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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 부캐넌은 1940년 9월 23일 미국 아칸소 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가스펠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는 9살 때 본격적인 기타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4살 때엔 이미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재즈 기타리스트들과 교류하는 수준에까지 와 있었다.
 얼마 후 로이 부캐넌은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를 만나 그의 백 밴드에서 3년 정도 일하게 되었다.


 70년대로 접어들자 로이는 기타리스트로 점차 명성을 얻어가 TV에선 그의 연주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교육용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이는 ‘폴리돌’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을 발표하였다. 72년에 공개된 이 앨범에는 명곡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 수록되어 수많은 기타 마니아들을 감동시켰다.(그의 연주에 감동한 제프 벡이 자신의 앨범 [Blow By Blow]에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로이에게 헌정한 사실은 유명하다.)


 로이 부캐넌은 73년 두 번째 앨범 [Second Album]을 공개하는 데 이 앨범은 그 높은 음악적 완성도로 인해 ‘Stereo Review'에서 ‘올해의 레코드’로 지명되었다.
 77년에는 스탠리 클락, 스티브 크로퍼 등을 초빙해 만든 역작 [Loading Zone]을 발표해 또다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85년엔 앨범 [When A Guitar Plays The Blues]로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New Music Awards의 ‘올해의 블루스 앨범’상을 수상하였다.

 이처럼 현역 기타리스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로이 부캐넌은 88년 8월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기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로이 부캐넌은 대중적인 인기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만 전념하며 살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철저한 블루스맨, 그것도 블루그래스, 록커빌리 등 미국의 서민적인 체취가 늘씬 풍기는 아메리칸 블루스록의 수호자이다.


 그는 타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에 비해 탁탁 튀는 기타 톤─특히 피킹 하모닉스에 의한 자극적인 오버 톤─을 즐겨 구사하고 거기에 'The Messiah Will Come Again', 'Mrs. Pressure' 등에서처럼 볼륨 주법을 장기로 쓴다. 이러한 독자적인 주법으로 쉽고 친근하게 들리는 멜로디라인을 뽑아내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1939년 미국 앨라배마주 오자크에서 태어나 88년 불행한 생을 마감한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적인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그는 가스펠 뮤직을 일찍이 접했으며 그렇게 시작된 음악에 대한 관심은 R&B에 대한 사랑으로 싹이 텄다. 그는 여러 마이너 그룹에서 수습기간 비슷한 활동을  거쳤으며 19세가 되던 1958년 데일 호킨스(Dale Hawkins)에 참여하면서 메이저에 데뷔함과 동시에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Suzie Q'와 같은 노래로 잠시 팬들의 기대를 벗어나기도 했지만 'My Babe', 'Grandma's House'와 같은 노래는 탁월한 그의 재능을 엿보게 해준다. 한편 그는 프레디 캐넌(Freddie Cannon), 밥 루먼(Bob Luman), 호크스(The Hwaks)와 같이 레코딩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1962년 호킨스에서 은퇴하기까지 몇장의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72년 셀프타이틀 앨범 [Roy Buchanan]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77년에 내놓은 [Loading Zone]에서는 'Green Onions', 'Ramon's Blues'등 스티브 크루퍼(Steve Cropper)가 피쳐링한 두 개의 싱글이 크게 히트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Fender Telecastor Guitar)는 특유의 3중화음 톤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는 이후 몇장의 유사한 앨범을 더 내놓았지만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86년에 발표한 [When A Guitar Plays The Blues](86)로 그의 커리어는 다시 활기를 찾는 듯 했다. 하지만 기타의 대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수입도 썩 좋지 않았다. 몇번의 자살을 시도하던 그는 결국 1988년 감옥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당시 그는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고 수감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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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말에 태동하여 70년대 초반에 번창하던 Progressive Rock은 70년대 말을 거치면서 그룹 자체의 매너리즘과 Disco 음악의 열풍과 같이 보다 쉬운 음악을 찾는 대중 음악계에 의해서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80년대 들어 이들 Progressive Rock 그룹들은 팝적인 멜로디를 도입하는 등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변신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바로 그룹 Asia이다.

81년 Yes 출신의 스티브 하우(Steve Howe, g)는 King Crimson과 UK를 거친 죤 웨튼(John Wetten, b,v)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 Yes의 매니저 브라이언 레인(Brian Lane)의 주선으로 ELP 출신의 칼 팔머(Carl Palmer, d), Buggles 출신으로 Yes에 잠시 몸담은 경력이 있는 제프리 다운스(Geoffrey Downs, k)의 초호화 프로젝트를 탄생시키게 되며 데뷔 앨범의 앨범 커버마저도 Yes의 앨범 커버를 담당하던 로저 딘(Roger Dean)에게 의뢰한다.

