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걸린 현수막에 따르면 조만간 "내 인생의 노래"라는 공연이 있나 보다.
한때는 매 눈을 자처했지만, 이제는 겨우 1.5밖에 안 되는 시력인지라(이걸 염장으로 아는 사람도 있을 듯)
깨알같은 가수 이름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지만, 콘서트 제목만은 그럴싸하여 마음이 동하는 중이다.
그런데 오늘, 매너리스트님의 "내 인생의 음악"이라는 페이퍼까지 보니 페이퍼가 먼저 동한다.
하긴, 산사모 결성 때부터 이런 페이퍼가 쓰고 싶긴 했다.

<내 인생의 노래>

초등학교 6학년 때.
마지막 어린이날이라고 잔뜩 기대했건만, 나들이도, 선물도, 맛난 음식도 없었다. 아침을 먹다 말고 서러워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뚝.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는 아침 밥상에 기집애가 눈물을 보인다고 혼을 냈고, 꾸역꾸역 억지로 아침을 먹고 설겆이를 끝내고 내 방에 들어가 있자 오빠들이 대체 왜 그러냐고 캐물었다. 아, 그리고 극적인 반전.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선물 사라며 거금 5천원을 주시곤 가게에 나가셨고, 오빠들은 날 달래준다고 손끝조차 못 대게 하던 전축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음반 2개를 골라 직접 틀어보게 했다. 그렇게 해서 들은 노래가 산울림의 '산할아버지'와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난 자상한 오빠들에게 감격하여 어머니께 받은 돈으로 잡지 "보물섬" 하나만 달랑 사고, 남은 돈과 저금통에 있던 돈까지 털어 오빠들이 보고 싶어하는 비디오도 빌리고, 치킨과 콜라를 시켜 나눠먹었다.



<그 날 이후>
오빠가 집에 없을 때면 종종 오빠 방에 들어가 전축을 틀어보곤 했다. 오빠의 선견지명처럼 산울림과 핑크 플로이드를 제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청춘"과 "노모", "The final cut" 앨범에 폭 빠졌다. 특히 청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애창곡이 되었다. (당시 오빠는 내가 청춘을 부르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여동생이 흐느끼듯 청춘을 부르는 게 썩 좋아보이진 않았을 듯)

<대학교 새내기>

투쟁의 한 길로 - 강경대 열사 추모가

1.역사의 부름앞에 부끄러운 자 되어
조국을 등질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
풀 한포기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식민의 땅 아들아 어서 일어나거라

(후렴)
붉은 태양 떠올라 깃발이서면
탄압의 총소리 나를 부르는 함성
나서거라 투쟁의 한길로 산산히 부서지거라
그대따라 이내몸도 투쟁의 한길로

2. 힘들때 같이 웃고 슬픔은 나눠가져
우리모두 더불어 사는 새날위해 나가자
이땅의 청년들아 너와내가 하나되어
향그러운 우리강산 손잡고 달려가자

감히 말한다. 이 노래는 91학번의 노래이다. 강경대 열사 10주기 추모제 때 91학번의 자격으로 올라가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더 이상 이런 노래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추모가라고 하기엔 너무 가슴아픈 투쟁가...

 

 

 

<26살>
그 해 1월 명동성당 고개에서 옆지기는 나를 처음 만났다. 음, 나는 그를 그해 4월에 처음 만났다. 그 시간차도 문제였거니와, 그 해는 신기하게도 나 좋다는 남자가 둘이나 더 있었다. 그 중 1명은 술김에 나에게 강제로 뽀뽀를 시도하는 바람에 절교를 해버렸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내가 홧김에 그 애 얼굴을 시멘트 벽에 갈아버린 뒤, 비탈길에서 발로 차 굴려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히려 그의 편을 들었고, 이에 더욱 분기탱천하여 더더욱 그 애를 멀리 했다)
또 1명은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와 연인 사이였나 보다.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나도 그를 참 좋아했는데, 술 먹고 3번쯤 끈적하게 손도 잡는 등 친구에서 연인으로 넘어갈 뻔 했는데, 나의 보수성과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그래도 나로선 옆지기 외에 유일한 추억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의 삐삐 음성사서함 음악. "산다는 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였는데, 어느날인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길래 아쉬워했더니, 다시 "산다는 건.."으로 바꿔놓았고, 그 해 가을 입대한 뒤에도 삐삐 음성사서함만은 계속 이 노래로 살려놓았다. 노래방에 가서 그가 이 노래를 불러준 적도 있고, 환송식 때도 그가 이 노래를 불렀다고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대목은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였다. 이 대목이 내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는 알았을까.



 <30살~31살>
많은 이로부터 구박받은 사실인데, 마로의 태교음악은 Rhapsody, Dream Theater, Gobilin, Nightwish, Haggard 등이 맡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도 임산부 우울증이나 직장 스트레스를 날려주지 못했다. 스피드 멜로딕의 기타선율과 드럼의 강한 비트만이 날 도와줬다. 엄마에게 좋은 게 아이에게 좋다고 뻔뻔하게 우겼고, 다행히 모 육아서적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있어서 이를 증거자료로 삼았다. (그 산부인과 의사가 말한 건 클래식 대신 가요나 댄스음악을 들어도 된다는 것이긴 했지만) 다행히 마로에게 악영향을 미치진 않은 거 같은데, "The snow man"을 좋아하는 건 조금 의심이 간다. 히히



<지금>

나를 위해 마로가 불러주는 청소송, 자장가, "엄마, 아빠, 힘내세요", What is it" 아, 모두가 다 내 인생의 노래다. 소굼님 말씀대로 MP3를 만들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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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0-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핑크플로이드의 'wall' 은 제 인생 어느 한 부분에서도 인생의 노래였네요.

