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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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 개봉한 한국영화 <해운대>를 보면 자연재해에 노출된 우리 인간의 한없이 나약하고 오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의 지배자인양 살아오면서 수 없이 많은 자연상태를 고갈시켜왔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그 오만함은 가히 극치를 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매번 이렇게 자긍심 강한 인간들에게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물론 자연은 아무런 예고 없이 무자비하게 들이치지는 않는다. 자연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메세지를 전하지만 한껏 기고만장 해진 인간들은 그런 자연의 재해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자연재해는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도 그 피해가 막심한 것이다. 하물며 자연재해를 그저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했던 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운명의 날>은 1755년 11월 1일 당시 세계 곳곳을 지배했던 해양 제국인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을 강타한 전무후무한 대지진으로 인한 리스본의 운명을 다룬 책이다. 만성절인 그날 오전 9시를 넘긴 시간에 들이닥친 지진으로 인해 리스본은 그야말로 성경의 요한 계시록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비귀환 그 자체였다. 왕궁과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 그리고 하느님의 안식처인 성당을 비롯한 수도원, 일반 백성들의 집들까지 순차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지진 이후 2차적으로 들이 닥치는 화재는 그나마 남아있는 잔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버렸다. 대략 이날의 재앙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도시인구의 20%이상으로 추측될 정도로 처참했다. 지진의 특성상 단 3분이라는 시간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육지는 지진과 화재로 붕괴되었고 바다에서는 그 후폭풍으로 3미터이상 높이의 쓰나미가 강타하여 해양제국을 과시하던 포르투칼의 심장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지금기준으로 대략 진도 9정도로 예상되는 리스본 대지진은 이렇게 당시 최고의 문명이라고 자부하던 리스본을 무장해제 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인류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던 리스본 대지진은 또 다른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왔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운명의 날은 지진으로 그동안 최고의 자리를 누려왔던 리스본과 포르투칼에게 몰락의 날이었지만 새로운 변혁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주사조인 계몽주의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바티칸보다 더 카톨릭국가였던 포르투칼에는 정말 운명의 날이었다. 포르투칼은 항해술의 발달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식민지에서 들여온 엄청난 양의 황금으로 인해 그동안 내수산업은 거의 기반이 사라지고 소비재를 주종으로 하는 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사실상의 식량수입이 없으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산업구조를 가진 국가였다. 그나마 리스본의 영광을 명맥한 것은 다름 아닌 식민지의 수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카톨릭이라는 종교에 더 집착하게 되고 신정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폐지된 종교재판이 성황을 이루고 종교인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실과 일부 사제층과 귀족에게는 천국같은 나라였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시대를 거역한 포르투칼은 리스본의 대지진으로 인해 운명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그 개혁의 중심에는 주제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수상 카르발류가 있었다. 대지진 직후 리스본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시기에 카르발류는 일대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외형적으로 도시전체에 대한 재개발을 착수함과 동시에 그동안 정치 깊숙히 관여했던 종교인들의 권력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수산업의 부활을 기획하고 진행시켜 나간다. 물론 개혁의 와중에 종교계의 거두인 말라그리다의 저항은 강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그동안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일부 귀족층을 반역협의로 몰아 일대 정치개혁을 단행하면서 서서히 리스본은 대지진의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침내 리스본 도시계획이 완성되면서 리스본의 새로운 계몽의 시대에 부합하는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주제1세의 사망과 그동안 억눌려왔던 반동보수주의의 대두로 인해 카르발류는 실각하게 되고 그가 추진했던 모든 개혁은 백지화되면서 카르발류의 죽음과 동시에 리스본은 또 다시 중세의 암흑으로 회귀하게 된다. 

