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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24일 데이빗 보위와 패션 모델 이만(Iman)이 스위스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이 사실은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데이빗 보위는 영국 팝계에 가장 오래, 가장 크고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포크에서 글램 그리고 댄스에서 일렉트로니카까지, 패션과 트렌드에 발빠르게 순응하는 카멜레온이었다.
본명이 데이빗 로버트 존스인 데이빗 보위는 10대 시절 콘라즈, 킹 비즈, 데이빗 존스, 버즈 로워, 써드등의 밴드에서 활동했다. 그 중 매니쉬 보이스라는 밴드에는 지미 페이지가 기타리스트로 재적하기도 했는데 67년, 그간의 싱글들을 모아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표하면서 뮤지션으로 데뷔했다. 얼마 후 [Man Of Words/Man Of Music]을 발매하는데 이 앨범은 오랜 친구이던 티 렉스의 마크 볼란이 그의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Tony Visconti)를 소개시켜주면서 글래머러스한 포크 록을 선보였다. 보위는 이 때부터 믹 론슨과도 교류를 시작했고 71년에는 [Hunky Dory]를 발매하는데 여기에는 미국 음악 특히 뉴욕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그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었고 믹 론슨과 더불어 키보디스트 릭 웨이크먼(Rick Wakeman)이 녹음에 참여했다. 72년 발매한 글램 록 걸작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에서 그는 자신의 얼터 이고로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 냈으며 믹 론슨과 멤버들은 그 밴드로 설정했다. [Aladdin Sane]을 발매할 즈음 그는 루 리드의 히트곡 'Walk On The Wild Side'가 수록된 앨범 [Transformer]를 프로듀스 해주기도 했으며 모트 더 후플의 글리터를 위한 송가 'All The Young Dudes'를 작곡, 프로듀스 하기도 했다. 지기 밴드를 해체시키고 라이브를 중단한 그는 파리로 가서 60년대 영국 록 넘버들을 리메이크 한 앨범 [Pin Ups]를 발매했다.
74년 'Rebel Rebel'이 수록된 [Diamond Dogs]를 발매하면서 그는 미국 투어를 재개한다. 그러는 중 소울 음악에 심취하게 되는데 75년 [Young Americans]를 발매한 그는 헐렁한 옥스포드 진과 보다 자연스러운 블론드로 스타일을 바꾸고 한때 제임스 브라운의 사이드맨이었던 카를로스 알로마(Carlos Alomar) 등과 함께 투어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존 레논, 카를로스 알로마와 함께 작곡한 'Fame'은 첫번째 미국 싱글 차트 1위가 된다. LA로 활동무대를 옮긴 보위는 니콜라스 뢰그(Nicolas Roeg)의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The Man Who Fell to Earth)>에 주연을 맡으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쌓아간다. 76년에는 소울을 도입한 아방 팝 앨범 [Station To Station]을 발매하는데 이즈음 그의 귀족적인 우아함을 비유해 'thin white duke'라는 별명이 생겨난다. 77년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브라이언 이노와 같이 살면서 독일 일렉트로닉 음악에 경도된 실험적 음반 [Low]와 [Heroes]를 발매한다. 한편 이기 팝의 컴백 작품들인 [The Idiot]와 [Lust for Life]를 도와주고 이기 팝의 키보디스트로 투어에도 참여한다. 77년에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킴 노박과 함께 영화 Just A Gigolo에 출연한다. 79년에는 이노와 함께 뉴욕, 스위스 그리고 베를린에서 앨범 [Lodger]를 녹음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Scary Monsters]와 함께 이 앨범의 몇몇 곡은 비디오 클립으로 제작되어 초창기 MTV를 통해 방영되었다. 80년초 그의 스튜디오에서의 활동이라면 퀸과 함께 한 곡 'Under Pressure'의 녹음과 영화 <캣 피플(Cat People)>의 테마 녹음 뿐이었다.
전작을 마지막으로 RCA와의 계약을끝낸 그는 83년 EMI와 계약을 맺고 쉬크(Chic)의 기타리스트인 나일 로저스(Nile Rodgers)를 프로듀서로 기용하고 당시만 해도 무명이던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을 리드 기타리스트로 기용한 [Let's Dance]를 발매한다.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한 이 작품에 이어 보위는 비슷한 성향의 앨범 [Tonight]을 이듬해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매우 잘 팔려나갔으며 'Blue Jean'이 싱글로 히트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꾸준히 팔리는 앨범이 되지 못했고 리뷰도 나빴다. 85년에는 믹 재거와 함께 라이브 에이드를 위해 마사 앤 반델라스의 'Dancing in the Street'를 녹음했다. 