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데이 - 개정판
데이비드 니콜스 지음, 박유안 옮김 / 리즈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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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이고 쌓인 것. 그것도 차곡차곡. 오늘에서야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

 
나의 (영화) 여신으로 등극하시다. '여신남발자'라는 놀림에도 꿋꿋하게!
 
줄리아 로버츠는 이제 만신전에 올려놓고, 그 자리, 이젠 앤 해서웨이의 것이다.



<원 데이(One Day)>, 확인 사살을 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부터 내 마음을 두드리던 앤이었다.

 
앤, 나를 홀린 여신.
<원 데이>. 나를 울려버린 영화.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도록 하자.


오늘, 앤을 만나서 나는 행복하였도다. 오늘 이런저런 일들을 만나던 와중에도, 앤과 엠마가 내게로 왔다. 7월15일, 성 스위딘의 날. 그 어느해에는 그날, <원 데이>를 돌려볼 것 같다. 그들의 Kiss를 눈물겹게 바라볼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당신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이렇게,

당신 손을 잡고,
 
골목길을 달릴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있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해. 당신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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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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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단박에 우리를 사로잡았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을 단박에 세계의 중심국가를 끌어올리는 주술 같았다. 모든 것은 세계화로 향했다. 모든 수사는 세계화에서 비롯되고 파생됐다. 그러나 그 세계화가 줄기차게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양극화는 심화됐고, 격차사회로 진행됐으며,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게 됐다. 지구촌이라는 말로 세계화를 설명했던 수사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세계화는 화폐화의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행복의 경제학은 그런 세계화의 거짓부렁을 꼬집는다. “세계화는 인간과 환경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초국적 기업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 세계의 분열과 갈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p.141) 그리고 우리의 반성과 성찰을 유도한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이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헬레나는 우리가 어떤 준비나 논의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세계화를 발가벗겨 놓는다. 기만적인 언어와 뉴스피크(정치선전용의 모호하고 기만적인 표현)를 통해 지구인의 삶 깊숙이 들어온 신자유주의의 폭주와 폐해에 대한 총정리라고 해도 좋겠다.

 

이 책의 미덕은 세계화의 폐해에 대한 실증적 지표와 설득 뿐 아니라 확실한 대안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지역화. , 마을공동체의 회복이다. 지역정체성과 지역경제, 지역지식이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세계화는 그 수사와 달리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서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인간적 유대가 필요하다. 공동체에서 살아 숨 쉬는 역할 모델을 만나고 사랑을 배운다.

 

세계의 붕괴를 막으려면 지역적 상호의존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즉 대규모에서 인간적인 규모로 인위적 소비문화에서 사람과 자연이 빚어내는 문화로.”(p.78)

 

그것은 우리가 아는 마을이다. 관계와 이웃이 다시 살아난 마을공동체를 통해 세계화에 초토화된 지구의 삶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헬레나는 조목조목 설명한다. 성장과 세계화의 이름으로 파괴되었던 문명은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회복될 수 있다. 지역화 즉 마을화는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위기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경제와 환경은 건강을 되찾을 것이고, 도시화의 불건전한 조류를 막을 수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이 회복될 것이다. 종족 갈등이나 폭력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화를 향해 나아가는 게 현재의 세계화를 지속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고 사회환경적 손실도 적다.”(p.35)

 

성장의 이름으로 진행됐던 세계화는 경제의 집중을 불러왔다. 기업들만 살이 쪘고,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렸다. 이 책이 내세운 지역화는 그 집중이 불러온 폐해를 물리치고 행복의 경제학으로 갈 수 있는 방법론이다. 곧 경제시스템의 전면적인 전환이다. 그것은 당연해 뵌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기존 경제 체제를 살짝 수정하는 정도로는 지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는 점은 이미 2008년 경제위기로부터도 명백해 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관성이 지금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지역화는 세계화된 기업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넓은 대안이다. 경제활동의 규모를 근본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제무역의 철폐를 의미하거나,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하자는 건 아니다. 단지 보다 책임 있고 보다 지속 가능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집 가까이에서 생산하자는 것이다.”(p.36)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맛있는 두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포장두부에 익숙해져 있다. 식품 대기업들의 포장 두부가 마트를 비롯한 시장을 장악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두부라고 보기 어렵다. 유통기한 보름의 각종 화학첨가물과 향이 가미된 짝퉁이다. 우리는 진짜 맛있는 두부를 잃었다. 소규모 가내수공업이 갓만든 두부의 맛은 마을 단위에서만 가능한 무엇이다. 지역화가 필요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덩치를 키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낸 기형아가 포장 두부인 셈이다.

