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4 로마제국 쇠망사 4
에드워드 기번 지음, 운수인.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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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눈에는 야만족 그리고 로마를 제외한 다른 시각에서는 개척자라 칭할 수 있는 게르만족의 대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정확히 로마의 반쪽이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한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부여받게 되지만 로마의 생명력은 자신들의 지배통치 방식 만큼이나 새롭고 끈질기게 연명하게 된다. 로마제국으로서는 최대의 위난시대였지만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국시로 새롭게 신장개업을 한 동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같은 형제이지만 이단과 이교도로 득실거리면서 그 옛날 로마 번성기의 향수에 빠져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는 형제는 이제 더 이상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몰락은 이런 측면에서 보게 되면 예견된 길을 걸었고 이미 사형선고를 받는 말기암 환자에게 인공적인 생명의 연장조치로 간신히 버텨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 장대한 죽음을 그다치 수치스럽게 맞이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세계사를 둘러보아도 아주 온건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던 서로마제국은 이제 더이상 유럽의 지배자가 아니였다는 점은 분명해진 것이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쪽 끝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도약을 길을 모색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 국교의 신이 위대한 하느님이 보우와사 또 하나의 대제를 그들의 땅에 내려줌으로써 다시 화려한 번창기를 맞게 된다. 그 구세주는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다. 로마 역사상 대제라는 칭호는 받은 황제는 단 두명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고 로마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변모시키고 동로마제국의 시조가 된 콘스탄티누스대제. 그리고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의기소침해 있던 제국을 재정비한 유스티니아누스법전으로 더 잘알려져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다.

이런 면에서 로마는 다른 여타 제국에 비해 그 운이 좋은 제국임에 틀림없다. 아우구스투스로 부터 출발한 제국은 휘청할 때마다 구원투수들이 등장해서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게임을 마무리 짓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오현제가 그렇고 디오글레티아누스가 등장하여 제국의 분할정치를 창안하여 안정을 찾았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구원투수의 등장으로 로마는 유리한 카드를 쥐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운으로만 몰고 가기엔 무리가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로마제국만의 특수성과 탁월적이고 효과적인제국통치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록 기독교라는 일신교가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면면히 내려오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은 아직까지도 로마제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기에 걸출한 황제의 탄생이 가능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진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은 다양한 경로와 문헌 그리고 남아서 존재하고 있는 유적들을 통해서 알고 있는 바이지만 여기서 기번의 해석은 또 다시 로마제국의 포용력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일신교 제국이었고 향후 기독교에 의해 대제라는 반열에 오르게 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황후 테오도라가 죽음을 맞고 말년에가서야 종교에 대한 맹신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대부분의 치세 동안은 극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제국을 통치할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물들을 얻어냈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형제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이탈리아반도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제국내의 법을 재정비하여 흔들리던 제국을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유스티니아누스도 결국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관련된 종교문제로 인해 치세 말년을 이탈리아 교황과의 한판 승부로 소진하게 된다. 기번은 이번에도 결국 로마라는 제국이 일어설수 있는 실마리마저도 외면해 버린 기독교에 대한 맹비난을 가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테오도라가 유스티니아누스의 황후가 아니였다면 또한 그녀가 정치적인 성향이 약했더라면 로마제국의 앞길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말년과 그리고 이어지는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보게 되는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네스토리우스파, 야고브파, 마론파, 아르메니아파, 콥트파등 수없이 많은 분파와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신학적인 접근을 통일시켜 나가게 되지만 결국 이러한 일련의 행보가 과연 로마제국에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사를 던지게 된다. 이번 권 역시 기번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와 치열한 신학논쟁 그리고 신학논쟁에서 확대되는 정치분열등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전통적인 로마사상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하는 견지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한번 상고해 보더라도 로마라는 거대한 호수는 그 샘이 마르지 않고 그 어떠한 불순물이 흘러들어와도 자체 정화능력과 불순물을 불순물로 받아 들이지 않는 위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에서 로마라는 제국은 다양한 고난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형제의 한쪽을 잃고 홀로 남은 동로마 제국 역시 자신의 근본적인 사상에서 너무 멀리와 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나마 유스티니아누스의 제동으로 그 물결을 멈출 수는 있었지만 결국 거대한 일신교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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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 - 원칙과 소신의 리더, 이순신의 삶과 꿈
김헌식 지음 / 평민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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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대표하는 위인을 떠올리게 되면 아마도 세손가락안에 드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일것이다. 그만큼 우리 한민족에게 이순신의 이미지는 깊이 각인되어 있다. 특히 현대에 들어 정권의 정당성 강화 차원에서 다소 왜곡되게 부각된 부분도 있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고 각인된 이순신의 이미지는 이제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써 깊이 그것도 아주 깊이 우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어린시절 위인전에서 막연하게 그려지는 영웅이라는 이미지는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한민족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감정기 능욕의 역사의 뒤풀이 과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이순신은 존재해도 인간적인 이순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몇해전 김훈의 <칼의 노래>와 TV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그동안 공적인 측면에 치우친 그의 존재성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그의 동상를 보면서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성웅 이순신의 영웅성보다는 그의 일상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적인 이순신을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7년전쟁 기간동안 이순신의 전투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 힘든 100%의 승률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도고제독은 이순신을 전쟁의 신이라고 숭배했을 정도로 가히 그는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물론 이순신의 화려한 승률이면에는 철저한 전략과 정보분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과 정보분석을 가능케 한 이면에 인간적인 이순신의 면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영웅만들기에 동원되는 수법이 공적인 공과에 치중해서 개인적인 삶마저도 왜곡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경우가 많다. 