이렇게 해서 Geffen사와 계약한 Asia는 동명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82년 봄에 발표하는데 싱글 'Heat of the Moment'와 'Only time Will Tell'이 각각 차트 4위와 17위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이것은 최고의 뮤지션들이 모여 제작한 깔끔하고 화려한 음악이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뿐 아니라, 과거의 팬들도 이름값만으로 찾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83년 2집 [Alpha]를 발표하여 이번에도 싱글 히트곡 'Don't Cry'를 10위에 올리는 등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되지만 벌써부터 그룹 내외로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부로는 싱글 히트곡에 있어서 작곡자의 공헌도 문제로 John Wetton과 Steve Howe가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외부로는 과거의 Progressvie Rock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팝적인 멜로디의 곡들을 연주한다는 과거 팬들의 실망스런 목소리였다.

2집 발표 후 Geffen 측에서는 MTV를 통해서 이들의 공연을 전세계에 생중계하는 일본 실황 [ASIA in Asia]를 기획한다. 하지만 내부의 불화가 마침내 폭발하여 방송 몇 주전에 John Wetton이 탈퇴하고 만다.

결국 공석은 ELP와 King Crimson 출신의 그렉 레이크(Greg Lake, b, v)로 급하게 땜질되어 그럭저럭 공연을 마치게 되며, 공연 중계 내용은 비디오로 출시된다.
 
84년 John Wetton이 그룹으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Steve Howe가 탈퇴하고 Krokus 출신의 맨디 메이어(Mandy Meyer, g)를 후임으로 3집 [Astra]를 발표한다.

Heavy Metal 밴드 출신의 기타를 영입한 결과 더욱 Rock적인 사운드로 변신하여 비교적 좋은 평을 얻었지만 싱글 'Go'가 67위에 그쳐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으며 실망한 멤버와 관계자들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만다.

대신 이 시기에 John Wetton과 Geoffrey Downes가 Thin Lizzy출신의 스콧 고함(Scott Gorham, g)등과 함께 몇몇 곡을 녹음하지만 일본에서만 발매하는 것으로 그친다.

90년 John Wetton과 Carl Palmer는 여러 뮤지션들을 초대하여 과거의 히트곡과 미발표곡, 신곡들을 담은 [Then & Now]를 발표한다. 하지만 Geffen 측의 홍보 부족으로 역시 흥행에 실패하고 뒤늦게 98년에야 5백만 장의 판매고를 달성하게 된다.

앨범 발표 후 같은 해 11월 기타에 Hughes-Thrall Band 출신의 팻 스롤(Pat Thrall)을 초빙하여 모스크바에서 실황을 갖고 91년 [Live Mockba]를 발표한 뒤 John Wetton은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고 솔로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92년 John Wetton의 해체 선언에도 불구하고 Geoffrey Downes는 나름대로 새로운 Asia의 활동 재개를 구상한다. John Wetton의 후임으로 죤 페인(John Payne, b,v)을 영입하고 Steve Howe, Carl Palmer와 같은 과거의 멤버들을 초대하거나 최근 Megadeth와 함께 방한했던 알 피트랠리(Al Pitrelli, g)와 같은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4번째 공식 스튜디오 앨범 [Aqua]를 발표한다.

이 앨범 발표 후 Geoffrey Downes가 주도한 새로운 Asia의 변화된 모습은 좋은 평을 받게 되며 영국과 일본 등지에서 10위권 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John Wetton은 Geoffrey Dowens와 사이가 안 좋아졌으며, 미국에서는 배급사와의 마찰로 발매가 지연된다.

94년 후속작 [Aria]를 발표하고 유럽과 영국 투어에 나서지만 미국에선 여전히 1년 뒤늦게 발매된다.

96년 6집 [Arena]를 발표하며 여기서는 Progressive에서 Reggae, Latin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미발표 곡들의 데모 테잎을 대량 발견하여 이것을 정리한 [Archiva 1 & 2]를 발표한다.

97년에는 82년부터의 모든 작품들에서 히트곡들을 담은 [Anthology]를 발표하며, 99년에는 Yes의 90년대 초 [Union] 앨범과 같이 신구 멤버들이 대규모로 같이 작업하는 재결성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만다.

대신 Asia는 편집음반 [Axioms]를 발표하고 2000년 John Wetton은 Carl Palmer, 그리고 89년 Geoffrey가 없던 시절 참여했던 죤 영(John Young, k)과 새로운 멤버 킬민스터(Kilminster, g)와 함께 QANGO(Quasi-Autonomous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을 결성하여 투어를 하면서 Asia시절의 곡들을 연주하여 Geoffrey Downes의 Asia를 견제한다.