 

행복의 경제학은 안정적인 지역경제로 향해야 한다는 근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생태적·사회적 파괴로 치닫고 있는 지금 상황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즉 경제활동을 인간적·생태학적 욕구에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마을기업 등 지금 마을공동체와 함께 형성되고 있는 마을경제의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 이유다. 소수의 거대 기업은 극히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복무한다. 공동체 따윈 안중에 없다. 대다수 노동자나 주민의 삶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화가 급선무다. 지역화 혹은 마을화는 그래서 경제민주화의 다른 이름이다.

 

경제민주화가 경제 주체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라면,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들 손에 경제활동을 맡기는 지역화와 바로 연결이 된다. 안정적인 지역경제는 협동과 친밀, 상호의존적 공동체의 근원이 된다. 지역공동체가 커지고 강해짐으로써 사람들의 삶도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마을이 대세가 돼야 함을 확인하는 책이다. 그곳엔 진짜 삶이 있다. 세계화라는 명분에 의해 노예화된 삶은 바뀌어야 한다. 에너지, 식량과 농업, 교육, 의료, 미디어 등이 거대기업이 아닌 인간을 위해 작동해야 한다. 마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고 자란 곳에서 각자의 삶이 뿌리내림으로써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마을화(지역화)는 경제학이 인민의 진짜 행복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성장에 대한 맹목적 인식을 아직 깨기는 어렵다. 성장해야만 분배도 있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주화입마를 입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웃 없이 관계없이 살아가는 무연사회가 주는 끔찍한 풍경을 더 이상 접하는 것은 두렵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덮고 나서 어떤 방식의 행동과 실천을 하느냐가 내 삶과 지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역 제품을 사세요라는 캠페인,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이다. 나는 이것부터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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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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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학교 2013>은 한 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교육’으로 포장된 사육의 현장은 학교라는 이름이 이미 지옥의 다른 이름임을 엿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지옥이라고 만날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모범생 민기의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날 때부터 스무 살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그전까진 없는 인생이니까.” 어떤 것도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엄마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저 아이의 마음, 아마도 지옥이리라.

 

한해 평균 158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 청소년 자살 증가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등 불명예는 꼬리를 문다. 청소년 전체 사망 중 자살 사망 비율이 2000년 14%에서 2009년 28%로 10년 새 2배나 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이 통계. 그렇다면 아이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사람들은 누굴까.

 

《대한민국 부모》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부모다. 부모에게도 그러니, 이곳은 지옥이다. 우리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니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니, 우스개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미친 단어도 없다. 내 자식의 오리지널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아이에 빗대 아이를 다그치는 이상한 풍토가 이 땅엔 있다.

 

그 저변에는 교육열이라는 이름의 불안열이 있다. 불안을 동력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중심이 없는 부모는 그저 아이를 다그치기만 한다. 옆집 엄마의 한 마디에 대책 없이 흔들린다. 내 스스로 만든 지옥에 아이까지 끌어들이는 형국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가치는 없다. 아이에게 전파해 줄 수 있는 가치가 없으니 물려줄 것이라곤 내 마음의 지옥뿐이다. 즉, ‘함께 살자’가 아닌 ‘함께 죽자’의 구조.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까지 전이하는 나쁜 구조.

 

나는 자식도 없고, 결혼도 않았지만, 《대한민국 부모》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본다.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게 자식이 없다고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조카의 일이며, 그 부모는 내 지인들이다. 주변의 부모인 친구나 선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을 엿본다. 자신의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한다. 자율적으로 들어간 그 틀에서 그들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것 같다. 내 아이를 믿지 못하고, 남들보다 뒤처질 거라는 무한 불안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은 돈을 벌어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 견고한 논리에 맥없이 투항한 이유를 저자들(이승욱, 신희경, 김은산)은 심리 상담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예를 통해 잘 설명해준다. 정서적으로 애착관계를 가진 사람과 분리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서 분리가 발생할 때,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불안해한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부모가 아이와의 분리를 받아들이기 힘든 건 자명하다. 부모는 아이를 끝까지 지켜야한다는 명목으로 ‘헬리콥터 부모’가 된다.