바람돌이 2005-10-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의 mp3를 기다리며.... 태교 때 클래식이니 발라드니 모두 안맞았던건 저도 마찬가지..... 저는 국산품 애용차원에서 윤도현, 자우림, 이스크라를 열나게 들었던 듯....투쟁의 한길로가 내 인생의 노래가 된다는 건, 역시 저보다 조선인님이 약간은 어린거군요. 헤헤~~~

urblue 2005-10-1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교음악으로 랩소디면 훌륭하죠 뭐. ㅎㅎ

책읽는나무 2005-10-1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는 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 저도 이노래 참 좋아했어요!
전 아마도 신입생 그해 봄쯤에 맨날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태교음악은 뭐~~ 저도 장르 안가리고 다 들었던 것 같아요.
텔레비젼 음악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요도 즐겨 듣기도 했고, 조수미가 부른 팝송도 즐겨 들었던 것도 같고, 민이 가졌을때 일본음반에서 나온 오르골송이라고 하나요?
(보석함에서 나오는 음악같은) 그것도 즐겨 들었고..트로트도 듣고...ㅎㅎㅎ
헌데 랩소디는 못들었는뎅...ㅡ.ㅡ;;

엔리꼬 2005-10-1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뽀 좀 했다고 시멘트에 얼굴을 갈아버리시다니, 너무 무서워요.. 당시 유행어도 사용하신거 아닌가요? '널 부셔버리겠어..'
91학번들은 감히 자기 노래라고 말할 수 있는 노래가 있어 좋겠어요.. 우리 01학번들은 우리의 노래가 없어서 말이죠... ^^

sweetmagic 2005-10-10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니께서도 제 어린시절 ( 마로만 할때) 노래 하는 거 녹음해 두셨거든요
테잎이 늘어질때 까지 듣고 또 듣고 했어요 ....응애 응애 우는 소리부터 얼룩소 학교종 까지요. 저 달래는 돌아가신 할머니 소리도 담겨있고, 젋은 시절 엄마 목소리도 담겨있고....좋은 거 같아요. 마로 목소리만 말고 조선인 님 목소리도 같이 녹음하세요 ^^ 조선인님 인생의 노래 ~ 부르시면 좋겠네요 ~ ^^

날개 2005-10-1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노래들 중 가장 좋은게 지금의 마로 노래가 아닌가요? ^^ 얼른얼른 녹음해 두셔요~

조선인 2005-10-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산사모에 이어 핑사모도 만들까요? ㅎㅎ
바람돌이님, 그럼 이제부터 넙죽 언니라고 부를께요.
유아블루님, 저 랩소디는 광시곡이 아니어요. 좀 많이 시끄러운 그룹이름이죠. ㅎㅎ
책읽는나무님, 랩소디는... 음... 대개 사람들이 좀 기겁하는 그룹이에요. 남에게는 절대 안 권합니다.
서림님, 꿈의 첫키스가 술김에 강제로 당할 뻔~이라면 충분히 갈아줄만한 일 아닐까요? 뭐, 지금 와 생각해보면, 옆지기랑 맺어지기 전에 연애 한 번 못해본 게 아주 아주 가슴아픕니다만.
스윗매직님, 우와, 부러워요. 네, 꼭 녹음하겠습니다.
날개님, 마로 노래가 가장 좋지는 않아요. 제가 산사모거든요. ㅋㅋㅋ

비로그인 2005-10-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멘의 하바네라, 류이치 사카모토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쇼팽의 카바티나. 이 중 카바티나는 정말 각별합니다.
언제나 하고싶은 말은 가장 마지막에 오지요. 결국 산다는 건 에서 하고팠던 말도 내일이 오는 것이 설렌다는 말일 겁니다.

호랑녀 2005-10-10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초등학교 때 핑크플로이드... 역쉬 조숙했어요, 조선인님!

2005-10-10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10-1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좋아하는 랩소디. ㅎㅎ
님이랑 저랑 음악 취향이 비슷하잖아요.

Joule 2005-10-1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미쳤나봐요. 어젯 밤 꿈에 마로가 나왔어요. 마로랑 같이 손잡고 다니는데 처음으로 조선인님의 고달픔을 몸소 느꼈답니다. 마로가 어찌 이것저것 한 눈을 많이 팔던지. 힘들었어요.ㅡㅡ'

조선인 2005-10-1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정답이세요!!!
호랑녀님, 제가 조숙한 게 아니라 오빠들이 그 길로 이끌었죠. ㅋㅋ
속닥이신 분. 어머낫, 그래도 마로에겐 언니 맞네요. ㅎㅎ
유아블루님, 와우~ 다행이에요. 알라딘에는 클래식파가 많아서 좀 기죽었거든요.
쥴님, 맞아요, 그건 바로 마로였어요. 쉴새없이 한눈팔고 조잘거리고 물어대고. 어제 저만 님과 대작하며 논 게 아니라, 마로도 같이 꿈에서 놀았군요. *^^*

2005-10-12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2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5-10-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쁜 마로...
꼭 언젠가는 지현이랑 만나게 해줘야겠당.. ^^

2005-10-12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5-10-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실론티님, 결국 못 만나서 너무 슬퍼요. ㅠ.ㅠ
정말 죄송해요.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느라. ㅠ.ㅠ

2005-10-1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5-10-13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에는 꼭 봐요..^^

파뵤 2006-10-1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은 랩소디 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