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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그후 이야기
진 웹스터 지음, 정현정 옮김 / 거북선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안녕하세요, 원장님.
아니, 샐리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하시죠? 하여간 반갑습니다.
우선 저비스씨와 주디 애보트씨(미안해요, 난 결혼했다고 남편 성을 쓰는 게 싫어요. 아마 주디도 펜던튼 부인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리 애보트가 전화번호부에서 나온 성이라고 해도 말이죠.)가 리페트 원장을 쫓아내고 당신을 존 그리어 홈 고아원 원장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주디가 끔찍히도 싫어하던 F실이 영원히 사라지고, 당신의 소원대로 작은 집 여러 채로 이루어진 고아원을 새로 세울 수 있도록, 존 그리어 홈 고아원에 불이 난 것도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벳시가 토끼를 그린 노란 식당까지 불에 타버린 것은 조금 아쉽지만, 애당초 환기도 잘 안 되고 햇빛은 구경할 수 없는 북쪽 식당이었으니 상관없어요. 무엇보다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고, 알레그라도 무사히 구했을 뿐 아니라, 알레그라는 물론 두 오빠까지 함께 좋은 양부모를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심지어 말썽꾸러기 펀치마저 잘 하면 이대로 입양될 거 같죠?
물론 로빈 맥클레이 선생님이 다친 것까지 잘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덕분에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고백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전화위복이 아닐까요? 당장 맥클레이 댁의 못된 가정부 맥가트 부인을 내보내고 결혼하길 바랍니다. 편애하는 건 안 좋지만, 두 분이 개구장이 새디 케이트를 입양하면 더욱 좋겠어요. 이제 와서 하는 얘긴데 사실 전 고든 해로크씨를 싫어했어요. 미국의 정치인이라니, 아우, 일단 끔찍한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걸요. 그래서 당신이 고든씨와 헤어지고 맥클레이 선생님과 맺어진 것이 더더욱 기뻐요. 주디 부부도 이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에요. 그 두 사람도 저 못지 않게 고든씨를 불신하며 맥클레이씨랑 새로 연결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아마 틀림없이 그랬을 거에요.)
하지만 하나 더 고백하면 전 맥클레이 선생도 좋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의 전부인이 정신병자였고, 딸에게도 유전될까봐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우생학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게 영 마음에 걸렸거든요. 반면 샐리 당신은 교육의 힘을 믿잖아요? 그렇기에 "아이를 버리려는 부모들에게 - 아이들이 세 살이 되기 전에 아이를 버리시오"라는 이야기까지 했던 거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불쌍한 로레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맥클레이 선생 때문에 당신까지 우생학의 신봉자가 된 걸까 싶어 불안해지곤 했답니다. 더군다나 고든 씨에게 카라카크 집안 얘기를 들려줄 땐 정말 섬뜩했어요. "사회는 정신박약자들을 한 곳에 모아 격리시켜야만 해요. 그곳에서 평화롭게 천한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도 갖지 않고요. 그렇게 한 세대나 그 이상이 지나게 되면 정신박약자들은 흔적도 없이 없어지게 될 거예요."라니!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야 의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니, 정신병이나 알콜중독이 정말로 유전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생학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어요. 진 웹스터가 키다리아저씨 속편을 쓴 건 1915년 맞죠? 1901년에 이미 우생학에 근거한 최초의 단종법이 미국의 인디애나 주에서 통과된 뒤니, 이 소설은 우생학을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었겠죠. 웹스터가 이 소설을 쓴 이듬해 딸을 낳고 죽은 건 정말 안 된 일이지만, 그 때문에 우생학과 단종법이 얼마나 악용되었는지 보지 못한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대공황이 미국을 휩쓴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그마치 30개의 주에서 단종법이 실시되었답니다. 그런데 정신지체자, 위험한 살인자, 성폭력범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착증 환자,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 질병이 있는 사람과 타락한 사람들’처럼 대단히 모호한 기준에 속하는 사람들까지도 불임시킬 수 있게 법이 제정된 거에요.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불임수술을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흑인이었다는 것이죠.
즉 단종법은 장애인과 범죄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법률이었을 뿐 아니라, 유색인종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 악법이었답니다. 당시 미국의 우생학회는 미국내의 백인종이 유색인종들보다 우수하며, 그중에서도 북유럽계 백인(Nordic white)이 가장 우수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곤 했으며, 1924년 미정부는 동양계의 이민을 거의 중단시키고 남·동구계 이민을 크게 억제시키는 이민법을 제정하기도 했어요. 결국 우생학이니, 단종법이니 하는 건 유래없는 대공황과 실업난 속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유색인종 이민자들과 더 이상 노예로 부려먹을 수 없게 된 흑인들을 차별하고 '없애기' 위해 발달한 것이랍니다.
1967년에야 비로소 미국내의 모든 주에서 단종법이 사라졌으나, 이때는 이미 6만여 명이 단종수술을 당한 뒤였답니다. 더욱이 미국의 단종법은 독일의 뉘른베르크법 제정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 결과 히틀러는 600만명의 유태인과 유색인종을 학살했어요. 정말 끔찍한 일이죠?
그러니 샐리, 지금이라도 우생학에 대한 생각을 고치길 바랍니다. 물론 현명한 당신이니까 "성격을 멋있게 바꾸어주는 것"처럼 맥클레이 선생의 잘못된 생각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오, 생각보다 편지가 길어졌군요. 비록 100여명의 아이들과 매일같이 씨름해야 하는 당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저 역시 한숨 자고 출근해야 하니 이제 그만 인사할게요. 잘 자요.
* 추신 : 편지가 늦어져서 미안해요. 당신을 알게 된 지 20년 만에 편지를 쓰다니 전 정말 게으르군요. 게다가 엉뚱하게 우울한 얘기를 많이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은 유전 얘기만 꺼내면 화내는 고든씨가 아니잖아요? 요즘 제 관심사가 이런 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음을 당신이라면 이해할 거에요. 다음엔 좀 더 기운나는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또한 당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마음으로 별 다섯개를 함께 보냅니다. 이건 주디에겐 비밀인데요, 전 주디랑 키다리 아저씨의 사랑 이야기보다 당신이 존 그리어 홈 고아원에서 벌이는 소동이 훨씬 더 재밌어요. 존 그리어 홈 고아원을 뒤집고 있는 샐리 맥브라이드 원장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