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떡붕어 아저씨는 T시를 완전히 버렸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고 실은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참에 떡붕어 아저씨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놀고먹는 삶을 마음껏 탐닉했다. 한 번 낚시를 나가면 몇 박 몇 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주로 빈손이었다. 낚시도 하지 않을 때는 만화방에 둥지를 틀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책장 곳곳까지 밴 담배냄새, 공기에 스민 눅눅한 곰팡내가 떡붕어 아저씨 몸의 톱밥 냄새를 조금씩 지워버렸다. 피시방 컴퓨터 앞에서도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오락에 몰입했다.

 

각종 아이템은 금괴와 동일시됐고 그 자신은 그가 조종하는 캐릭터와 한 몸이 됐다. 컵라면 용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재떨이가 꽁초로 가득 찼다. 용을 무찔러 성을 탈환하려면 목구멍과 폐를 온통 니코틴과 타르로 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그 무렵 그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일주일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오락만 하다가 조용히,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는 지하 피시방의 음습한 공기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듯 얼른 내빼버렸다. 그 뒤로 그는 방에 칩거해버렸다.

 

소영이가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라, 오늘도 안 나갔어?”

떡붕어 아저씨는 슬슬 몸을 일으켰다. 사지를 추스르는 것조차 귀찮다는 투였다. 하품을 쩍쩍 했지만 그 하품마저도 성가신 것 같았다.

아저씨, 나 아저씨 이렇게 사는 거 정말 싫거든! 아저씨 세수도 안 했지? 양치질은? 뭐야, 정말?! 이빨 닦는 법 몰라? 내가 가르쳐줘, ?”

소영이는 잔소리 많은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오지 않았다.

 

열흘 정도가 지났을 때 소영이는 마녀를 찾아갔다.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개가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녀는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있고 배가 불룩 솟아난 것 같았다. 소영이는 그녀의 뱃속에 새로운 고양이가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언제 태어나, 그 고양이는?”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시치미 떼지 마. 아줌마 배 말이야!”

어라, 이건 그냥 똥배야.”

에이, 무슨 똥배가 그렇게 커? 뱃속에 커다란 혹이 생긴 것 같은데?”

설마?”

아줌마, 아저씨가 사라졌어. 찾으러 가야겠어. 같이 가줄래?”

마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가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쥐가 나는 모양이었다. 개는 덩치에 맞지 않게, 참 품위 없게 네 다리를 비틀며 제 자리에서 준비운동을 했다. 달릴 준비가 된 개는 소영이를 등에 태웠다. 소영이는 의아해하며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녀는 개의 꼬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개를 몰았다.

 

마녀와 소영이는 명동이 즐비한 동네를 구석구석 다 돌았다. 어디에서도 떡붕어 아저씨는 찾을 수 없었다. 지친 그들이 <장보고 명동>을 지나칠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했다. 마녀는 장이나 봐야겠다며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졸지에 개의 등은 장바구니로 가득 찼다. 그들 일행은 두부 공장 옆을 지나갔다. 삶은 콩과 막 쪄낸 두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장 앞의 개는 몰려드는 길 고양이들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여차하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두부 공장과 벽을 맞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건물 벽에는 쇳물과 땟물이 화석처럼, 돌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누추하고 번잡한 세간들이 보였다. 현관문은 대개 다 열려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장독들이 있었고, 벽을 따라 화분대용으로 쓰는 두툼한 물통이 보였다. 그곳에도 자잘한 모종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풀들은 벌써 꽃을 활짝 피웠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앞두고 아이들은 마당을 이리저리 오가며 뛰어놀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곳을 벗어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불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부터 모텔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모텔은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이른 저녁부터 화려한 불꽃을 피웠다.

 

어라, 빗방울 떨어진다!”

어스름이 내린 시멘트 길을 걷고 있던 소영이가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호텔 바이올렛>, <호텔 수>, <목화장> 등을 막 지나왔을 때였다. 그리로 향하던 늙은 연인들은 깜짝 놀라며 부질없이 고개를, 몸을 숙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참, 아줌마 마녀잖아? 우산 좀 만들어 봐, ?”