이런면에서 보면 우리의 이순신 역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너무도 많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강인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극히 평볌한 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다른 이들과 다를것이 없다는 점은 우리가 만든 영웅의 이미지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외면되고 사장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순신의 평가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분명 이순신을 영웅이라고 지칭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단지 그가 왜 영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7년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우국충정의 대의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기 때문이 아닌 그 역시 일반인과 다름없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최대한 아울러 가장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지이다. 영웅은 역사라는 기회가 만든다고 하지만 그런 기회를 제대로 포착해서 내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만이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지도 못했고 그의 관직생활역시 파면과 좌천등의 질곡을 겪으면서 순탄하지도 못했다. 또한 집안의 가세역시 몰락한 양반으로서 당시 철저한 신분주의 제도에서 별다른 어드밴티지를 누리지도 못했고, 전략상 동반자적 입장에 놓였던 원균과도 불화가 많았고 임금인 선조로부터 주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이런 상황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을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범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주변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그만의 인생철학이 결국 7년전쟁을 맞이하여 빛을 발했던 것이다.  

충무공행장이나 난중일기 그리고 징비록등의 역사적 기록을 보게 되더라도 이순신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들을 수없이 많이 접하게 된다. 성웅을 떠나서 이순신 역시 우리와 같은 질투와 애정 그리고 번민에 둘러쌓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는 이러한 삶을 나름대로 즐기면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그래서 영웅와 범인은 어찌보면 종이 한장 차이일 수 도 있지만 그 한장의 종이가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영웅들의 삶의 대처방식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동안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너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산물속에서 정형화되어 버린 경향이 있다. <천군>이라는 영화속에서 이순신으로 분한 박종훈이 거침없이 쌍소리를 하듯이 이순신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극히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자꾸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할 수록 이순신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게 된다. 23전 23승이라는 100%의 놀라운 승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한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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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를 리뷰해주세요.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 역사를 담은 건축, 인간을 품은 공간
서윤영 지음 / 궁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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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3가지는 衣食住일 것이다. 또한 이 3가지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비례해서 다양한 부수적 파생원칙을 만들어 냈지만 지금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본요소이기도 한다. 그리고 의식주와 관련해서 인간은 단지 생명의 존속을 위한 필수요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의미는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확대 재생산되어 또 다른 거대한 담론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중 住(여기서 주는 거주로서의 개념을 확대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건축물을 망라하기로 한다)에 대한 근본적인 기능이상의 다른 면에 대해서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과 권력 그리고 욕망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있는 지에 대한 고찰과 이를 통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흔히들 세계7대 불가사의에 대해서 말할때 가장 우선적인 생각이 어떻게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지금의 과학문명을 방불케하는 기술력으로 그러한 건축물을 건축할 수 있었을까라는 경외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들여다 보아도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빈틈없이 설계하고 시공한 기술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왜 우리 인간은 그러한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생각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건축물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다시 시간의 추를 앞으로 돌려 현대의 각종 건축물중에서 백화점과 마천루같은 오피스빌딩 그리고 대표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를 보게 되면 또 다른 상념에 잠기게 된다. 갈수록 화려한 인테리어와 하늘높은줄 모르는 높이 그리고 외관상으로 구분이 전혀 가질 않는 아파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일까... 

이러한 건축물의 주요 목적은 외침의 방비, 소비를 효율적으로 보조하는 역활, 그리고 안락한 주거의 편의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욕망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권력자의 권력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왕권신수설이 근본 바탕이었고 이러한 생각이 바로 거대한 건축물로 표현 되었던 것이다. 외침의 방지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포장하여 권력의 위대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을 건축하기 위하여 투입된 일반 백성들의 피와 눈물은 다름 아닌 권력자에 대한 정당한 댓가로 치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추구는 현대의 건축물에도 그대로 들어나 있다. 전제주의라는 개념에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신개념의 권력이 탄생하면서 현대의 오피스빌딩은 그 건물 소유 기업의 권력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권력이 묻어 있는 건축물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론 옛날엔 상상도 못했던 건물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도 발생하면서 거대한 건축물에 압도 당하는 것은 물리적 위압감 보다는 정신적인 위압감이 크기 때문이다.  