Asia는 2000년 실황 [Live at the Towns & Country Club]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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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오늘- 4월 4일- 게리 무어가 출생했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13세의 나이에 이미 기타를 독학으로 마스터 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70년 베이시스트 브러시 실즈(Brush Shields) 등과 그룹 스키드 로우(Skid Row; 세바스찬 바흐의 그룹과는 다른 스키드 로우)를 결성, [Skid Row], [32 Hour]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7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게리 무어 밴드를 결성, [Grinding Stone] 앨범을 내 놓기도 했다. 그 후 신 리지(Thin Lizzy)와 콜로세움 투(Colosseum 2)를 오가며 78년까지 모두 4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79년에는 그의 첫 솔로 앨범 [Back On The Street]를 출시, 'Parisienne Walkways’가 영국 싱글 챠트 8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기록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지 포스(G-Force)를 결성해 동명 앨범을 내놓았고 미국 투어를 마친 82년에는 <버진(Virgin)>과 계약을 체결해 [Corridors Of Power]를 발표, 그의 이름은 미국 시장에서도 알려지게 되었고 [빌보드] 차트를 통해서도 앨범을 만나볼 수 있었다. 84년 발표한 [Victim Of The Future]는 소련의 KAL기 피격 사건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Murder In The Skies'를 수록하기도 했다. 같은 해 2월엔 영국과 일본에서 또 3월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 일대에서 순회 공연을 벌이면서 소련의 만행을 신랄하게 규탄하기도 했으며 실황앨범 [We Want Moore!]를 발표하는 정력적인 창작 활동과 의지를 보였다. 85년 글렌 휴(Glenn Hughs)가 참여한 [Run For Cover] 앨범이, 86년에는 [Rockin' Every Night]가, 87년에는 신 리지 시절의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인 필 리뇨트(Phil Lynott)를 추모하는 [Wild Frontier]를 내놓았고 [After The War] 역시 뒤이어 출시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음악적 방향은 블루스적인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해 다시금 그의 역량을 마음껏 표출하게 되었다. 알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와 알버트 킹(Albert King) 이 참여한 [Still Got The Blues]는 동명 타이틀 곡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92년에는 알버트 콜린스와 비비 킹(B. B King)이 참여한 [After Hours]를 발표하는데 그와는 'Since I Met You Baby’를 듀엣으로 협연하는 등 블루스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93년에는 또 다른 라이브 앨범 [Blues Alive]를 통해 블루스 뮤지션으로의 자리를 확고히 했고 잭 브루스(Jack Bruce), 진저 베이커(Ginger Baker)가 참여한 [Around The Next Dream]에 이어 발표한 베스트 앨범 [Ballad & Blues (1982~1994)]는 게리 무어의 음악사에서 절정을 달린 중반기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물론 초기 타의 추종을 불허한 파워풀한 기타 테크닉을 구사하던 그의 모습을 그리워 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제 그는 흐느끼는 듯한 애절한 블루스 기타 사운드로 많은 팬들에게 기억되는 고독한 방랑자로 각인된 지 오래다.