마법은 그런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고도 마녀는 뭐라고 더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랑비인가 싶었는데 빗줄기가 금세 굵어진 탓이었다. 몇 걸음도 떼지 않아 우박이 떨어지고 천둥번개가 쳤다. 첫 번째 천둥에 소영이는 비명을 지르며 마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두 번째 천둥이 치자, 더욱이 번개마저 번쩍하며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자,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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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오후, 특수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명동만두분식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물만두, 찐만두, 군만두, 만둣국 등 온갖 만두가 다 있었다. 심지어 떡볶이와 라볶이에 튀긴 만두를 넣은 만두 볶이도 있었다. 콩나물을 넣은, 매콤하고도 달콤한 쫄면도 아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오늘도 아이들은 만두 접시를 눈앞에 두고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군만두 하나를 남겨놓고서 소영이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굴까? 돈 많은 사람? 힘 센 사람?”

아름이가 만두 볶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키는 크고 얼굴은 조그맣고 무진장 예쁜 사람!”

아니야! 배가 무진장 커서 하루에 네 끼, 다섯 끼, 아니 열 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야. 세상에는 맛있는 게 정말 많거든.”

그건 맞아.”

은학이가 소박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름이가 얼른 대꾸했다.

, 그럼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아저씨는 배 크잖아?”

아무리 배가 커도 하루에 열 끼는 못 먹어, 헤헤.”

이 말에 아름이는 소영이가 남긴 군만두를 냉큼 집었다.

 

그 때 태형이가 명동만두분식 앞을 지나갔다. 아름이가 식당이 떠나갈 새라 큰 소리로 외쳤다.

, 꽃남!”

태형이는 흠칫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섰다. 6학년이 되면서 마냥 계집애처럼 예쁘장하고 귀엽던 태형이는 서서히 사내다운 틀을 갖추어갔다. 누구의 눈에나 예비 미남으로 보일 법한 이목구비였다.

은학이와 소영이가 꽃남을 보기 위해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뒤로 돌렸다. 둘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태형이었구나! 뭐해? 같이 먹자! 얼른 들어와!”

심지어 소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 순간, 태형이 머릿속에선 누나, 미워!” “형도 미워!”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들이 미웠다. 그들과 함께 했던 바보로서의 시간이 미웠다. 특수반에 가지 않아도 된 이후로 태형이는 이들을 슬슬 피했다. 그것은 한 번 부서지거나 뽑힌 이빨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절대 다시 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과 거의 비슷했다.

학원 가야 돼요.”

잠깐 머뭇거리다 나온 말이 반말이 아니어서 태형이 스스로도 어색했다.

학원? 무슨 학원? 너 이제 학원도 다녀? 에잇, 아무리 그래도 군만두 먹을 시간도 없어?”

 

소영이의 물음에 태형이는 말을 얼버무리며 얼른 사라졌다. 만두 한 접시에 열광하는 저들이 왠지 촌스럽게 여겨졌다. 인생의 목표를 겨우 군만두 하나에 두는 것은 한심한 일이었다. 태형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것이다. 당장 섬을 떠나지는 못해도, 이 지긋지긋한 섬마을을 벗어나 시내로 가려면 일분일초도 허비해서는 안 됐다. 누나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 자리는 이제 세 살이 된 여동생이 대신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병신처럼 일만 하고서도 늘 남한테 굽실거리며 살았다. 태형이는 자기가 이 가난한 집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어렴풋이 의식했다. 이 책임감으로 자신의 야망을, 또 자기중심적이고 야박한 삶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명동만두분식을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다 시큰둥했다. 그때 신임교장이 분식점 안으로 들어섰다.

, 너희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만두 먹고 막 집에 가는 길입니다.”

은학이는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허, 이 녀석들이! 밥은 집에서 먹어야지! 부모님이 기다실 거 아니냐?”

어라, 언니, 이 할아버지 아까 그 꽃남하고 똑같은 소리 하네.”

요 녀석,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얼른 집에 가지 못해!”

교장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고함을 쳤다. 은학이는 얼른 아름이를 들춰 업었다. 그러곤 소영이 손을 잡고 잽싸게 달아났다. 아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다.