<운명의 날>은 비록 역사적 자연재해를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포루투칼의 전반적인 역사를 동시에 고찰하고 있다. 역사는 일대의 충격으로 그 터닝포인트를 잡아가는 경우가 왕왕있다. 특히 리스본의 대재앙은 그동안 포르투칼이 가지고 있었던 각종 패악에 대한 일대 개혁의 단초가 되었고 카르발류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나마 그가 있어기에 지금의 리스본이라는 도시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카르발류의 정책은 자연재해로 인한 복구의 귀감으로 남게 된다. 운명의 날은 자연과 인간의 처절한 사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계몽과 신권과의 한판승부였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카르발류는 자연을 극복했고 종교를 극복한 위대한 정치개혁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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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2 - 묵시록의 참극을 넘어서는 한반도의 위기와 최후의 선택
김형균 지음 / 휴먼드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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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원 소장이자 재야 사학자인 김종서 박사는 그의 저서 <한사군의 실제 위치 연구>에서 중국정부의 체계적인 역사왜곡의 근본적인 이유를 피력한 바 있다. 물론 강단사학계나 일반 독자들에게 다소 엉뚱한 주장으로만 치부 되었지만 김박사의 주장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라는 소설의 모티브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면서 다시 한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려의 감정을 지울 수 없다. 김종서 박사의 주장은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등 현 중국의 영토내 명멸햇던 모든 국가들의 역사를 중국변경의 역사로 인식하여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대한민국의 따가운 눈초리를 무시하면서도 강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한반도가 통일되어 단일 국가로 탄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옛고구려나 발해 땅의 자국 영토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비록 이번 소설 최후의 심판 줄거리와는 차이가 나지만 큰 맥은 비슷한 주장과 설정인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병사와 남북정상회담을 코앞에 눈 시점에서 발생한 군부구테타로 인해 남북의 정세를 급격히 냉각되고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전직 대통령의 암살과 하나회라는 전쟁광들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북진무력통일 전략은 결국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고 서울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발포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주인공인 김철수기자와 유일한 전의원의 목숨을 건 애국행위로 인해 하나회라는 정체가 탄로나면서 한반도는 전쟁일촉즉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번 소설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끔 하는 소설이다. 또한 대한민국과 한민족이라는 정통성의 문제에서 고구려를 정통성으로 보느냐 신라를 정통성으로 보는냐에 따른 시각적인 차이가 어마 어마하는점 또한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예로 부터 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자리잡게 된 우리역사와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야욕을 비록 소설의 형태이지만 충분히 실현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또 한번 대한민국과 한민족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는 소설이다. 

현재 핵개발을 무기화한 북한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주변 당사자국들의 이해타산이 과연 어떠한 형태로 그 결말을 이끌어 낼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결국 잘못된 선택의 혹독한 댓가는 오로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지금의 어려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핵의 슬기로운 해법만이 한반도내에서의 전쟁야욕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임을 인식해야 하겠다. 사실상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당사국들의 한반도내의 통일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고 바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한민족인 남과 북이 이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분단이라는 아픔을 안고 지내온지도 벌써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렸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한민족일 것이다. 비록 소설의 시나리오이지만 시간이 흘러 소설속의 인물들 처럼 생각하는 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겠는가?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속에 담겨져 있는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남측뿐만 아니라 한민족 전체가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출발에서 한반도 통일의 공통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정말 상상하기도 싫고 설령 일어나서도 안되는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대적인 외교관계로 치닫는다면 왠지 발생할 수 도 있지 않을까라는 불길한 생각을 들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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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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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훌쭉한 배낭>은 체가 쿠바혁명을 어느 정도 완성하고 또 다시 민중해방을 위하여 1965년 콩고에서 활동에서 1967년 볼리비아에서 생포되어 죽음을 당하기전 까지 그의 단출한 배당속에 남겨진 마지막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한권의 색바랜 녹색 노트속에 담겨져 있는 시의 필사본에 관련된 공개되지 않는 체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일반대중에게 알려진 체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기획인 것 같다. 그동안 체의 이미지는 사실상 일반대중이나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에게 상당히 강렬하게 인식 되어왔다. 

혁명가라는 대의적인 담론으로 인해 체의 개인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행보에 보다 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어 왔고 항상 혁명과 민중해방이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체를 인식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체가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순탄하고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를 의대시절 그의 친구인 알베르토와 그리고 그의 애마인 포데로사로 남미전역을 횡단하면서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느낀 인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면서 극적인 심적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정설로 남아있다.  

하지만 체의 혁명가적 삶의 근원적인 태동이 사실은 어린시절에서 부터 기원했다는 반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또다른 논거이다. 어린시절부터 반정부적이고 민중적인 시인들의 시을 유달리 좋아했던 체에게는 어쩌면 그 때부터 혁명가적 사상이 머리속에 조금씩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쿠바 혁명기간은 물론이고 콩고와 체포되기전 볼리비아의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속에서도 이들 시를 사랑했고 항상 이들 시와 함께 했다는 점에서 체에게 시는 또 다른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특히 체에게는 이러한 시들이 혁명의 정당성 내지는 필요성과 민중들의 고난을 감싸안는 뜨거운 심장을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체가 좋아했던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파블로 네루다, 레온 펠리뻬은 당시 미국이 재편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온몸으로 거부한 대표적인 시인들이었다. 체에게 이들의 시는 한줄기 빛과 같은 역활을 하면서 자신의 혁명전선에 위안과 힘을 실어준 동기가 되었다. 체가 얼마나 시를 사랑했는가는 그의 죽임 당시 발견된 초라한 배낭속에 들어있었던 이들 시인들의 시를 필사한 빛바랜 노트하나 말해준다.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게릴라전투중에서도 체는 이들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민중해방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희망을 굽히지 않았다. 