게리 무어는 1952년 4월 4일 북아일랜드의 수도이자 항구도시인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는 당시의 또래들처럼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 등 로큰롤에 열광하는 아이였고 12살 때에는 첫 밴드 비트 보이스(Beat Boys)를 이끌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그는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나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등의 음악을 통해 블루스 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그가 블루스의 그 깊은 음악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당시 블루스브레이커스에 몸담고 있던 (얼마 후 플리트우드 맥을 결성하는) 천재 블루스 기타리스트 피터 그린의 연주를 듣게 되면서부터다. 피터 그린은 이후 줄곧 게리 무어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자리하며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피터 그린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1995년 작 [Blues For Greeny]를 통해 표출된다). 그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음악적 재능은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가 결성했던 스쿨 밴드 그래니스 인텐션스(Granny's Intentions)는 사이키델릭 성향의 연주를 들려주던 그룹이었는데 불과 15세에 불과했던 게리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음악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범한 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블린으로 이주한 그는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니스 인텐션스에서 함께 연주를 했던 학교 친구 노엘 브리지먼(Noel Bridgeman, 드럼)과 다시 의기투합한 게리 무어는 (그가 소위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로 일컬었던) 보컬리스트 필 라이넛과 베이시스트 브렌던 실즈(Brendan Shields)의 라인업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스타일의 블루스 록 그룹 스키드 로를 결성했다. 하지만 얼마 후 필 라이넛이 자신의 밴드 신 리지의 결성을 위해 그룹을 떠나고 밴드는 트리오의 편성이 된다. 1970년 런던으로 이주한 이들은 플리트우드 맥의 공연 무대에서 오프닝을 장식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밴드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피터 그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CBS]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이들은 앨범 [Skid Row]('70)와 [34 Hours]('71)를 발표한다(당시 피터는 자신이 사용하던 '59년형 깁슨 레스폴 기타를 게리에게 팔았는데 이 기타는 이후 게리 무어가 가장 애용하는 악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일랜드의 포크 록 그룹 닥터 스트레인질리 스트레인지의 [Heavy Pettin']에 참여하여 기타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사실 스키드 로는 많은 부분에서 미숙한 밴드였고 수 차례에 걸친 유럽과 미국 투어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게리는 스키드 로를 탈퇴하여 드러머 피어스 켈리(Pearse Kelly)와 베이시스트 존 커티스(John Curtis)와 함께 새로운 그룹 게리 무어 밴드를 결성한다. 하지만 밴드의 유일한 앨범 [Grinding Stone]('73) 역시 실패로 끝났고 1974년 초, 그는 필 라이넛의 제안으로 신 리지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신 리지와 게리 무어의 공존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그는 18개월 동안 밴드의 투어 및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한다. 그리고 1975년, 그는 존 하이즈먼(Jon Hiseman, 드럼)의 프로그레시브 재즈 록 그룹 콜로세움 2에 가입을 하여 키보디스트 돈 에어리(Don Airey), 베이시스트 존 몰(John Mole)과 함께 [Strange New Flesh]('76)와 [Electric Savage]('77), [War Dance]('77) 등 세 장의 앨범을 완성했다.
사실상 이 시기는 게리 무어의 기타리스트로서의 재능이 완전히 꽃을 피웠던 시기는 아니다. 그의 번뜩이는 재능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78년이 아닐까 하는데, 이 해에 그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프로젝트 앨범 [Variations]와 로드 아전트(Rod Argent)의 [Moving Home], 그리고 게리 보일(GaryBoyle)의 [Electric Glide]에서 연주를 들려주었고 브라이언 로버트슨(Brian Robertson)을 대신하여 신 리지의 정식 멤버로서 투어와 앨범 작업에 참여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콜로세움 2의 동료들이었던 돈 에어리와 존 몰, 그리고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ips)와 신 리지의 필 라이넛, 브라이언 다우니(Brian Downey) 등 호화 게스트들과 함께 한 앨범 [Back On The Streets]('79)는 애절한 발라드 ‘Parisienne Walkways’의 히트와 더불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최초의 앨범이 되었다. 같은 해 발매된 (게리 무어가 정식 멤버로서 참여한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인) 신 리지의 [Black Rose (A Rock Legend)]('79) 역시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자신이 거기에 안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1979년, 신 리지와의 미국 투어 도중 밴드를 떠난 그는 LA에서 보컬리스트 토니 뉴튼(Tony Newton), 베이시스트 윌리 디(Willie Dee), 드러머 마크 나우시프(Mark Nausseef)와 함께 하드 록 그룹 지 포스를 결성한다. 이듬해에 [제트(Jet)]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밴드는 앨범 [G-Force]('80)를 발매하지만 이는 밴드의 유일한 앨범이 되었고 그는 이내 그렉 레이크의 밴드에 합류한다. 그렉 레이크의 솔로 앨범들인 [Greg Lake]('81)와 [Manoeuvres]('83), 그리고 코지 파웰의 [Over The Top]('79), [Tilt]('81), [Octopuss]('83) 등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의 앨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2년 새로이 [버진(Virgin)]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그는 드러머 이언 페이스(Ian Paice)와 키보디스트 토미 에어(Tommy Eyre), 베이시스트 닐 머레이(Neil Murray)와 함께 헤비 메탈 성향의 새 앨범 [Corridors Of Power]('82)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탁월한 멜로디로 가득한 [Victims Of The Future]('84)는 새로운 멤버들인 키보디스트 닐 카터(Neil Carter)와 드러머 바비 추이너드(Bobby Chouinard), 그리고 베이시스트 크레이그 그루버(Craig Gruber)가 함께 한 작품이다. EP 모음집 [Dirty Fingers]('84)와 라이브 앨범 [We Want Moore!]('84)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듬해에 발표된 [Run For Cover]('85)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일본 공연을 담은 라이브 앨범 [Rockin' Every Night]('86)에 이어 1986년 1월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 필 라이넛에게 바친, 켈트 음악과 하드 록, 팝 메탈의 요소를 포함한 [Wild Frontier]('87)는 '80년대 최고의 성공작이 되었다. 런던 마키 클럽에서의 실황이 담긴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Marquee]('87) 이후 발표된, ‘아일랜드’라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담은 [After The War]('89)는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을 비롯한 여러 게스트들의 참여가 돋보였던 작품이다. 그리고 이 앨범을 끝으로 그는 오랜 기간 매달려온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히트싱글에 대한 부담감과 하드한 사운드에 지친 게리 무어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이루는 블루스로 돌아가고자 했고, 앨버트 킹(Albert King), 앨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등이 참여한 그의 최고 걸작 [Still Got The Blues]('90)로 블루스 뮤지션으로서의 멋진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어지는 일련의 멋진 블루스 앨범들, 즉 비비 킹(B.B. King)과 앨버트 콜린스 등이 함께 한 [After Hours]('92)와 라이브 앨범 [Blues Alive]('93), 그리고 피터 그린의 곡들을 리메이크하여 수록한 트리뷰트 앨범 [Blues For Greeny]('95)를 통해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껏 내보였고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둘 수 있었다. '94년에는 크림(Cream)의 멤버들이었던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함께 슈퍼 프로젝트 BBM(세 멤버들의 이니셜이 그대로 그룹명이 되었다)을 결성하여 탁월한 블루스 앨범 [Around The Next Dream]을 발표하기도 했다. [Dark Days In Paradise]('97)와 [A Different Beat]('99)에서 테크노를 비롯하여 실험적인 시도를 포함한 의외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그는 2001년 작 [Back To The Blues]로 다시 성공적인 블루스로의 복귀를 이루었다. 그리고 2002년 봄, 기존의 블루스 록에 초기의 하드 록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한 앨범 [Scars]를 발표하며 퇴색하지 않은 탁월한 기타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이어가고 있다.

