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경례도 부활했다. 때문에 수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쉬는 시간에도 좀처럼 뛰어놀 수 없었다. 공을 차다가도 종소리가 들리면 얼음망치가 시작됐다. 다들 꽁꽁 얼어붙어 동작 그만을 해야 했다. 만화영화를 볼 시간도 없었다. 숙제의 양이 배로 불어났고 모의고사도 생겼다. 중고등학생이나 보는 줄 알았던 이 기괴한 시험을 준비하느라 아이들은 연일 교과서와 참고서를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학부형들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점차 이 새로운 체계에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시내와 항구 주변의 명문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경쟁하려면 신임 교장의 지시를 열심히 따를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수록 그들이 교사에게 갖는 불만도 커졌다. 교사들은 못마땅한 듯 쑥덕대면서도 자기 반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전부 신임 교장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쓰레기 종량제처럼 외부에서 침입해온, 보이지 않는 시간의 폭력 같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교장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의 소산이라고 믿었다. 이제 세계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자기가 천지를 새로이 창조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망상을 모두가 공유해야 했다.

 

신임 교장의 눈에 특수반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조만간 명문초등학교로 등극할 학교에 바보반이라니! 올해 입학한 아이들 중에도 바보가 있어 그는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통합 교육이라는 취지에는 동참하는 입장을 취하는 척하되, 바보들이 면학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제일 먼저 처단해야 할 대상은 은학이였다. 이런 바보가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교장은 은학이에게서 일단 학생권’(이런 말이 가능하다면)을 박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마냥 내쫓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은학이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이제 그가 없으면 우물이 있는 학교 전체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판이었다. 결국 교장은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 사업에 은학이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학급도 따로 배정해주지 않아 은학이는 아예 특수반으로 등교했다.

 

*

 

전국고사 준비를 하느라 학교 전체가 근엄한 침묵에 빠졌다. 때문에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두툼한 장갑을 낀 은학이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모르타르를 바르고 그것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얼른 벽돌 한 장을 위에 얹었다. 모든 벽돌은 눈에 뜨일 듯 말 듯 비스듬하게 얹혔다. 그 옆이나 위에 쌓이는 벽들은 각도를 맞추느라 역시나 미세하게 비뚜름한 모양새가 되었다.

 

창턱까지 벽돌을 쌓자 은학이는 공사 현장에 쌓아 놓은 모래를 갖고 놀았다. 이곳은 아이들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다 오는 아이들도 은학이를 놀리지 않았다. 은학이는 혼자 모래를 긁어모아 성을 쌓았다가 조심스레 허물어뜨리곤 했다. 간혹 소영이가 나타나, 한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투정 섞인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에이, 오빠, 또 모래장난이야? 그렇게 허물어 버릴 거, 왜 자꾸 쌓는 거야?”

 

친근한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영이의 얼굴에도 서글픔이 깃들기 시작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 처음 발을 디딜 때와 같은 촌스럽고 애처로운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가방이 좀 더 커지고 물체 주머니와 스케치북 가방이 덤으로 붙었다. 그럼에도 소영이는 여전히 높임말을 쓸 줄 몰랐다. 그저 턱없이 커져 버린 몸, 느닷없이 붙어버린 나이와 학년이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구구단 암기는 은학이의 영원한 과제였다. 마의 7단을 넘는 데는 무려 네 번의 방학을 보내야 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고지가 저기였다. 스무 살을 넘겼을 때 은학이는 오직 9단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한데 이 9단이 문제였다. 초장부터 턱턱 막혔고, 절반도 가지 못하고 방학이 와 버렸다. 다음 학기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고, 방학과 더불어 모든 것이 망각되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러지도 몰랐다. 9단을 끝내면 정녕 학교를 떠나야 되니까.

 

선생님, 구구단에는 왜 10단이 없습니까?”

아참, 선생님, 1단은 외운 기억이 없죠?”

왜 항상 9까지 곱해야 되는 겁니까? 8까지만 곱하면 안 될까요?”

 

이런 질문들만 튀어나왔다. 특수교사는 피타고라스와 십진법의 연원까지 들먹이며 은학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9단 암기는 더 멀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