체가 사망한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지만 오히려 그의 생전보다 오히려 더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인종과 민족, 이데올로기를 넘어 체라는한 인간의 순수한 모습에 대한 애증의 반증일 것이다. 혁명이란 말과 행동이 일치할때 그 정당성과 당위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체는 그의 말에 대한 책임을 실천으로 옮긴 인물이다. 또한 쿠바혁명 성공이후 보장된 제2인자라는 후광을 훌훌털어버리고 새로운 민중해방을 위해서 콩고로 향했고 다시 마지막 항전이 된 볼리비아로 향했던 것이다. 체의 노트에 필사된 시들을 시간적으로 추적해 가면 마치 체 자신의 삶의 괘적을 보여주는 듯하다. 체는 이들 시를 통해서 자신 삶의 투영된 또 다른 모습을 봤을 것이다.  

진정한 혁명가는 인종적, 이론적 구분이 없다. 근대 일제감정기의 김산이 그랬던 것처럼 체 역시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그 어떠한 곳이든간에 달려갔다. 그리고 체의 머리는 완벽한 혁명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시와 인민을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아주 평범한 인격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체에게는 아직 혁명은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체의 이미지를 막연하게 상업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왠지 씁슬하게만 다가와서 더 그가 그리워 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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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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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서평을 적어나가기 힘든 책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현상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가 극도로 큰 책이기때문에 글로 표현하기가 이만저만 힘든 책이다. 글을 쓰다고 지우기를 몇번을 반복해야 할 만큼 아직까지 감정의 골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2009년 5월 23일은 한국현대사에 잊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날이다. 새벽부터 날아든 믿기지 않는 비보는 그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사람이나 그의 반대편에서 그를 궁지로 몰고간 이들에게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전반에 깔려있는 불신과 민주주의의 후진성 그 자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노전대통령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보이다. 바보의 내력은 3당통합의 반대에서 부터 시작된 그의 시련은 향후 벌어지는 각종 선거에서 정말 바보처럼 우직한 행보로 인해 측인지심까지 불러 일으키게 한 그의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재임기간내내 이 바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리가 흔히 한사람을 바보라 칭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사고적인 결핍을 보이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사용한다. 그 판단기준은 흔히들 말하는 보통의 사람기준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기준에서 보면 그는 정말 바보가 맞을 수 있다. 그래서 바보들은 세상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4.19의 이념을 계승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런 이념들을 위해서 한평생을 살아간 이들을 바보 취급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바보들은 보통사람들에 비해서 용감하다 그래서 바보인지도 모른다. 바보들은 보통사람에 비해서 이것 저것 속으로 저울질 못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 맞다면 기름통을 들고 불속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바보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런 바보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통쾌하게 생각하기도 하면서 막상 우리 자신이 그런 현상에 직면하게 되면 슬그머니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바보는 외롭고 힘들다. 왜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니까...
노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시청앞과 봉하마을을 비롯한 전국의 분향소에 500만이라는 인파가 애도의 행진을 하고 눈물을 흘린 이면엔 바로 이런 바보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감추고 싶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는 영악한 사람들이다. 나는 못하겠고 바보인 당신이 해라. 바로 이런 생각이 바보를 죽음으로 몰고간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참여정부의 탄생 그자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건국 이후 대접받지 못한 바보가 큰일을 냈기 때문이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이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나 어리둥절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있을수 없는 일이 일어 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바보를 향한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보를 바보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보를 마치 만능의 신처럼 생각하고 바라고 기대하는게 많아지면서 곳곳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의 존재자체를 부정해 버렸던 것이다. 역시 바보는 바보이다라고...