게리 무어처럼 많은 음악적 변화를 겪은 기타리스트도 아마 드물 것이다. '70년대 초 스키드 로 시절에는 블루스를 바탕으로한 재즈 록, '70년대 말 콜로세움 시절에는 재즈 록, '80년대 솔로 활동 시절에는 하드 록과 헤비 메탈, '90년대에는 블루스를 각각 구사해 왔다. 또 많은 세션에도 참가해 필 리뇻의 신 리지, 코지 파웰의 솔로 앨범, 그렉 레이크의 솔로 앨범, 킹 크림슨의 앤드루 로이드 웨버 솔로 앨범 등에 참가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기타리스트가 펼친 연주 활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경력으로 보나 음악적으로 보나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52년 4월 4일 북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16세가 되는 해 뮤지션이 되기 위해 더블린으로 간다. 그는 더블린에서 스키드 로우(Skid Row)-메탈 밴드 스키드 로우와는 다른 밴드-의 멤버들과 만나 합류하게 된다. 또 당시 유명한 기타리스트인 피터 그린(Peter Green)을 만나게 되고 그가 이끄는 플리트우드 맥(Freetwood Mac) 공연의 오프닝을 맡기도 한다. 그를 앨범 데뷔에 이끌어 준 것도 피터 그린이며 결국 ’70년 스키드 로우는 데뷔 앨범 [Skid]를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얻지 못하고 두 번째 앨범 [34 Hours]까지 발표한 게리 무어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기 위해 그룹을 떠난다. 3인조 그룹 게리 무어 밴드를 조직한 그는 ’73년 [Grinding Stone]을 발표하고 끈끈한 블루스 록 사운드를 들려 주었다.
’74년 그룹이 해산되고 ’75년 그는 중견 드러머인 존 하이즈먼(Jon Hiseman)의 권유로 돈 에어리(Don Airey), 닐 머레이(Neil Murray)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재즈 록 그룹 콜로세움 투(Colosseun II)에 참가하게 된다. ’76년부터 3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대부분의 음악적 기반을 이시기에 닦았다. 재즈적인 속주는 물론 록, 소울, 블루스 등 모든 장르에 능하게 된 그의 연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76년부터 친구인 신 리지(Thin Lizzy)의 필 리뇻(Phil Lynott)이 원할 때마다 투어와 앨범에 참가해 주었고 결국 ’79년 [Black Rose] 앨범에는 정식 멤버로 가입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신 리지와의 연주에 지친 그는 점점 스트레이트한 록 사운드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 더블 베이스 드러밍의 명인 코지 파웰과의 인간적, 음악적 교류가 시작되어 ’79년 [Over The Top], ’80년 [Tilt] 등 두 장의 솔로 앨범에 참가하게 된다. 특히 두 번째 솔로 앨범에 수록된 하이 템포곡 ‘The Blister'와 발라드 넘버 ‘Sunset'에서 들려준 그의 연주는 가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첫 솔로 앨범 [Back On The Streets]를 발표한 바 있는 그는 ’80년 자신의 프로젝트 그룹 지 포스(G-Force)를 결성해 음악적인 변신을 꾀한다. 이 때부터 서서히 스트레이트한 록 사운드로 변하기 시작한 그의 연주는 결국 [Dirty Finger]를 거치면서 ’82년 히트작 [Corridors Of Power]에 이른다. 이 때부터는 활화산 같은 속주를 바탕으로 강력한 헤비 메탈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며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80년대 후반까지 비슷한 성향의 앨범을 발표하며 10년 가깝게 꾸준히 구사해온 록 사운드는 결국 ’90년에 발표한 [Still Got The Blues]를 계기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2001년이 된 지금도 중간의 몇 장에서 음악적 변화를 시도하지만 최근 앨범 [Back To The Blues]로 결국 수준 높으면서도 대중적인 블루스로 다시 돌아와 끊임없는 음악 여정을 펼치고 있다.