한편으로 <인투 더 나이트(Into the Night)> (85), <앱솔루트 비기너스(Absolute Beginners)>, (86), <라비린스(Labyrinth)> (86) 등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87년에는 앨범 [Never Let Me Down]을 발매하는데 이것 역시 안 좋은 평을 들었다. 모음집인 [Sound + Vision]은 성공적이었지만 다음 프로젝트인 틴 머신(Tin Machine)은 보위 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지 못했던 활동으로 기록된다. 틴 머쉰은 셀프타이틀 앨범과 두 번째 앨범 [Tin Machine II]을 발매했는데 기타리스트 리브스 가브렐스(Reeves Gabrels)와 같이 한 이 록 콤보는 거의 무시당했다고 해도 좋은 정도의 관심만을 얻었다.
보위는 그 2년 뒤인 93년 섬세하고 소울풀한 팝 앨범 [Black Tie White Noise]로 다시 솔로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나일 로저스와 함께 틴 머신 이후 지금까지 그의 협력자가 된 리브스 가브렐스도 참여했다. 95년 그는 이노와 다시 손잡고 인더스트리얼 록이 가미된 컨셉트 앨범 [Outside]를 발매하고 어린 얼터너티브 팬들의 청취를 확보하기 위해 나인 인치 네일즈와 함께 투어를 하기도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96년 그는 재빨리 다시 스튜디오로 들어가 새 앨범 [Earthling]의 작업에 착수한다. 이 앨범은 테크노와 드럼 앤 베이스 등의 음악적 요소들을 도입했는데 비교적 괜찮은 리뷰를 받은 편이었지만 테크노 순수주의자들로부터는 자신들의 서브컬처를 이용해먹은 기회주의자란 비판을 들었다. 이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보위가 록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해왔던 활동들은 펑크와 뉴 웨이브, 고스 록 그리고 뉴 로맨틱스, 일렉트로니카 등 많은 서브장르들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2003년 신보 [Reality]를 발표하는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글램 록의 선구자'이자 '록 계의 카멜레온'이란 별명을 얻고 있는 데이빗 보위는 그 창조적이고 신비한 이미지만큼이나 영화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줬다. 그리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결코 평범한 작품은 아니었다. 대부분 유명 감독들의 영화이거나 기괴한 판타지 영화, 아니면 논란을 일으켰거나 예술을 다룬 것들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배역 역시 '변신의 대가'답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었으며, 보위는 결코 전문 배우 못지 않은 폭 넓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1976년 컬트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로 배우로서 데뷔한 보위는 3년 뒤 마를렌 디트리히의 마지막 출연작 [사랑하는 플레이보이]에서 첫 주연을 따내며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든다. 1983년에는 외설논란을 낳았던 [감각의 제국]으로 이름난 일본 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국제적 프로젝트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셀리어스 소령을 연기했다. 영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배우와 가수 등 다국적 멀티 연예인들이 출연했던 이 영화에서 보위는 주역급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냈으며, 그밖에 괴짜 감독 겸 배우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유명한 일본 음악인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류이치 사카모토는 음악까지 담당했다).
조지 루카스가 제작한 판타지 영화 [라비린스](1986)에서는 주인공 소녀 제니퍼 코넬리를 괴롭히는 못된 마왕 역으로 등장했으며, 그는 여기서 신비로운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려 기독교계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문제작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예수(윌렘 데포 분)를 심문하는 이탈리아 관리 빌라도 역을 열연했다. '80년대 미국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27살로 요절한 흑인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전기 영화 [바스키아](1996)에서는 바스키아를 후원했던 팝 아트의 원조 앤디 워홀로 분하기도 했다. 한편 데이빗 보위는 [라비린스] 이전에도 [스노우맨]이나 프랑스 영화 감독 레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의 영화음악을 맡은 바 있다.