그가 우리와 작별한지 대략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짧은 그동안의 시간동안 노무현에 대한 각종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마치 사람은 죽어야 제대로된 평가를 받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에 대한 인생역정에서 정치적인 소신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서적들이 서점의 가판대를 가득메우고 있다. 아마도 그가 살아생전 받았던 그 어떠한 평가보다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그래서 바보는 고구려의 온달처럼 죽어야만 대접을 받는게 이놈의 세상 이치인 것이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인 오현호가 퇴임 막바지 시기인 2007년에 청와대에서 노전대통령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아마도 오현호대표는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집중적으로 노전대통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행운아닌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자신도 밝혀듯이 인터뷰 당시엔 발견하지 못한 노전대통령에 대한 생각들이 막상 그의 죽음앞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수긍가는 내용으로 다가왔듯이 우리에게도 노전대통령의 사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은 노전대통령의 미완의 정치학 강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권력의 원천을 제대로 선 시민에서 찾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고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그 동안 현실과는 괴리된 개념이었고 이때까지 대한민국의 그 어떠한 정치권력자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니 그런 발상자체를 거부했던 시민권력에 대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시민권력의 힘은 역사적으로도 보아왔듯이 혁명적인 개념이자 사고의 방식자체를 뛰어넘는 거대한 담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부각받는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권력이라는 것은 제도적인 틀속에서 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 역량을 표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틀이 권력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퇴색해버리고 권력보다 제도가 마치 본질인양 인식되면서 권력의 창출기반이 시민들의 위치는 위태로워 진것 또한 사실이다. 노전대통령은 이러한 권력의 흐름과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의 마지막 희망을 바로 선 시민에서 찾고자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극히 위험한 발상자체가 거대한 제도권내의 권력위임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수 밖에 없었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입에 발린 공허한 주장으로만 와닿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우리곁을 떠나고서야 서서히 그의 생각에 대해서 하나둘씩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진정한 권력을 찾기 위한 대안에 대해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노전대통령은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자유분방했던 어록이나 행동이 아닌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고 실천해 나갈 생각도 못했던 그의 정치관이 우리들의 뇌리속에 영원히 남았있는 한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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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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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생텍쥐페리가 한창 전세계가 전쟁의 불구덩이속으로 몰입했던 1943년에 발표한 동화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통해서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가치관 훼손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깊은 의미를 던져 주었다. 어린왕자의 순수한 감성을 통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류의 마음의 상처를 씻고져 하였던 것이다. 

<어린왕자의 귀환>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지금의 시대에 다시 돌아 왔을때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1940년대의 어린왕자는 전쟁과 더불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인간성을 회복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 라는 발상자체가 재미있다.

산업혁명과 세계양차대전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스페인의 무적의 함대처럼 앞으로만 질주했다. 비록 중간에 세계 대공항이라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큰 암초를 만나 자본주의라는 배는 침몰하는 듯 보였으나 갑자기 나타난 존 메너이드 케이스라는 조타수에 의해 극적인 침몰의 위기를 벗어나고 다시 순탄한 항해를 시작했던 것이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인플레이션과 경기하락을 동반한 스태그플레이션의 대두로 자본주의는 새로운 조타수를 찾게 되었고 그 역활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하게된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한 시장을 배경으로 탄생한 신자유주의라는 사조는 다 알다시피 정부간섭의 최소화와 시장논리의 극대화를 통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효과를 최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장을 펼쳐 주는 것이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신자유주의는 날개를 단격이 되면서 그야말로 경제논리에서 바이블같은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비록 21세기에 들어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로 주춤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위세가 건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 중에서 가장 빠른 시일내에 전세계인의 뇌리속에 자리잡은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종교적인 힘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옥죄우고 있다. 종교가 형이상학적인 면이라면 신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신자유주의의 피해는 일반서민들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물론 신자유주의 가장 큰피해자는 노동가계급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떠나서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노동자계급의 한계는 어쩔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어린왕자가 원작의 내용처럼 군주(정부)의 별, 기업가(자본기업)의 별, 근로자의 별을 여행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실상에 대해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다. 별들의 여행하면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진실을 소상하면서 쉽게 설명해 준다.결국 어린왕자는 신자유주의속에서는 노동자나 기업가나 다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문제는 바로 다름아닌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 자체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해 탄생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은 지리적 시간적 구변이 없는 전세계가 하난의 시장으로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시스템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 그동안 자본주의에 많은 도전자들이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창출한 이 시스템이 결국 우리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막연히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그동안의 노력이 허탈해 보인다.
통제가능한 제도만이 인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섭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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