미스터 기타 크레이지, 또는 철새 기타리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게리 무어의 베스트 앨범이 나왔다. 게리 무어는 '52년 아일랜드 벨파트스 태생으로 올해로 47살이 되는 중년의 기타리스트다. 이미 16살 때 스키드 로라는 로컬 밴드에서 필 리놋과 함께 활동을 했었고,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한 다음 자신의 게리 무어 밴드를 결성하여 한 장의 앨범을 냈다. '75년 말에는 콜로세움Ⅱ에 참여하여 3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필 리놋의 요청으로 신 리지의 BLACK ROSE에 참여했고, 글렌 휴즈 등과 함께 지-포스(G-force)를 결성하여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외 그는 많은 프로젝트와 다른 아티스트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명성을 쌓았다.
그가 솔로로 완전히 독립한 것은 '79년 BACK ON THE STREET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본 게리 무어의 베스트 앨범은 바로 이 앨범부터 '92년 AFTER HOURS까지의 스튜디오 앨범 곡들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92년 이후에도 블루스 라이브 앨범 BLUES LIVE, 진저 베이커, 잭 브루스 등 옛 크림의 멤버와 함께한 BBM의 AROUND THE NEXT DREAM, 세 곡의 신곡을 담은 BALLADS & BLUES 1982-1994, 존경하는 기타리스트 피터 그린의 트리뷰트 앨범 BLUES FOR GREENY 등을 발표했고, 올해는 오랫만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가미한 진정한 의미의 솔로 앨범 DARK DAYS IN PARADISE를 발표했지만 이번 베스트 앨범에서는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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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록의 대명사 스콜피온스는 그 오랜 경력만큼이나 다양하고 끈질긴 음악적 변신을 시도해 왔다. 그룹이 처음 데뷔할 당시인 1971년도에 사이키델릭하고 깊은 음악성을 지닌 데뷔 앨범 LONESOME CROW를 시작으로 이들의 역사는 시작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운드인 이 데뷔 앨범은 한때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앨범이었지만 CD 발매가 일반화된 지금은 수입으로 국내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데뷔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기타리스트 마이클 솅커는 당시로서는 유명한 필 모그의 그룹 UFO로 이적해 그의 험난한 음악 여정을 시작한다.
그의 탈퇴로 일시 해산되었던 그룹은 ’74년 두 번째 앨범이자 초기 명반으로 꼽히는 FLY TO THE RAINBOW를 발표한다. 이 때 기타리스트로는 향후 리치 블랙모어, 잉베이 맘스틴과 함께 바로크 메탈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 울리 존 로스다. 클래식에 바탕을 둔 독특한 연주를 들려준 그는 향후 자신의 솔로 앨범에서 록과 클래식의 뛰어난 융합을 시도해 주목을 끌기도 한다.
여러 차례의 투어로 이름을 알린 이들은 1976년 세 번째 앨범 IN TRANCE를 발표하고 1977년 독특한 재킷의 4집 VIRGIN KILLER를 발표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다. 유럽권을 비롯한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이들은 5집 TAKEN BY FORCE를 발표한 뒤 일본에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다. 이 공연은 두 장 짜리 라이브 앨범 TOKYO TAPES에 담겨 지금까지 이들의 초기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라이브 명반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점점 대중적으로 끌려가는 사운드에 반감을 가진 기타리스트 울리 존 로스는 그룹을 탈퇴했고 오디션을 통해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친 새로운 기타리스트 마티아스 얍스가 리드 기타 자리를 차지한다. 이어 발표한 앨범이 바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대표작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트곡 Holiday와 Always somwhere를 담은 1979년작 LOVE DRIVE이다. 스콜피온스 사운드에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이 앨범은 기타리스트 마이클 솅커가 세션으로도 참가했으며 동시에 당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재킷으로 구설수에 오른 문제작이기도 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우뚝 선 이들은 최초의 베스트 앨범 BEST OF SCORPIONS를 발표해 팬들에게 보답한다. 이어 비슷한 사운드를 담은 앨범들을 차례로 발표하는데 80년 ANIMAL MAGNETISM이 그 시작이다. 단순한 리프와 듣기 편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비교적 참신한 록 사운드를 들려준 이 앨범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일정한 수준의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어 또 하나의 베스트 앨범 SCORPIONS BEST II를 발표하고 1982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No one like you가 담긴 BLACK OUT 앨범을 발표하는데 포크로 눈이 찔린 재킷이 인상적이었다. 직선적이고 빠른 템포의 곡들이 많은 이 앨범은 LOVE DRIVE와 함께 지금까지 발표한 중반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1983년 두 장의 베스트 앨범 ROCK GALAXY와 TAKE OFF를 각각 발표하고 1984년에는 Still loving you를 담은 명반 LOVE AT FIRST STING을 발표한다. LOVE DRIVE에 버금가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 앨범에서는 히트곡 Still loving you를 비롯해서 Rock will like a hurricane, Coming home이 히트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당시를 대중적인 멜로디와 음악성이 어우러진 중반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어 발표한 두 번째 라이브 앨범 WORLD WIDE LIVE로 중반기를 마무리한다. LP로는 두장, CD로는 한 장으로 발매된 이 라이브 앨범은 마티아스 얍스의 날카로운 기타 플레이를 인정받은 대표작으로 기록된다.

1988년 새로운 앨범 SAVAGE AMUSEMENT를 발표하고 1990년 CRAZY WORLD를 발표하는데 이때부터는 서서히 팝적인 감각이 두각을 나타내 사운드 자체가 다소 가벼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93년에 발표한 FACE THE HEAT 앨범과 1996년에 발표한 PURE INSTINCT에까지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1990년대 사운드 특성을 그대로 담은 작품들로 비교적 팝적이고 가벼운 사운드를 담고 있는데 초기나 중반기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다소 음악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1999년에 발표한 앨범 EYE II EYE에서는 1990년대의 가장 큰 조류라고 할 수 있는 얼터너티브 사운드를 구사해 많은 팬들에게 색다른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찬반 양론으로 분열된 스콜피온스 팬들에게 2000년들어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또 한 장의 앨범 MOMENT OF GLORY를 들고 나왔다. 30년이 넘는 활동으로도 아직까지 다 보여주지 못한 그 무엇을 선사하려 그들은 결국 우리 곁에 다시 나타났다.

