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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울 - 2000년대 최고의 소설과 함께 떠나는 서울 이야기 사전
김민채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옛날부터 이런 표현들, 가끔 궁금했다.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간다. 서울은 오르는 곳이었다. 위에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물론 그것도 북반구 기준에서다. 남반구 기준으로 보면, 서울도 위에 있질 않다. 어쨌든 재밌는 건, 서울보다 위(위도 상)에 있는 곳에서도 서울에 가는 것에 대해, 저런 표현을 쓴다는 거다. 서울은 어떻게든 올라야 하는 곳이고, 위에 있는 곳이었나 보다. ‘상경(上京)’이라는 관성적 표현도 그런 것을 증명한다.
때론 거슬렸었다. 아마 서울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고, 서울을 일상적 애정의 장소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도 서울을 동경했었다. 촌놈에게 서울은 뭔가 휘황한 곳이었다. 서울,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라도 갈라치면, 어찌나 좋아했던지. ‘서울’ 노래를 불렀다. 서울은 그렇게 어떻게든 촌놈이 가야할 곳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발을 디뎠다. 진짜 서울에 올라왔다. 부산촌놈, 서울내기가 된 것이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에 발 디뎠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바다가 그리워도, 두고 온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도,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촌놈다웠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조용필의 노래, 아름다웠다. 뭣도 모른 채.
그러니까, 촌놈에게 서울은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개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촌놈의 욕심이 향한 곳. 서울을 사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을 더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은 촌놈이 정복해야 할 곳이었던 게지. 그저 자신의 욕망이 이룰 장소였을 뿐이었다.
물론 그 치기어린 욕망, 오래가지 않았다. 청운의 꿈이라고 여겼었던 것, 한낮 허황된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서울을 애정한 것, 아니었다. 이미 익숙해진 곳. 그냥 내 몸뚱이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처럼 포장한, 비루한 욕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바뀌었다. 욕망은 점점 비대해졌다. 삶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사람의 가치는 외려 떨어졌다. 서울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서울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었다. 성형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더 서울》의 저자 김민채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뉴요커를 흉내 내고 파리지앵을 부러워하며, 런더너를 지향하는 것. 그것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서울의 비굴함이 싫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다운 고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서울답던 풍경은 근대화 이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고 고층빌딩숲을 서울의 고유함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 서울은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새로 만드는 공간이나 건물들은 ‘유럽풍’. ‘서양식’ 등을 최고의 수식어로 여기는 듯 설계되고 홍보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습관이나 문화가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의 행동 방식을 열심히 따라한다.”(pp.100~101)
그럼에도 서울‘턱별시’는 사람을 조금씩 매혹시켰다. 서울, 하면 드러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별천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 아파트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높은 고층빌딩을 사람을 위압하지도 않았다. ‘지갑을 열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계명도 없었다.
부암동이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아끼는 그곳에는 커피가 있고, 운치가 있다. 낭만이 있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쉬고 싶은 장소가 있으며, 자연이 살아 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조금씩 그것을 해치는 요소들이 틈입하긴 하나, 그래도 부암동은 부암동. 그곳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장소 한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 (행정구역상으론 청운동이다.)
《더 서울》의 김민채 저자가 휘날레로 장식한 곳. 그래서 반가웠다. 그도 이곳을 사랑하는 구나.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나도 그도,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구나. “내리 3일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랐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갈 때마다 새롭고 경이로웠다. 두 발에 닿는 언덕의 경사가 즐겁고, 두 뺨에 닿는 언덕의 바람이 사랑스러웠다.”(p.327)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여럿이 함께였다. 일종의 소개를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혼자 찾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좋았다. 그 야트막한 언덕, 사랑스러웠다. 아무나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너와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김민채의 마음에 공감했다.
“누군가와 함께 다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찾는다면, 내가 누렸던 순간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고, 난 그저 그의 뒤에서 말없이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걷고 싶다고.”(pp.327~328)
거기에 덧붙여, 윤동주 시인의 詩를 연인을 위해 읊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낭송회를 연다면 그곳으로 하고 싶다. 바람에 스치는 별을 함께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만의 윤동주가 되고 싶다.
김민채의 서울이야기는 지극히 감상적이다. 더 서울, ‘the’이기도 하고, ‘more’이기도 한데, 때론 그 감성에 공감하면서도 너무 개인적이라 뜬구름 잡는 것 같았다. 약간은 실험적인 형식인데, 혼자만의 감성만 너무 넘친다. 이해하기보다 느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쉬이 그 느낌에 젖어들지 못했다. 다시 책을 본다면 모를까, 처음 본 감상은 그렇다. 꼭 소설가 지망생 혹은 작가 습작생의 글을 본 느낌이다. 서울이 지닌 보편적 감상보다 개인의 감상만 줄줄 흐른다.
‘서울과 친해지는 30가지 방법’이라지만, 자신의 경험과 느낌만 늘어놨을 뿐, 서울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혼자만 친해졌을 뿐, 다른 사람은 파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서울이라고 했을 때의 기대감이 꺾여서 그럴 것이다. 나의 필요와 요구에 맞지 않을 뿐이다. 문학(소설)과 어우러진 글은 감각적이다. 누군가에겐 참 좋은 시도이자, 즐거운 책 읽기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서울을 애정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개미마을의 이야기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마을공동체의 하나인 그곳. ‘철거’라는 멘붕(MB)시대의 시대정신이 할퀸 그곳. 물론 그전부터 철거는 개미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거로부터 자신을, 삶을, 마을을 지켰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서울에서.
“무허가촌이었다는 개미마을은 오랜 시간 동안 몇 번의 철거 사태를 겪어냈다고 한다. 마을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낡아왔다. 언덕 위의 무허가촌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2009년, 금호건설의 후원을 받아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개미마을에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 벽화를 즐기고, 사진으로 홍제동에서의 추억을 남긴다. 이제 그곳은 사람들의 마을이 됐다.”(p.45)
그리고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걷고 싶음’에 대한 단상도 꺼낸다. 맞장구 쳤다. 걷고 싶은 서울을 향한 마음. 자동차에 잠식당한 인도에 대한 안타까움. 나도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을 위한 다리가 아닌, 차를 위한 다리에 대해 늘 가졌던 불만이었다.
“한강은 아름답지만, 한강의 다리들이 어색한 이유. 한강의 다리들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의 다리들은 철저히 자동차 위주다. 인도는 최소화되어 있다. 길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다. 다리에 오르는 길을 찾기 어려운 다리도 많다.”(p.293)
분리되고 격리됐으며, 외따로 떨어진 서울의 삶에, 마을공동체가 꿈틀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다. 20년을 넘은 서울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다. 때리고 부수어서 바뀔 줄만 알았던 서울이 얼굴보다 마음을 신경 쓰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터를 사유하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내 삶의 자치권을 남에게 넘겨준 것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김민채의 서울에도 그런 단초가 담겼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다시 서울을 살아내야 한다. ‘더’ 서울을 살아가는 태도. 서울을 다시 생각한다. ‘더’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각박한 서울이 마을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의 서울에게 ‘더’ 주어진 과제다.
“젊은 날 함께 같은 꿈과 희망을 나눴었어도 결국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
시간이 흐르면 존재의 형식은 변한다.
예전의 우리만을 기억해서는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우리 존재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p.51)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