 

교장은 식당의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최근 들어 교장은 회식이 아니더라도 외식을 하는 일이 잦았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아내는 봉사활동, 종교 활동, 문화생활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다. 여성호르몬이 중단되면서 안주인은 그야말로 주인이 되어 살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소비활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했다. 그 바람에 교장은 집에서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것은 노년으로 접어든 암컷과 수컷의 당연한 권력 관계 탓이었다. 그나마 아직은 월급이라도 적잖이 벌어다주지만, 곧 닥칠 연금생활에서 최소한의 존엄성이라도 보장받으려면 지금부터 안주인에게 잘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교장은 이 굴욕적인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곁들어 그는 분식을 좋아했다. 이는 근검절약을 좌우명으로 매사에 궁상을 떠는 교장의 취미이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고 살아왔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그에게 길바닥의 불량식품을 몰래 사먹는 것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그 버릇이 말하자면 이렇게 나타났다. , 교직원들과 학생들 앞에서 늘 근엄하고 진중한 모습이던 그가 다름 아닌 학교 근처의 분식점에서 이렇게 조촐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절대 연출처럼 보이면 안 됐다. 그저 겉보기에 권위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진정 서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하지만 모두에게 마음껏 과시해야 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섬마을 최고의 초등학교 교장의 지위에 오른 자가 허접한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그런데 이 장면의 목격자가 하필 저 바보들이었다니.

 

혀를 차며 그는 메뉴를 하나하나 정성껏 읽었다. 그러곤 평소와 다름없이 떡볶이와 찐만두 한 접시, 얼큰한 속풀이 라면, 야채김밥 한 줄을 시켰다. 음식을 먹으면서 분이네 분식점과 훈이네 분식점을 오가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맛있는 것은 이 음식이 아니라, 심지어 서민인 양 뻐길 수조차 있을 만큼 관대해진(그는 그러노라고 믿었다) 자신의 여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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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신입생 중에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 아름이는 개학 첫날부터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빈틈없이 짜인 시간표에서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이만한 먹잇감이 없었다. 심지어 소영이보다 더 중증에, 따라서 더 흥미로운 존재로 보였다.

 

아이들은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아름이를 괴롭혔다. 금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괴롭힘의 방식도 훨씬 더 정교했다. 호머 파베르의 후예임을 증명하듯 도구까지 준비한 다음 우물 뒤쪽으로 끌고 갔다. 왠지 그냥 쥐어 패는 것은 시시껄렁하고 싱겁다는 생각에 옷을 찢어가며 벗겨야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 가뜩이나 몸가짐이 거칠고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아름이가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지르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의식적으로 더 흥을 냈다. 한 아이는 아름이에게 마구 발길질을 하며 얼굴에 침을 퉤퉤 뱉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어, 아이들은 아름이의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아름이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 되자 아름이의 다리 사이를 탐색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공포의 임계점을 모른 채 점점 더 위험한 쪽으로 치달았다. 그때 은학이가 시커먼 먹구름처럼 아이들 위로 드리워졌다. 아이들은 언제 그토록 용감하게 아름이를 괴롭혔냐는 듯 비굴할 정도로 오그라들었다. 아름이는 온 몸에 가시를 세우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는 또 뭐야?”

은학이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어리둥절해했다. 그 표정이 나름대로 귀여웠는지 아름이는 긴장을 풀었다. 은학이가 자기를 구해줬다는 걸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름이는 옷을 주워 입으며 조잘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뭐냐니까? 아저씨도 선생님이야? 그럼 또 나한테 야단칠 거야, ?”

급기야는 은학이를 쿡쿡 찌르고 꼬집기까지 했다. 언제 비명을 지르고 언제 엉엉 울었냐는 투였다.

잠깐만 좀 있어 봐, 목도리 둘러야지.”

은학이는 나뭇가지에 걸린 채 땅바닥으로 널브러져 있는 목도리를 집어 아름이의 목에 매주었다. 그 동안에도 아름이는 은학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다리를 들어 올려 어깨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큰 곰을 갖고 노는 토끼, 혹은 호랑이를 거느린 고양이 같았다. 꽤 정겨운 풍경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둘은 이내 단짝이 되었다.

 

아름이는 수업 시간에도 소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특수교사가 꾸지람을 하자 버럭 화를 냈다.

에이, 왜 자꾸 시비 걸어? 짜증 나!”

곧장 의자 위로 올라가 방방 뛰더니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죄다 뒤엎어버렸다. 순식간에 교실은 난장판이 됐다. 그때 은학이와 소영이가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름이가 마구 집어던진 물건 중 하나가 은학이의 머리를 툭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은학이는 미처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잠시 뒤 교실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올렸다. 헝겊으로 된 필통이었다. 그제야 은학이는 넋 나간 표정으로 넓적한 이마에 불퉁하게 생겨난 혹을 문질렀다. 아름이는 은학이의 모습에 깔깔대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아저씨랑 언니는 뭐야? 왜 매일 같이 다녀?”