스콜피온스 하면 대부분 Still loving you나 Holiday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 그룹의 음악은 초기와 후기의 음악이 확연히 다르다. 물론 클라우스 마이네의 보컬과 하드 록 스타일의 음악은 마찬가지지만 울리히 로스라는 걸출한 기타리스트가 있었던 초기와 감각적인 기타리스트 마티아스 얍스가 있었던 후반기의 음악은 분명히 대비되는 구석이 있다. 마티아스 얍스로 기타리스트가 교체된 후 스콜피온스는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은 것은 사실이나 초기의 그들의 음악은 덜 세련되기는 하지만 블루스적인 필링과 실험성에 있어선 단연 돋보이는 연주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음악의 근원은 클라우스 마이네도 루돌프 솅커도 아닌 울리히 로스였다. 사이키델릭함과 클래식컬한 섬세함을 동시에 겸비한 울리히의 영향으로 스콜피온스의 초창기 곡들은 특유의 빼어난 멜로디와 함께 대중적인 듯 하면서도 강한 실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스콜피온스가 어떤 밴드인가 구차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In trance, When the smoke is going down, Always somewhere, Holiday, Still loving you, Wind of change, You & I 등으로 이어지는 서정성 있는 곡들을 히트시키며 전세계에 걸친 팬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메탈 발라드의 황제라는 데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스콜피온스에 대해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잠시 밴드의 역사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64년 독일의 하노버(Hanover)에서 천재적인 형제 기타리스트인 루돌프 쉥커와 마이클 쉥커 (Michael Schenker)를 주축으로 결성된 스콜피온스는 '71년 보컬리스트 클라우스 마이네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데뷔 앨범 발표이후 마이클 쉥커는 UFO에 가입하기 위해 밴드를 떠나고 스윕 피킹을 대중화시킨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울리히 로스(Ulrich Roth)가 가입하여 여러 장의 앨범들을 발표했으나 일본 라이브 앨범 TOKYO TAPES를 끝으로 그 역시 탈퇴하고 말았다. 이어 지금까지 꿋꿋하게 스콜피온스의 리드 기타를 맡아주고 있는 마티아스 잡스(Matthias Jabs)가 가입하여 '79년에 발표한 LOVEDRIVE가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지는 바람에 일약 세계적인 밴드로 부상하게 된다. 이 앨범은 Holiday 같은 발라드 외에도 Can't get enough 등의 스트레이트한 메탈 넘버도 다수 수록된 스콜피온스의 최대 히트작에 속한다. 이어 성공적인 앨범들을 발표하다 '84년에 LOVE AT FIRST STING를 발표하고 Still loving you를 다시금 세계를 정복한다. 그리고 '90년에는 Wind of change가 수록된 CRAZY WORLD를 발표했으며, 비교적 최근인 '96년에는 PURE INSTINCT를 발표하여 You & I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곡은 예전과 같은 폭발적인 인기에 끌어내지는 못했으나 스콜피온스 특유의 감성적인 연주와 호소력 짙은 멜로디와 보컬로 유럽과 아시아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었다. 그리고 올해 '99년 EYE TO EYE를 발표하면서 세기말에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하고 있다. 이번에 앨범은 노장 록 밴드로서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해 보는 앨범인 동시에 다음세기를 대비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어우러진 앨범이다.
이렇게 발라드를 중심으로 이들을 설명했지만, 스콜피온스를 메탈 발라드 전문 밴드로 치부할만한 그런 밴드는 결코 아니다. 이들에게는 마이클 쉥커와 울리히 로스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들만의 강력한 사운드가 있기 때문이고, 이를 이어서 최고의 리듬 기타리스트인 루돌프 쉥커와 하이 테크니션 마티아스 잡스, 독특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클라우스 마이네 등의 삼각 편대가 만들어 내는 다이내믹한 사운드가 지금도 어지간한 신진 메탈 밴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권 록 음악 그룹중 미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그룹이라면 독일 출신의 스콜피온스를 들 수 있겠다. Still loving you의 스콜피온스야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헤비 메탈 밴드로 정평이 나 있으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다. 리드 기타의 루돌프 솅커(Rudolf Schenker)와 리드 보컬의 클라우스 마이네(Klaus Meine)를 중심으로 5인조로 결성된 스콜피온스는 특유의 애절한 발라드로 특히 인기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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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발매된 재니스 조플린의 [Greatest Hits] 앨범이 그녀가 사망한지 5년만인 1975년 6월 12일자로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27살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개성 강한 여성 록 보컬리스트 재니스 조플린은 1943년 1월 19일 텍사스주에서 출생해 1970년 10월 4일 LA의 할리우드 호텔에서 헤로인 과용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60년대가 낳은 위대한 백인 여성 로커이자 블루스 가수인 재니스 조플린은 잔뜩 쉰데다 갈라진 듯한 독특한 보이스 컬러가 특징적이었다. 재니즈 조플린이 처음 주목을 끌게 된 것은 사이키델릭 밴드인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의 프런트우먼으로서였다. 그녀의 강한 개성은 이 그룹에서도 두드러져보일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 후반 밴드를 떠나 솔로로 나선 그녀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여건 즉, 그녀를 뒷받침해주는 뮤지션 등이 그다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의 탁월한 역량이 그녀를 스타로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의 강렬한 무대 매너와 섹스 어필 또한 그녀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요소가 되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블루스와 포크 뮤직 가수 활동을 한 그녀는 1960년대 중반에는 후에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조마 카우코넨(Jorma Kaukonen)과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 가담 이전에도 솔로로 라이브 레코딩을 하기도 했는데 블루스 계열의 이 작품들은 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난 덕에(?) 뒤늦게 빛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에 가담한 것은 1966년의 일이었고 그녀의 가담은 이 밴드가 빛을 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1967년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 밴드와 함께 나타난 재니스 조플린은 'Ball And Chain’을 불러 인상적인 장면을 남겼고 이 실황은 영상으로 담기기도 했다. 하지만 재니스 조플린은 이 밴드의 2집 앨범인 [Cheap Thrills]가 1968년 차트 1위에 오른 직후 솔로 전향을 위해 밴드를 떠나게 된다. 그녀는 솔로 데뷔작 [I Got Dem Ol' Kozmic Blues Again Mama!]를 발표했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후 재니스 조플린의 삶은 약물 및 알콜 중독 등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솔로 2집이자 유작이 되어버린 [Pearl]을 발매하는데 이 작품은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며 그녀가 블루스와 소울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역량있는 뮤지션임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많은 요절한 뮤지션이 그러하듯 재니스 조플린 역시 사망한 뒤 더 유명해졌는데 유작 앨범 [Pearl]에 담겨 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노래의 리메이크 'Me And Bobby McGee’는 사망 뒤인 1971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다.