 

그것은 곧 불안사회에 대한 심리학적 근거의 제시다. 아이보다 부모의 불안이 훨씬 더 크다. 아이의 불안은 부모의 불안이 전이된 것이다. 즉, 부모의 불안일 뿐, 아이의 불안은 아니다. 부모의 불안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다그칠 뿐이다. 불안 때문에 두뇌 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는 시스템이다.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부모와 아이 모두 지옥도에 빠졌는데, 그 지옥도에서도 아이를 다그치기만 한다.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지난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3 남학생이 성적을 강요하는 엄마를 살해하고 8개월간 집에 방치해 둔 사건. 아이의 패륜을 탓하기 전에 무엇이 엄마를 살해하도록 몰아갔는지 그 근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글쎄.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부모 공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부모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스스로를 포함해서!)를 보호해야 함을 감안하면 공부가 필요하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보호받고 있구나. 우리는 안전하구나. 우리가 성장해도 되는 곳이구나. 요즘 아이들, 패기가 없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은 잘못됐다. 부모가 그런 환경을 못 만들어줬다. 그러면서 윽박만 지른다고 아이들이 저절로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부모들이 베이스캠프가 먼저 돼 줘야 한다. 베이스캠프가 불안하니까, 아이들은 베이스캠프에 묶여서 못 떠난다.

 

이 책은 충격적인 것만 예만 모아놓은 게 아니다. 부모 딴에는 모든 희생을 치러서 의사를 만들어 놨더니 “당신의 아들로 산 것은 지옥이었습니다. 저를 다시는 찾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만 남기고 연락이 끊긴 아들은 지금 가장 보통의 아들일 수 있다. 자기 삶도 서사도 없는 부모, 부부간의 관계도 깨진 채 껍데기만 남은 가정은 우리 대부분의 가정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꾸릴까. 부모에게 대놓고 ‘찌질이’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흘러가는 세상. 과연, 대한민국 부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슬픈 족속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떠해야 할까. 이 책이 건네는 진단서는 꽤나 약발이 있어 보인다. 포기. 인간의 성찰과 성장은 포기하는 순간부터 일어날 수 있다. 포기의 다른 말은 곧 수용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오리지널을 인정하면서 남의 아이와 비교하지 않기. 오롯이 내 아이를 내 아이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부모도 아이도 지옥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문제 해결 진단은 그런 면에서 꽤나 유효해 뵌다. 기존 사고의 틀에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없애는 것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우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비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를 없애고 새로운 현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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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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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빠지지 않고 반드시 보는 코너가 있다. 부고란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본다. 그 이름에 얽힌 사람들도 자연히 보게 된다. 사라진 한 우주와 그 우주를 둘러싼 세계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아주 잠시 상념에 빠진다. 물론 세상엔 신문 부고란에 나오지 않는 죽음이 더 많다. 그 사실도 철저하게 잊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허투루 다뤄서는 안 된다. 죽음에 대해 성숙하지 태도를 지닌 사회야말로 천박한 사회다. 그렇게 보면 한국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태도는 아쉬운 점이 많다.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부고란을 맡고 부고 기사를 쓰는 담당 기자는 대부분 신입이나 경력이 얕다. 부고 기사를 한국 미디어들이 얼마나 소홀하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쩔 수 없다. 해외의 예를 들어야 겠다. 해외 유력 언론에게 오비추어리는 중요하다. 사내 최고의 기자들이 부도 담당을 한다. 특히, <뉴욕타임스>의 오비추어리는 유명하다. 부고 기사만 모아 책으로 발간할 정도다. <이코노미스트>는 마지막 페이지를 한 사람의 부고 기사에 모두 할애한다.