1. 쥬랜더 (Zoolander) 2001년
2. 라이스 아저씨의 비밀 (Mr. Rice's Secret) 2000년
3. 골디 (Goldie: When Saturn Returns) 1998년
4. 유혹 (The Hunger) 1997년
5. 바스키아 (Basquiat) 1996년
6. 트윈 픽스 (Twin Peaks: Fire Walk With Me) 1992년
7. 루시는 마술사 (The Linguini Incident) 1991년
8.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88년
9. 라비린스 (Labyrinth) 1986년
10. 철부지들의 꿈 (Absolute Beginners) 1986년
11. 밤의 미녀 (Into the Night) 1985년
12. 악마의 키스 (The Hunger) 1983년
13. 전장의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년
14. 사랑하는 플레이보이 (Just A Gigolo) 1979년
15.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The Man Who Fell To Earth) 1976년

본명이 데이빗 존스(David Jones)인 그는 뮤지션으로의 경력을 시작함에 있어 몽키스(The Monkees)의 데이비 존스(Davy Jones)와 필연적으로 겪게 될 혼돈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작부터 존경해 마지 않던 보위 나이프(Bowie Knife)에게서 이름을 빌려 온 것.

'자극의 시대'를 관통했던 글램 록의 창시자. 1970년대 초엽, 데이빗 보위는 화려하게 음악 무대에 입성했다. 불세출의 명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Spiders From Mars](1972)를 통해 남녀 일체상의 파격을 부르짖으며 단번에 진보적인 록 뮤지션으로 급부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동성이자 초월자인 '지기'로 분해 시각적 충격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퍼스널리티는 즉각 록의 뉴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노래와 연기를 망라하는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글램 록 혹은 글리터 록이 태동한 것이었다.
데이빗 보위는 그러나 곧바로 지기의 옷을 벗어 던졌다. 그가 끊임없이 음악 영토의 이동을 시작한 지점이다. 1974년의 [Diamond Dogs]에서는 세상의 예언자로, 1975년의 [Young Americans]에서는 미국 음악의 추종자로, 1977년의 [Low]에서는 전자 음악 은둔자로, 1983년의 [Let's Dance]에서는 가벼운 댄서로, 1995년의 [Outside]에서는 탐정으로.
자연스레 한편에서 '기회주의자', '카멜레온 뮤지션'이라는 배격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그가 창조해낸 음악이 항상 예측을 불허했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만큼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는 이에 관해 1993년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다. 그래서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난 스튜디오에 들어가 우선 머릿속에 담은 구체적인 생각들이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를 본다. 밖에서 누군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테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곡을 쓴다."
그는 이처럼 인기가 주는 헛된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자연스레 그것이 주는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실제로 [Let's Dance]의 매머드 히트 이후, 그것을 "풍선 검 포장지가 된 기분이었다."라며 부끄러워한바 있다. 바로 데이빗 보위가 현재까지도 불멸의 아티스트로 대접받는 이유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예술적인 자존심은 결코 꺾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가수이자 작곡가, 색소폰과 기타 연주자이자 프로듀서, 그리고 영화배우라는 다양한 경력을 지닌 데이빗 보위는 1947년 1월 8일, 데이빗 로버트 존스(David Robert Jones)라는 본명으로 런던의 브릭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가 듣던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의 싱글을 듣고 영국 최고의 록 스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열 세 살이 되던 해부터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콘래즈(Kon-Rads)라는 스쿨 밴드를 조직하여 음악 활동을 해나간다.
학창 시절 그는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 한 친구와 싸우던 도중 컴퍼스로 오른쪽 눈을 찔려 실명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서로 다른 양쪽 눈의 색깔은 물론 이후 그가 지니는 독특한 스타일 또한 이 사고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열 일곱 살 되던 해인 1964년, 학교 친구인 조지 언더우드(George Underwood)와 함께 결성한 밴드 킹 비스(King Bees)는 <데카(Decca)>의 산하 레이블인 <보컬리온(Vocalion)>을 통해 싱글 Liza Jane을 발표하여 약간의 관심을 얻게 된다. '65년, 데이빗은 그룹 매니시 보이스(Manish Boys)와 함께 I pity the fool을, 로워 서드(Lower Third)와 You've got a habit of leaving을 <팔로폰(Parlophone)>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다. '65년 9월, 마키 클럽에서 로워 서드의 공연 모습을 본 케네스 피트(Kenneth Pitt)는 데이빗의 매니저를 자청했고 그는 이후 데이빗의 경력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1966년 1월, 밴드가 <파이(Pye)> 레코드사와 계약을 이룬 이후 데이빗은 이름을 '보위'로 바꾸는데, 미국의 로큰롤 그룹인 몽키스(Monkees)에 자신과 이름이 같은 데이비 존스(Davy Jones)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워 서드의 새로운 싱글 Can't help thinking about me는 곧 런던의 해적 방송을 통해 가장 많이 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으나 밴드는 곧 해체되었고 데이빗은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66년 4월, 데이빗 보위의 솔로 데뷔 싱글 Do anything you say가, 그리고 8월에는 I dig everything이 발매되었다. 하지만 <파이> 레이블로부터 떠나야 했던 그는 <데카> 산하의 ‘실험음악’ 전문 레이블 <데람(Deram)>과 계약을 이루고 12월에 첫 싱글 Rubber band를 발표했다. 이듬해 4월에 발매된 싱글 The laughing gnome은 그의 재능이 빛나는 독창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고, 그것은 6월 발매되는 데뷔 앨범 [DAVID BOWIE]로 이어진다.