블루스의 여왕 재니스 조플린의 목소리는 시원함과 통렬함을 넘어서, 살 떨리는 영매(靈媒)의 주술문과 같이 들린다. 마치 세상의 모든 한을 표출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절규는 그녀를 팝 음악사 상 성스러운 3J(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어떤 특정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렇게나 질러대는 그녀의 보컬 스타일은 어두웠던 그녀의 인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외모 때문에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라는,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운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그녀는 내면 깊이 침잠된 콤플렉스를 떨쳐내기 위해 마약과 술에 의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목소리로 상처받은 자의 내면을 연기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의 외침이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그녀는 한 음 한 음 찍어서 부르는 정확한 소리를 거부하고 음을 찌그러뜨리는 창법을 구사했다. 그 소리는 굴곡진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굳이 스타일 별로 분류하자면 그녀는 남부 텍사스 출신답게 멤피스 블루스의 보컬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그녀의 최대 강점은 역시 끝을 모르고 치솟는 넓은 음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절정에 이르러서도 힘을 잃지 않는 카랑카랑함이 인상적이다. 또한 탁한 진성과, 진성을 방불케 하는 반 가성의 절묘한 동거를 보여주는 탁월함을 과시한다. 이는 'Summertime', 'Ball And Chain' 같은 곡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의 고출력 지르기 창법과 까뒤집는 기괴한 탁성은 어쩌면 담배와 환각제 과용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는 보컬 임프로바이제이션은 순간적인 변성을 가능케 하는 그것으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영역의 수준을 고수한다. 왜냐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3J 중의 한 사람. ‘3J’는 바로 도어즈의 짐 모리슨, 명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재니스 조플린(1943.1.19-1970.10.4)을 얘기한다. 팝 음악사에 기록될 천재적 뮤지션인 이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버렸다.
1960년대가 배출해낸 위대한 백인 여성 블루스 록 스타인 재니스 조플린은 잔뜩 쉬고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지만 독특한 호소력을 지닌 음악을 전달해 사랑을 받았다.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의 프런트 우먼으로 ‘Piece Of My Heart’를 발표했으며, 1960년대 후반 솔로로 나선 뒤에는 [I Got Dem Ol' Kozmic Blues Again Mama](1969)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냈고 후속작 [Pearl]은 유작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상업적 성공을 구가했다.
그녀는 보컬리스트로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와 함께 강렬한 무대 매너와 섹스 어필 또한 인기의 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많은 록 스타들, 특히 그 무렵 일상화되다시피 했던 알콜과 약물 등으로 얼룩지고 결국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곡을 리메이크한 'Me And Bobby McGee’는 그녀가 사망한 뒤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의 보컬리스트로 Piece of my heart를 발표했고, 코즈믹 블루스 밴드(The Kozmic Blues Band)에서 Try just a little bit harder를 발표하여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또한 풀 틸트 부기 밴드(The Full Tilt Boogie Band)와 함께 Me and Bobby McGee를 발표한 위대한 여성 록 싱어 재니스 조플린은 ‘43년 1월 19일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수많은 록의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70년 10월 4일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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