권력과 쌍둥이 처럼 따라 다닐 수 밖에 없는 욕망이라는 특성역시 고대의 건축물이나 현대의 건축물에는 빠질 수 없는 요소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고대 건축물은 종교와 관련된 건축물 일수록 그 외관의 크기와 화려함이 극치를 달렸다. 이러한 건축물에 대한 종교적인 욕망 뿐 아니라 최고 권력자 개인의 욕망까지 부수적으로 가미되면서 경외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반면 현대에는 이러한 욕망이 일반 개인들의 보편타당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백화점과 대한민국에서는 아파트라는 비툴어진 주거형태로 욕망의 가장 결정적인 표출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 주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에는 본연의 기능을 능가하고 있는 거대한 담론이 숨겨져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권력과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축물을 통해서 과연 우리 인간은 스스로 만든 덫에 스스로 억압되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결국 이러한 권력과 욕망이라는 쌍두마차의 힘이 지금의 건축물을 탄생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것이 사실이지만 건축물 본연의 모습을 방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시대 난해한 시로 유명한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시를 보면 지금의 건축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인간과 건축물은 서로에게 공생관계로 존재해하지 한쪽 일방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인간성의 상실을 건축은 건축 본연의 성질을 상실하게 된다. 마치 육면각체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발광어류의 군집이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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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꽃 1 - 2009년 제25회 펜문학상 수상작
유익서 지음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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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춘춘시대 전국을 주유하면서 온갖 박해와 비웃음을 사면서도 그 행보를 멈추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주나라때의 올바른 정치를 재현코져, 특히 禮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설파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의 세인들은 이러한 공자의 시도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폄하 하였다. 결국 맹자에 이어 한나라때에 이르러 공자의 생각은 빛을 보게 되었다. 공자가 주창한 예에는 음악 또한 포함되어있다. 특히 조선의 성군 세종의 경우 궁중음악인 아악을 새로이 정립하면서 중국의 음악이 아닌 조선의 음악을 갖고저 부단히 노력을 하였다. 이는 음악이란 본디 특정나라 특정민족의 정신을 반영하여야 제대로 된 음악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사고라는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문자보다 더 먼저 이러한 사고와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 역활을 해나가고 있다. 우리가 대중가요을 들어면서 음률과 그 노랫말을 무심코 흘려듣는것 같지만 그 노래가 전달 할려고 하는 감정들은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게 된다. 달리 표현해서 노래는 바로 인간들이 삶을 대변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소리꽃>은 한 歌人의 삶을 조명한 소설이다. 300여년만에 한적한 사찰의 석탑 밑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된 항아리와 그리고 가인의 일생을 요약한 목판을 통해서 진정한 자신만의 노래 그리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속 화자인 역사학자의 시각은 바로 작가의 시각이고 작가는 이러한 시선을 통해서 주인공 솔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녹색손님의 권유로 구곡산에서 가루라와 경주를 하고 음악의 신이 현현한 가릉빈가에게 인정받아 항아리를 손에 넣게 된지만 솔이의 고난의 역경은 바로 항아리에 소리를 담아야 하는 운명으로 결부된다. 그것도 여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노래만이 항아리에 담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으로 다가 온 것이다. 조선 중기 인조반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소설은 그동안 성리학에 철저히 길들여진 음율 다름아닌 조선의 것이 아닌 중국의 것을 모방한 음악일색이었다. 또한 이 음악은 바로 가진자 양반들의 사상을 대변할 뿐 절대다수인 대중의 삶은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솔이 역시 저절로 있었도 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노래에는 타고난 가인이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노래 역시 전시대에 정형화된 노래였을 뿐이었다.  

판소리가 일반 평민문학을 대변하는 것은 다름아닌 일반민중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의 고고한 기상이나 절개와는 다른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노래형식으로 달리 표현했을 뿐 판소리 자체가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내용은 구구절절히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솔이가 새로운 노래를 찾아 길을 나서 겪게 되는 과정이 바로 교방한켠과 같은 작고 죽어 있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닌 현실 그 자체 살아있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한다. 몰락한 양반으로 저자거리에서 이야기를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전기수 대우, 반정성공으로 전도양양한 앞길이 보장되었지만 모든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진경을 그리고져 노력한 고강, 불우한 출생을 겪고 어머니를 찾아서 남사당패에 들어간 어름사니 도일, 소작농으로 어렵게 자신의 논을 장만하였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최개동 통해서 사장된 음악이 아닌 일반대중속에 살아있는 삶을 그대로 표현한 노래를 찾아가는 여정은 눈물겨울 정도로 고난이 연속이다. 마치 평민문학인 판소리가 탄생하기 까지 그 얼마나 많은 질시와 힘겨움이 있었겠나 하는 추측을 반증하기로 하듯이...