 

부고 담당 기자는 그래서 엄청난 자료를 갖고 있고,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양한 취재원과 접촉한다. 한 우주의 소멸을 다루는데, 예의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요, 다양하고 입체적인 정보를 담아야 하는 것은 필수다. 오비추어리는 죽음을 다루지만 결국 독자들에게 지금의 을 돌아볼 것을 권하는 기사인 것이다. 스티븐 킹은 그래서 부고 기사를 커튼콜에 비유했다. 이런 말까지 덧붙여. “때론 쇼의 최고 장면은 커튼콜이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오비추어리다. ‘잭 캘로웨이라는 생소한 작가를 기록한 뭉클한 오비추어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한 만화가를 좇는 세스의 여정은 특별한 것이 없다. (자료를) 찾고, (캘로웨이의 흔적을) 찾아가고, 이를 친구와 나눈다. 대단한 작가도 아닌 캘로웨이를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찾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이 작품,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림은 더디게 흘러가고, 빠른 장면 전환도 없다. 천천히 묵묵하게 간다. 여느 만화의 속도와는 다르다. 영화의 롱테이크(길게 찍기)’와도 같다. 그림은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그리고 정교하다. 한 장면이라도 허투루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연출 같다. 한 컷 한 컷에 뭔가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한 컷 한 컷도 그래서 주인공이다. 만화로 세상을 배운 세스를 통해 드러난 만화경도 하나의 사소한 재미다. 덕분에 만화에 대한 메타만화로서도 기능한다.

 

세스의 캘로웨이 찾기는 인간이 지닌 어떤 한 본성을 엿보는 것 같다. 사실 캘로웨이를 찾는 일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의 불분명함 때문에 이 만화가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스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런지 의아할 때가 있다.

 

캘로를 찾아헤매는 것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가 대체 뭐라고그냥 반짝 뜨다 만 사람을 가지고. 더 중요한 작품을 남긴 사람을 찾아봤어야지. 그게 더 현명한 일이었을 텐데.”(p.125)

 

그럼에도 인간은 어떤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끌림에 따른다. 자료를 찾고,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전화번호부를 통해 집 주소를 찾아낼 정도의 열성이다. 세스가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무엇일까. 세스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나도 궁금했다. 돈 되는 일도 아니요, 그의 작품과 흔적을 찾는다고 세상이 떠들썩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그저 발을 떼고 찾을 뿐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다니는 거야.”(p.155)

 

어쩌면 캘로웨이는 세스에게 좋은 것의 대명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쇠락해가는 옛 것들을 보며 사라져가는 과거를 슬퍼하는 세스다. ‘옛날 삶이 더 단순했고,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쉬웠다고 생각하는 세스다. ‘좋은 건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세스다. 그 시절의 좋은 것들이 자신의 삶에 계속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로선, 캘로웨이의 작품을 찾는 것이 자신의 삶의 돌파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거 속에 가라앉아 허우적대고 있다. 어린 시절에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지나간 시절을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뭔가 실마리를 찾아내면 현재의 지긋지긋한 문제들도 해결될 것 같다. 5분만 놔둬도 곧바로 우울해지는 게 나란 사람이다. 세상만사 슬프지 않은 게 없다. 안다. 내가 유난 떤다는 것. 하지만 많은 게 날 우울하게 만든다. 여기 이 기름때 낀 숟가락만 해도 그렇다.”(p.41)

 

그가 캐나다를 오가면서 찾은 캘로웨이의 이야기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특별한 순간이다. 생의 모든 순간을 기적이라 칭할 순 없지만, 가슴이 뛰는 찰나의 순간을 기적이라 칭하지 말란 법도 없다. 캘로웨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세스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는 가슴이 살짝 뛰었다. 세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특별할 것도 없는 그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질 어느 순간을 감식한 세스는 아마 행복했던 것 같다. 미처 몰랐던 아들의 야한 만화를 보면서 재밌어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아들의 몰랐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을 향해 세스는 웃고 있다.

 

그는 한 뼘 성장했을 것이다. 물론 성장이 아니어도 좋다. 성장은 한 순간에 훌쩍 크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이 모인 결정체다. 인생은 그러니까,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IT‘S A GOOD LIFE, IF YOU DON’T WEAKEN.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제목이다. 누구에게나 약해지려는 순간, 느닷없이 닥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순간은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약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라는 캘로웨이의 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또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본다면 알 수 있겠지만, 캘로웨이의 말은 불행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말없이 수긍하며 사는 삶에 만족했던 캘로웨이의 미소를 상상해볼 수 있다. 나도 세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 바이올렛이 고마웠다. 이 책의 제목이자, 세스에게 종종 해주시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 말이 삶을 버티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 로고테라피(의미치유)의 기능도 한다. 이런 오비추어리, 긴 여운을 남긴다. 하늘에 있을 캘로웨이도 참 좋아하지 않았을까!

