대신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다. 밥상머리
철학? 흘러간 옛노래로
전락했다.
‘요즘 아이들
먹을 것 귀한 줄 모른다’는 어른들의
툴툴거림.
그것은
자충수다. 어른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은 과오다. 자신의 배와 제
가족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었다. ‘잘’먹이면 된다는
것이 결국 ‘많이’ 먹이는 쪽으로
발달했다.
《식탁 위의
철학》은 음식을 통해
사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철학(자)을 직접적으로
들이대며 음식과 철학의 연관성을 획득한다. 저자 신승철은
일상에서, 그것도 가장
원초적이고 낮은 단계의 일상(먹는
것)에서 철학을
길어낸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맞다, 아니다를
떠나, 그것이 음식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임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가령, ‘잡채’를 통해
전체주의와 독재적 권력의 사상으로 향할 요소를 내부에 갖는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것이 차별과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잡채처럼 다름이 섞여 새로운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잡채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생각을 확인시켜줘서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처럼 철학 용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ㅋ 종
다양성, 생물다양성, 문화다양성이
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잡채의 시간!
발효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천천히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기다림의
미학을 필요로 하는 것, 그리하여 삶
또한 내면의 발효에 의해 형성하는 것. 저자는 발효를
통해 삶은 본디 느림의 과정이며, 타인과 똑같지
않은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갖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소수자는 곧
양적 소수가 아닌 자신의 ‘특이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견해와 더불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것이 생산될 수 있다는 이질발생의 개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둘러봐라. 지금 우리를
감싼 ‘글로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것은 경쟁을
통해 내 것이 남의 것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수작인데, 그런 개수작을
요구하는 자본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 없이 투항하곤 한다. 진짜
글로벌, 진짜 세계화는
이 세계가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연결돼 있음을 알고, 지구 저
어딘가 나와 상관 없을 것 같은 남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교감하는 것이다. 어딜 가도
똑같은 이름의 커피브랜드, 패스트푸드체인을 만나는 것이 대체 무슨 감흥이 있단 말인가. 여기 저기
비슷한 풍경으로 도배한다면 우리는 대체 왜 그곳을 가는가 말이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브랜드만 중요한 똑같은 질문. 복제와 반복에
의한 동질발생.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주술인데, 우리는 그
주술에 주화입마를 입은 상태다.
‘따로 또
같이’를 통해
뒤섞임의 미학을 자랑하는 비빔밥에 저자가 감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달라서, 다르기 때문에
어울릴 수 있는 것. 이질발생의
아름다운 맛과 향기.
그래서 이런 사유는 정말이지 반가워서, ‘만쉐’를 부를
뻔했다.
“맛의 변형과
재창조는 음식의 역사가 흐름의 역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p.95)
아, 이 저자는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밥상머리에서
철학을 길어 올릴 줄 아는 양반이구나. 감히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특히 커피를
만드는 사람인 내 입장에서 가장 반가운 대목은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것이었다. 커피에 담긴
세계의 불공정함, 그 불편한
진실을 꺼내준 것이 반가웠다. 커피는 식민과
착취의 부산물일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부려먹기 위해 모르핀처럼 주입한 검은 액체였다. 더 큰 문제는
기호와 취향을 획일화시키고 조정한다는 것이다. 거대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철 공장과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198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잠이 오지 않는 값싼 인스턴트커피를 먹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인스턴트커피는
노동 현장마다 한 켠에 준비되어 있었고 권장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취향과 기호를 평준화시키면서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고용주라면 인스턴트커피의 장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으면서도 생산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근과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카페인의 힘에 의지하여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p.127~128)
즉, 지금의 많은
커피는 내부 식민지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커피는 본디
사유하게 만드는 음용수였지만, 지금의
인스턴트커피 혹은 거대 프랜차이즈 커피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내 업무(일)로 국한돼
버렸다. 지배 질서의
커피 주술에 놀아난 결과다. 취향과
기호마저 저급해졌다. 고작
인스턴트커피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수준이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인스턴트커피를
권장하는 사회속에는 무의식적으로 “더 빨리 일할
것, 더 오래
공부할 것”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지배 방식이 존재합니다.”(p.130)
먹을거리는 세심하며 섬세하고 예민한
지점이다.
커피를 하고
계속 공부를 해가면서 나는 그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해서도 그리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즐겁다. 세상이
넓어지는 한편으로 혀의 감각처럼 촉수가 민감해지면서 미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넓고
깊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아직
부족하며, 영원히
채워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커피와
먹을거리를 통해 나는 달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보건대,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는 ‘다름’이다.
다름이
섞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획일적이지
않은 소수의 특이성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제가 된다고 나는 읽었다. 은근히
먹을거리를 통해 혁명을 부추기는 심보(!)다. 아, ‘이렇게
밥상머리 철학이 이뤄진다면 참 즐겁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소수이지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커피를 만들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획일적이고, 증식에만 관심
있는 종자들 아닌 특이성 생산을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
저자의 또 다른 키워드는 ‘정치’다.
음식을 통한
정치. 나는 먹는
것이 곧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을
먹느냐, 그 작은 일이
미시정치를 일구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취향, 기호, 맛까지 다국적
기업 혹은 재벌의 농간과 협잡에 놀아나는 것, 끔찍하지
않나? 지배질서에
의해 노예로 내부 식민지화하는 것,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 아닌가?
우리가 먹는 것이 자본과 정치에 의해
조작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표를 잘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도 그래서 잘해야 한다. 깨놓고
말해서, 남 차려준 밥상만 깨작거렸을 생각 없는 박근혜 따위
찍으면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돕는 것이다. 그럼
문재인이나 안철수는? 물론 아직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
식민지화를 조금씩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후보
김소연을 찍는 것도 좋겠고.
이 책은 먹을 것 얘기하면서 은연 중 각성을
요구한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뭘 먹고
살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강조한다.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이 책의 기조에 완전 공감!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생의
감각을 깨우고,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든다. 먹는다는
건, 종종 강조하지만,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먹는 것을
존중하고 고마워하며,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섰다고 세간에서는 평가한다고
했다. 이 책을 만나서 당신도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타락이요, 근사한 방탕이로다. 혹시 그동안 먹을거리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았다면,유죄.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이 책, 필요하다. 참, 113쪽의
영화 <빵과
자유>는 <빵과
장미>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