책상 위에 서 있던 아름이는 순식간에 은학이의 어깨에 매달렸다. 은학이는 아름이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얼른 팔을 뒤로 뻗어 아름이의 엉덩이를 받쳤다. 졸지에 은학이 등에 업힌 아름이는 은학이의 등과 머리에 자기 머리를 콩콩 박으며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아름아, 이제 그만 좀 내려오면 안 되냐?”

은학이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지만 이 꼬마 폭군은 막무가내였다. 특수교사까지 나서서 힘을 썼지만, 아름이는 손가락, 발가락을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만들어 은학이의 등에 더 찰싹 들러붙어버렸다. 그런데도 은학이는 감히 아름이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상대가 이 가학적인 놀이에 싫증을 내기만을 기다렸다.

아저씨, 나 저쪽!”

아름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교탁을 가리켰다. 은학이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말없이 교탁으로 걸어가, 아름이가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등을 교탁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아름이를 두 팔로 껴안아 교실바닥에 내려주었다.

나 졸려, 잘 거야. 아저씨 엎드려봐!”

은학이는 이미 교실바닥에 엎드렸고 아름이는 그 등위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곯아떨어졌다. 교실 한 쪽에 조용히 앉아 뜨개질을 하던 보조교사가 기어코 터져버렸다.

저런, 저런 사탄이!”

심지어 성호마저 그었다. 뒤에는 연이어 아멘이 따라 나왔다. 특수교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 딱히 동조도,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은학이는 싸늘한 교실바닥에 배를 깐 채 거북이처럼 버티고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순정파가 된 것이다.

 

아름이의 모습을 보자 소영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혼자서 높임말을 연습해보았다. 혓바닥이 미끈미끈하고 입에 낯선 음식을 문 것처럼 어색했다. 왠지 씹을수록 더 이상한 맛이 나서 절대로 삼켜지지 않는, 결국엔 잘근잘근 씹은 채로 뱉어내고 마는 그런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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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경례도 부활했다. 때문에 수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쉬는 시간에도 좀처럼 뛰어놀 수 없었다. 공을 차다가도 종소리가 들리면 얼음망치가 시작됐다. 다들 꽁꽁 얼어붙어 동작 그만을 해야 했다. 만화영화를 볼 시간도 없었다. 숙제의 양이 배로 불어났고 모의고사도 생겼다. 중고등학생이나 보는 줄 알았던 이 기괴한 시험을 준비하느라 아이들은 연일 교과서와 참고서를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학부형들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점차 이 새로운 체계에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시내와 항구 주변의 명문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경쟁하려면 신임 교장의 지시를 열심히 따를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수록 그들이 교사에게 갖는 불만도 커졌다. 교사들은 못마땅한 듯 쑥덕대면서도 자기 반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전부 신임 교장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쓰레기 종량제처럼 외부에서 침입해온, 보이지 않는 시간의 폭력 같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교장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의 소산이라고 믿었다. 이제 세계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자기가 천지를 새로이 창조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망상을 모두가 공유해야 했다.

 

신임 교장의 눈에 특수반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조만간 명문초등학교로 등극할 학교에 바보반이라니! 올해 입학한 아이들 중에도 바보가 있어 그는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통합 교육이라는 취지에는 동참하는 입장을 취하는 척하되, 바보들이 면학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제일 먼저 처단해야 할 대상은 은학이였다. 이런 바보가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교장은 은학이에게서 일단 학생권’(이런 말이 가능하다면)을 박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마냥 내쫓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은학이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이제 그가 없으면 우물이 있는 학교 전체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판이었다. 결국 교장은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 사업에 은학이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학급도 따로 배정해주지 않아 은학이는 아예 특수반으로 등교했다.

 

*

 

전국고사 준비를 하느라 학교 전체가 근엄한 침묵에 빠졌다. 때문에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두툼한 장갑을 낀 은학이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모르타르를 바르고 그것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얼른 벽돌 한 장을 위에 얹었다. 모든 벽돌은 눈에 뜨일 듯 말 듯 비스듬하게 얹혔다. 그 옆이나 위에 쌓이는 벽들은 각도를 맞추느라 역시나 미세하게 비뚜름한 모양새가 되었다.