전기수 대우에게서 전체적인 노래의 스토리 전개과정, 어름사리 도일의 몸짓에서 느리고 빠른 장단, 소작농 개동의 삶을 노래한 무녀 선이네의 간장을 녹이는 애틋함, 고강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눈에서 마침내 솔이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파격적인 새로운 노래를 완성하게 된다. 솔이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항아리는 바로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 없듯이 노래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과 팝에 익숙한 지금의 우리에게 새삼 우리의 가락 우리의 노래 판소리는 너무나 멀리 비현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절때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듣기조차 힘든 노래가 판소리이다. 흥부가, 심청가등 대표적인 판소리를 우리는 단지 권선징악이라는 유교적인 교훈이 담긴 계도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지만 판소리에는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일반 대중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떠한 새련미나 포장도 없이 그냥 그대로 사람들이 느꼈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고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다. 소설속 승종이 솔이의 노래를 듣고 노래가 너무 길어서 어찌 이해가 되겠냐고 반문했듯이 판소리는 이러한 삶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길 수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판소리보다 진한 감동과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판소리는 노래가 아닌 일반 대중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식민통치기간 내내 판소리를 폄하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그 만큼 판소리를 노래가 아닌 대중의 사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고유의 노래는 관심밖의 세상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우리 고유 의식 박탈은 음악이라는 장르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한번 쯤은 우리 고유 노래를 음미해 볼 여유를 가져야 할 때는 아닌가 싶다. <소리꽃>는 그야말로 노래가 꽃으로 승화한 소설이다. 동살, 돋을볕, 씨아, 생청스러운, 기직자리는 노래처럼 그리고 화사한 봄날에 예쁘게 활짝핀 꽃처럼 아름답지만 여태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우리말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솔이가 항아리에 노래를 담듯이 작가는 소설속에 우리의 혼을 담고 있다. 마치 우리 소리의 한을 작가는 독자들 마음속에 자리한 항아리에 담고 싶어 하는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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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를 리뷰해주세요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윤용인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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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서 왜 변기커버를 내리지 않는거야?" "왜 치약은 중간을 꾹 눌러서 짜는 거야?" "왜 도대체 남자라는 동물들은 저러는 거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통 이해할 수 없는게 세상에 남자라는 사람들의 심리야...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자에 대한 생각들일 것이다. 물론 남자 입장에선 "왜 여자들은 저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걸까?"라고 꺄우뚱 할 것이다. 결론은 남자라는 종과 여자라는 종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정확히는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가 수적으로 거의 반반이라는 공평한 생물학적 지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물론 역사기술이전의 선사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지위가 남성보다 우월했다는둥 하는 좀더 깊은 담론적인 논거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반복의 역사는 지금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오스탈로피테쿠스를 기원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지구상 가장 악랄하고 영학한 종이 인간이고 그 중에서도 상호 보완적 관계보다는 이율 배반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종의 진화를 거듭한 불편한 관계가 바로 남성과 여성일 것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은 뇌의 용량 진화에 힘입어 도구, 언어, 제도,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지구상 생명체의 가장 으뜸인 자리까지 진출했고 이제 그 지위를 공공히 하기 위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도 시도한적도 없고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 같은 종에 대한 학살과 억압을 자행하고 있다. 비록 문명과 계몽 그리고 근대화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러한 억압은 표나지 않게 사라졌지만 이제 배려라는 가식하에 무시로서 상대의 성을 대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것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이 유독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성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손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이 단순한 원리를 상대방의 성만 제외하고는 다 적용해서 파악했던 인간이 유독 같은 종에 대해선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상대방을 통해서 너무나 비슷하고 보기 싫은 나를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정체성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생물학적 구조도 상이하고 그런 생물학적 뼈대에 자리잡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단지 이러한 차이점을 상식적으로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는 것이 힘든 것은 다름아닌 상대를 경쟁상대 내지는 불편한 동료관계로 파악하는 역사시대이전에 자리잡고 있었던 뿌리깊은 경계심의 발현은 아닌가 싶다.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는 지구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동안 역사시대를 주도했다고 곡해하고 있는 남자들에 대한 심리 보고서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이 책 한권으로 남자라는 종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같은 남자인 남자가 읽어봐도 어쩜 그렇게 남자의 심리를 잘 표현했나 할 정도로 남자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세상은 결국 남자와 여자가 싫던 좋던 간에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상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이해가 있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상대를 모르고(그것도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대방) 이해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생각 하는 그 자체가 넌센스인 세상인 것이다. 어차피 한 세상살다가 존재라면 상대를 이해하면 할수록 득이 되는거지 실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남성과 여성, 두성의 경쟁구도가 아닌 생의 반려자로서의 인내심과 이해심이 필요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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