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다슬기 할매 보러 갈까?”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소영이를 바라만 봤다. 소영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밝아졌다.

다슬기 할매도 이제 없구나. 그럼 강 보러 가자, ?”

 

강으로 가는 길에는 호텔과 음식점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장까지 생겼다. 강가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것은 꼭 수백 년 전부터 거기 있었던 양 의기양양, 자신만만했다. 소영이는 바리케이드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안내원이 다가왔다.

 

입장료 내셔야죠.”

그게 뭐야? 여긴 내 놀이터란 말이야. 내 마음대로 들어가도 돼.”

소영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안내원은 황당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말투며 표정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데 몸집은 아무래도 중학생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안내원은 떡붕어 아저씨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따님인지 조카인지 하여간 초등학생이면 2500원이고요, 중학생이면 3000원입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와 소영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어쩔래? 들어가 볼래?”

미쳤어? 자기 놀이터에 돈 내고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집에 가!”

소영이는 다시 말이 많아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발음도 또렷해졌다.

 

*

 

불과 이틀을 떠나 있었건만 그들이 발을 내디딘 섬은 완전히 딴판이 돼 있었다. J항 근처에는 거대한 조선소가 세워졌다. 그곳만이 아니었다. 이 섬의 주요 항구에는 모두 조선소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내부에도 크게 두 계급이 있었다. 하나, 한 시절 나름대로 꿈이 있었을 테지만 인생이 어찌 꼬여 그야말로 막장인 자들. ,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발령을 받은, 삶이 꿈을 배반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자들.

 

이것에 맞추어 각기 다른 풍경의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항구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왔다. 젊은 부부들이 그곳에 집을 얻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정원이 조성되고 아이들은 그 주변의 학원을 오갔다. 조그맣지만 단정한 스포츠센터도 들어와 헬스, 요가, 스쿼시 등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면,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원룸들이 기왕지사 있던 낡은 집들과 뒤섞이며 얄궂은 모습이 됐다. 그곳이 바로 우물이 있는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근처에는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명동을 간판에 내걸고 수식어를 하나씩 붙였다. 명동 세탁소(명품 의류만 취급), 명동 만두분식(최고의 분식점), 명동 천원마트(없는 게 없습니다), 명동 두부(직접 만들어 팝니다), 장보고 명동(명동은 장보고가 접수한다), 명동 반찬(주문 요리 가능), 명동 어묵(직접 만들어 팝니다), 명동 수선(맞춘 옷처럼!), 명동 만화방(동네 유일의 휴식소), 명동 피시방(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피시방) 등등. 실제로 이들의 광고는 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가령, 명동 세탁소는 진정 브랜드가 있는 의류만 취급했으며 나름 고소득 전문직을 자처하며 주말에는 어김없이 쉬었다. 명동 만두분식은 이 동네 최고의 분식점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유일했기 때문이다. 또 명동 천원마트에는 정말 없는 게 없어, 천원이 넘어가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명동 두부는 진정 손 두부로 유명하여, 후줄근한 삼 층짜리 주택을 두부 공장으로 개조하여 운영했다. 그 곁을 지날 때는 노란 콩을 삶거나 두부를 찌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때문에 그 주변에는 항상 길고양이들이 포진해 있었고, 또 그 때문에 커다랗고 똑똑한 개 한 마리가 파수꾼 노릇을 했다.

 

명동 만화방과 명동 피시방은 정녕 최고의 휴식 공간이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곳을 저렴한 숙박업소로 이용했다. 김치와 단무지를 곁들인 라면과 김밥도 팔았다. 때문에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할인된 티켓을 끊어놓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굶어죽는 일은 없었지만 오락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과로사하는 일은 더러 있었다.

 

인구가 많아지자 쓰레기의 양이 증가했다. 분리수거가 시작되면서 종량제 봉투도 나왔다. 쓰레기를 잘못 버려, 경고장을 받는 사람도 생겨났다. 혹자는 귤껍질을 전부 일반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바람에 벌금 5만원을 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옆에서 태어나 95년을 여기서 살아온 김점순 할머니는 울상이 됐다. 숨을 쉴 때마다 매 순간 생겨나는 자잘한 쓰레기를 세 종류로 분류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평생 쓰레기도 맘대로 못 버리는 세상은 처음이야. 너무 오래 살았더니 별 꼴을 다 보네.”

쓰레기 분리수거가 몇 번의 난리보다도 더 큰 사건인 것 같았다.

내 이 놈 때문에 죽겠네, 죽겠어!”

이 말이 씨가 되었다.

 

김점순 할머니는 눈이 다소 멀긴 했지만 여전히 몹시 정정하여 새벽같이 일어나 밭일과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그 부실한 시력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이 일대를 활보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소용 쓰레기봉투에 발이 턱 걸려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하필이면 봉투 중간이 찢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돼지 다리뼈가 삐져나와 있었다. 벽에 부딪친 봉투가 완전히 찢어지면서 쓰레기가 왕창 흘러나왔고, 할머니는 졸지에 쓰레기를 품에 안은 채 엎어진 형국이 됐다.

 

마침 우체부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버렸다. 그 길로 할머니는 몸져누웠다. 140센티미터의 몸을 빳빳이 세운 채 두 발로 걷는 행복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이 마을의 산 역사와 같았던 인물이 사라지자 정녕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 같았다.

 

우체부는 고인의 명복도 빌 겸 업종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새벽 일찍 쓰레기봉투들을 거둬 트럭에 싣고 날랐다. 우편물은 점점 줄었지만 쓰레기의 양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 와중에도 성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성을 떠나 근처의 원룸이나 항구 근처의 아파트로 옮겨갔다. 덕택에 성에는 빈 방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우편물이 끊이지 않았다. 우체부도 성에 들르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다. 수신인이 사라진 우편물을 게으른 문지기는 성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것이 쓰레기가 될 무렵이면 우체부, 아니 청소부가 와서 그것을 싹 거두어갔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도 변화가 왔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하루 25시간 근무, 8일제 근무는 그가 내세운 위대한 철칙이었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가능은 없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조례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있었고, 그때마다 교장은 저런 말을 남발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열중쉬어도 아닌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서 그 설교를 들어야 했다. 지금껏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안 되면 말자”, “불가능은 있다”, “꿈은 꾸는 것이 중요하다”(“고로 잠은 많이 자야한다”) 등을 무의식적인 가치관으로 익혀온 아이들로서는 여간 큰 혼란이 아니었다.

 

공문 형식으로 연일 쏟아지는 각종 지침들은 교사와 학생을 죄다 지치게 만들었다. 다들 새벽별을 보고 학교에 나와 저녁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특수교사는 성 안의 농장을 가꾸며 동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젊은 여교사는 인터넷 쇼핑을 할 수 없었다. 중년 교사는 이듬해 신춘문예에 응모할 소설을 쓰다가, 또 노년 교사는 뭍에 사는 손자에게 편지를 쓰다가 들켜 교장에게 호된 징계를 먹었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의 학력 증진이라는 숭고한 목표 달성에 저해 요소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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