 

창턱까지 벽돌을 쌓자 은학이는 공사 현장에 쌓아 놓은 모래를 갖고 놀았다. 이곳은 아이들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다 오는 아이들도 은학이를 놀리지 않았다. 은학이는 혼자 모래를 긁어모아 성을 쌓았다가 조심스레 허물어뜨리곤 했다. 간혹 소영이가 나타나, 한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투정 섞인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에이, 오빠, 또 모래장난이야? 그렇게 허물어 버릴 거, 왜 자꾸 쌓는 거야?”

 

친근한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영이의 얼굴에도 서글픔이 깃들기 시작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 처음 발을 디딜 때와 같은 촌스럽고 애처로운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가방이 좀 더 커지고 물체 주머니와 스케치북 가방이 덤으로 붙었다. 그럼에도 소영이는 여전히 높임말을 쓸 줄 몰랐다. 그저 턱없이 커져 버린 몸, 느닷없이 붙어버린 나이와 학년이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구구단 암기는 은학이의 영원한 과제였다. 마의 7단을 넘는 데는 무려 네 번의 방학을 보내야 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고지가 저기였다. 스무 살을 넘겼을 때 은학이는 오직 9단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한데 이 9단이 문제였다. 초장부터 턱턱 막혔고, 절반도 가지 못하고 방학이 와 버렸다. 다음 학기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고, 방학과 더불어 모든 것이 망각되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러지도 몰랐다. 9단을 끝내면 정녕 학교를 떠나야 되니까.

 

선생님, 구구단에는 왜 10단이 없습니까?”

아참, 선생님, 1단은 외운 기억이 없죠?”

왜 항상 9까지 곱해야 되는 겁니까? 8까지만 곱하면 안 될까요?”

 

이런 질문들만 튀어나왔다. 특수교사는 피타고라스와 십진법의 연원까지 들먹이며 은학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9단 암기는 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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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다슬기 할매 보러 갈까?”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소영이를 바라만 봤다. 소영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밝아졌다.

다슬기 할매도 이제 없구나. 그럼 강 보러 가자, ?”

 

강으로 가는 길에는 호텔과 음식점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장까지 생겼다. 강가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것은 꼭 수백 년 전부터 거기 있었던 양 의기양양, 자신만만했다. 소영이는 바리케이드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안내원이 다가왔다.

 

입장료 내셔야죠.”

그게 뭐야? 여긴 내 놀이터란 말이야. 내 마음대로 들어가도 돼.”

소영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안내원은 황당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말투며 표정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데 몸집은 아무래도 중학생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안내원은 떡붕어 아저씨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따님인지 조카인지 하여간 초등학생이면 2500원이고요, 중학생이면 3000원입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와 소영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어쩔래? 들어가 볼래?”

미쳤어? 자기 놀이터에 돈 내고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집에 가!”

소영이는 다시 말이 많아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발음도 또렷해졌다.

 

*

 

불과 이틀을 떠나 있었건만 그들이 발을 내디딘 섬은 완전히 딴판이 돼 있었다. J항 근처에는 거대한 조선소가 세워졌다. 그곳만이 아니었다. 이 섬의 주요 항구에는 모두 조선소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내부에도 크게 두 계급이 있었다. 하나, 한 시절 나름대로 꿈이 있었을 테지만 인생이 어찌 꼬여 그야말로 막장인 자들. ,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발령을 받은, 삶이 꿈을 배반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자들.

 

이것에 맞추어 각기 다른 풍경의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항구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왔다. 젊은 부부들이 그곳에 집을 얻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정원이 조성되고 아이들은 그 주변의 학원을 오갔다. 조그맣지만 단정한 스포츠센터도 들어와 헬스, 요가, 스쿼시 등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면,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원룸들이 기왕지사 있던 낡은 집들과 뒤섞이며 얄궂은 모습이 됐다. 그곳이 바로 우물이 있는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근처에는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명동을 간판에 내걸고 수식어를 하나씩 붙였다. 명동 세탁소(명품 의류만 취급), 명동 만두분식(최고의 분식점), 명동 천원마트(없는 게 없습니다), 명동 두부(직접 만들어 팝니다), 장보고 명동(명동은 장보고가 접수한다), 명동 반찬(주문 요리 가능), 명동 어묵(직접 만들어 팝니다), 명동 수선(맞춘 옷처럼!), 명동 만화방(동네 유일의 휴식소), 명동 피시방(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피시방) 등등. 실제로 이들의 광고는 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가령, 명동 세탁소는 진정 브랜드가 있는 의류만 취급했으며 나름 고소득 전문직을 자처하며 주말에는 어김없이 쉬었다. 명동 만두분식은 이 동네 최고의 분식점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유일했기 때문이다. 또 명동 천원마트에는 정말 없는 게 없어, 천원이 넘어가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명동 두부는 진정 손 두부로 유명하여, 후줄근한 삼 층짜리 주택을 두부 공장으로 개조하여 운영했다. 그 곁을 지날 때는 노란 콩을 삶거나 두부를 찌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때문에 그 주변에는 항상 길고양이들이 포진해 있었고, 또 그 때문에 커다랗고 똑똑한 개 한 마리가 파수꾼 노릇을 했다.