 

아 참, 옆에서 그저 묵묵히 그것을 받아주는, 체트의 존재도 은근 인상 깊다. 그는 친구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고, 자기비하를 일삼는 친구에게 넌지시 넌 괜찮은 놈이야라고 건네준다. 친구의 만화 열광을 묵묵히 들어주다가 그러게느낌이 좋다고 말해주며, 어쩌면 그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캘로웨이 찾기에 나선 친구를 응원해 준다. 좋은 친구의 좋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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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뼈 그리고 버터
개브리엘 해밀턴 지음, 이시아.승영조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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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리() 이야기라기에, 솔깃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먹는 문제라면 신경이 발딱 선다. 그것이 살아내기 위해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면서, 다른 사전 정보 따윈 거의 없었다. 약간 유명한 셰프가 음식이야기를 펼친다는 정도?

 

그래서 어떤 먹을거리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나를 사유하게 만들까. 식품에 대한 어떤 세계와 철학이 펼쳐질까. 궁금했다. 책 두께(528페이지)도 만만치 않지만(심지어 사진 한 장도 없다!), 먹을거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 정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아뿔싸!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식품이 아니었다. 요리가 아니었다. 거기엔 구체적인 개별의 인간이 있었다. 개브리엘 해밀턴. 뉴욕 이스트빌리지 프룬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한 인간이 세계와 긴장을 이루면서 살아낸 삶이 팔팔 끓고 있었다. , 뜨거 뜨거!!!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이 여자, 아니 사람, 여자사람에 반했다. 책만 놓고 보면 그렇다. 직접 만나면 무서울 것 같다. 섣불리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에 나는 찍소리 못하고, 음식만 먹을 것이다. 아마도. 먼발치에서 그녀를 힐긋 바라보면서. 흠모의 마음을 품고. 저런 멋진 셰프 작가를 눈앞에서 보다니, 오오.

 

피와 뼈 그리고 버터, 유기농, 친환경, 자연산 등의 수식어 따윈 저버리고, 그저 자신의 마당에서 막 자란 채소와 근처 농장에서 갓 잡아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적당히 구워 자신이 만든 소스를 버무려 만든, 개성 뚝뚝 떨어지는 개브리엘표 요리다. 글은 생생하게 팔딱거리며, 자신만의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 스트레이트로 쭉쭉 뻗어나가는데다 한 번씩 날리는 잽은 맞으면 기분이 좋다. 내 눈앞에서 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만큼 현장감 있고, 돌직구처럼 달려든다. 번역한 사람도 꽤나 공을 들인 것 같다. 어지간하면 이런 생각 들지 않는데, 원서로 읽고 싶어졌다. 아마 평생을 가도 다 읽진 못하겠지만.

 

책은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자주 웃었고, 종종 뭉클했으며, 가끔 눈물이 찔끔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생각은, 이 책, 식품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로웠던 한 사람의 가족 예찬사. 평소의 나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로 이를 다뤘겠지만, 이 책,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복선처럼 깔린 그녀의 분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요리에 대한 멋지고 풍성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지배하는 기조는 가족이다. 특히 가족(시월드), 그중에서도 저자가 시어머니와 함께 요리를 하고 그것을 나누는 장면, 압권이다. 그 장면만으로도 그림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 어릴 때부터 어른이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하는 아이들이 있다. 개브리엘이 그랬다. 부모의 이혼이 계기였고, 십대의 나이, 주급 74달러 11센트의 주급이 쥐어진 순간부터 그녀, 어른이 됐다.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그녀를 지켜줄 혹은 옭아맬 신념이 아로새겨졌다. “내가 몸소 벌어서 살아간다면, 나는 내 맘대로 살 거야.”(p.71)

 