 

명동 만화방과 명동 피시방은 정녕 최고의 휴식 공간이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곳을 저렴한 숙박업소로 이용했다. 김치와 단무지를 곁들인 라면과 김밥도 팔았다. 때문에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할인된 티켓을 끊어놓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굶어죽는 일은 없었지만 오락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과로사하는 일은 더러 있었다.

 

인구가 많아지자 쓰레기의 양이 증가했다. 분리수거가 시작되면서 종량제 봉투도 나왔다. 쓰레기를 잘못 버려, 경고장을 받는 사람도 생겨났다. 혹자는 귤껍질을 전부 일반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바람에 벌금 5만원을 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옆에서 태어나 95년을 여기서 살아온 김점순 할머니는 울상이 됐다. 숨을 쉴 때마다 매 순간 생겨나는 자잘한 쓰레기를 세 종류로 분류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평생 쓰레기도 맘대로 못 버리는 세상은 처음이야. 너무 오래 살았더니 별 꼴을 다 보네.”

쓰레기 분리수거가 몇 번의 난리보다도 더 큰 사건인 것 같았다.

내 이 놈 때문에 죽겠네, 죽겠어!”

이 말이 씨가 되었다.

 

김점순 할머니는 눈이 다소 멀긴 했지만 여전히 몹시 정정하여 새벽같이 일어나 밭일과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그 부실한 시력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이 일대를 활보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소용 쓰레기봉투에 발이 턱 걸려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하필이면 봉투 중간이 찢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돼지 다리뼈가 삐져나와 있었다. 벽에 부딪친 봉투가 완전히 찢어지면서 쓰레기가 왕창 흘러나왔고, 할머니는 졸지에 쓰레기를 품에 안은 채 엎어진 형국이 됐다.

 

마침 우체부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버렸다. 그 길로 할머니는 몸져누웠다. 140센티미터의 몸을 빳빳이 세운 채 두 발로 걷는 행복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이 마을의 산 역사와 같았던 인물이 사라지자 정녕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 같았다.

 

우체부는 고인의 명복도 빌 겸 업종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새벽 일찍 쓰레기봉투들을 거둬 트럭에 싣고 날랐다. 우편물은 점점 줄었지만 쓰레기의 양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 와중에도 성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성을 떠나 근처의 원룸이나 항구 근처의 아파트로 옮겨갔다. 덕택에 성에는 빈 방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우편물이 끊이지 않았다. 우체부도 성에 들르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다. 수신인이 사라진 우편물을 게으른 문지기는 성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것이 쓰레기가 될 무렵이면 우체부, 아니 청소부가 와서 그것을 싹 거두어갔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도 변화가 왔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하루 25시간 근무, 8일제 근무는 그가 내세운 위대한 철칙이었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가능은 없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조례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있었고, 그때마다 교장은 저런 말을 남발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열중쉬어도 아닌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서 그 설교를 들어야 했다. 지금껏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안 되면 말자”, “불가능은 있다”, “꿈은 꾸는 것이 중요하다”(“고로 잠은 많이 자야한다”) 등을 무의식적인 가치관으로 익혀온 아이들로서는 여간 큰 혼란이 아니었다.

 

공문 형식으로 연일 쏟아지는 각종 지침들은 교사와 학생을 죄다 지치게 만들었다. 다들 새벽별을 보고 학교에 나와 저녁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특수교사는 성 안의 농장을 가꾸며 동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젊은 여교사는 인터넷 쇼핑을 할 수 없었다. 중년 교사는 이듬해 신춘문예에 응모할 소설을 쓰다가, 또 노년 교사는 뭍에 사는 손자에게 편지를 쓰다가 들켜 교장에게 호된 징계를 먹었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의 학력 증진이라는 숭고한 목표 달성에 저해 요소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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