열세 살, 초보 요리사가 된 그녀, 공장노동이나 다름없는 케이터링 업체의 요리기계를 거치고, 작가의 길로 잠시 들어섰다가 우연찮게 오너 셰프로 레스토랑을 꾸려간다. 지지고 볶고 고달프게 버텨나가는 그 전쟁 같은 요리사 생활 가운데서도 그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시종일관 가족이다. 스쳐지나갈지라도 따뜻하게 던져진 말 한마디, 남자보다 욕을 잘 하는 그녀지만 그 안에 있는 소녀를 단 한 순간이라도 보듬어줄 수 있는 손길 하나. 그녀는 꽤나 많이 터프하고 와일드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를 관통하는 건 소녀다. 가족을 배경으로 둔 소녀. 채워질 수 없는 소녀의 아픔이나 외로움이 그 터프함을 뚫고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알다는 유사 어머니이자 가족이다. 남편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된 그녀가 덩달아 만나게 된 사람, 시월드에서 만난 놀라운 인물. 알다와 그녀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알다의 아들이자 개브리엘의 남편을 매개로 하지 않고, ‘요리라는 언어를 매개로 맺어진다. 그것이 인상적이다. 개브리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요리는 워낙 단순하고 순식간에 끝나서 조리법을 말하고 자시고 할 건더기도 없을 정도다. 그녀에게서 조리법을 알아내는 것은 교육적이라기보다 시적인 경험이다.”(p.302)

 

레즈비언이었으나 어쩌다 이탈리아 출신 의사이자 박사 남편을 소유하게 된 그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이지만,(책 곳곳에 그녀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진정 멘탈갑이다.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외롭고 지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견뎌낸다. 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털어내는 장면, 오빠의 죽음, 남편과의 심난한 결혼생활. 요리 덕분에 견딘 것도 같지만, 일찍 어른이 된 그녀의 멘탈은 충분히 단련이 된 듯하다. 죽음(자살) 대신 또 다른 죽음이라며 실종을 선택하고 여행을 떠난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세계와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견뎌냈다.

 

개브리엘의 이야기를 통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자연스레 떠올린 이유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7월의 이탈리아 휴가길, 이젠 더 이상 시월드와 관계를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앞에 그녀는 시월드 별장의 가지를 치고 바다를 바라본다. 시어머니 알다와 함께. 그 장면, 시적이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불안하지 않다. 다만, 가족. 그토록 갈망하던 가족이라는 배후. 7월의 이탈리아 3주 여행. 그녀는 지금도 시월드를 방문하면서 알다와 요리를 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살짝 궁금하다.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이탈리아 대가족의 그림은 정말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그러나 그건 내 가족이 아니고, 나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아들을 낳아주고, 저녁을 차려주고, 낙엽을 치워주고, 정원을 가꿔주고, 비행기 요금을 대주어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p.511)

 

(책만 보고 단정해버렸지만) 개브리엘 같은 이 멋진 여자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녀만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남자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켈레(개브리엘의 남편) 같은 남자는 아니고 싶다. 슬픔 품은 이토록 매력적인 여자를 외롭게 만들다니. . 개브리엘이 완벽한 식당의 본보기로 여긴다는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 세리포스의 작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야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고, 그물로 무엇을 얼마나 잡든 그것이 저녁 요리로 나오는. 오후 8시에라도 물고기가 떨어지면 그걸로 요리는 끝인 식당. 손님이 양고기를 원하면 양념만 해서 아무런 야채도 없이 달랑 양고기만 내주고, 콩과 감자를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하는. 그곳에.

 

대부분 사람은 그렇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많고, 조화로운 날은 좀처럼 없다. 누구나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생기고, 누구나 상처를 받고그래도, 개브리엘에게도 그렇고, 우리에겐 그렇다. 요리가 있다. 2013년 신년 첫 책 덕분에, 나는 실컷 웃고 뭉클했으며 찔끔했다. 요리도 잘하고(먹어보진 못하였으나), 글도 잘 쓰는 이 사람. 부럽다. 나는 커피라도 잘 내렸으면 좋겠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내 커피는, 내 요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9, 문을 열고 들어오시라. 당신만을 위한 만찬의 시간이다. 개브리엘, 라 브라바(La Brava).

 

요리는 나로 하여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하는 것이고, 내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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