데뷔 앨범 발매 이후 데이빗은 연극배우인 린제이 켐프(Lindsay Kemp)로부터 마임과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이후 연기자로서 활동하는 데, 그리고 연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공연을 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68년 7월,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허미온 파딩게일(Hermione Farthingale)과 베이시스트인 존 허친슨(John Hutchinson)과 함께 페더스(Feathers)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들은 자주 제작 앨범을 발매하고 런던의 클럽과 대학가를 돌며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6개월만에 해산되고 만다. '69년 6월, <필립스(Philips)> 레이블과 계약을 이룬 데이빗은 브리티시 록계의 명 프로듀서인 거스 더지온(Gus Dudgeon)과 함께 [Space oddity]의 녹음에 들어갔다. 지구로의 귀환 대신 우주 공간을 표류하는 톰 소령(Major Tom)과 지상 관제탑과의 대화로 진행되는 이 서사적인 곡은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발매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곡은 여러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앞다투어 소개되었고 BBC-TV의 천문학 프로그램의 주제곡으로 사용되는 등 인기를 얻으며 영국 차트 5위를 기록한다. 그리고 11월, 그의 두번째 앨범이자 <필립스>에서의 첫 앨범 [Space oddity]가 발매된다.

1970년 2월, 데이빗은 베이스를 연주하는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와 드러머인 존 캠브리지(John Cambridge), 기타리스트 믹 론슨(Mick Ronson)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백 밴드 하이프(Hype)를 결성하여 공연을 시작한다. 3월에는 새로운 싱글 The prettiest star가 발매되었고, 그는 아트스쿨의 학생이었던 안젤라 바넷(Angela Barnett)과 결혼을 했다. 또한 [Space oddity]로 이보 노벨로(Ivor Novello)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이후 닥칠 전성기를 예고하는 듯한 일들 속에서 11월, 데이빗의 세 번째 앨범인 [The Man Who Sold The World]가 영국에 앞서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1972년은 보위에게 있어 로커인 '지기 스타더스트'로서뿐 아니라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유능한 프로듀서로서 자리한 해이기도 하다. 그는 루 리드(Lou Reed)의 걸작 앨범 TRANSFORMER와 록 그룹 모트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ALL THE YOUNG DUDES를 프로듀스하여 각각 싱글 Walk on the wild side와 All the young dudes를 히트시킨다. 이어 이듬해에는 펑크 록의 명반으로 꼽히는 이기 팝의 RAW POWER를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 일본 투어 등 활발한 공연 활동이 이어졌고, 재발매된 싱글 Space oddity가 미국 차트 15위에 오름으로써 그의 첫 미국 내 20위 권 히트곡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첫 번째 미국 투어 중 쓴 노래들로 이루어진 새 앨범 [Aladin Sane]가 발매된다.

혁신적인 무대 매너와 전에 없던 독특한 음악 스타일로 확고한 자신의 위치를 가지게 된 데이빗 보위는 '73년 7월, 런던의 해머스미스 오데온(Hammersmith Odeon)에서 있었던 콘서트를 끝으로 더 이상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발표를 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공연 후 무대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공연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그건 투어의 끝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게 될 마지막 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고 이런 언급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은퇴 선언’은 ‘데이빗 보위’가 아닌 그의 막강한 페르소나였던 ‘지기 스타더스트’의 은퇴에 다름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무대에서의 인기에 힘을 입어 HUNKY DORY에 수록되었던 싱글 Life on Mars?가 다시 영국 차트 3위에 올랐고, 이어 이색적인 새 앨범 [Pinups]가 발매된다.

DIAMOND DOGS의 발매 후 행한 투어 중 '74년 7월에 있었던 필라델피아 타워 극장에서의 실황을 담은 더블 라이브 앨범 DAVID LIVE가 발매되어 평단의 호평과 영국 차트 2위를 기록했다. 이 공연에서는 작곡가로 유명한 마이클 카멘(Michael Kamen)이 키보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재즈 색소폰 주자인 데이빗 샌본(David Sanborn)이 참여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5년 2월, 그는 니콜라스 로에그(Nicolas Roeg) 감독의 SF 영화 <지구로 떨어진 사나이(The Man Who Fell To Earth)>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어 배우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원래 이 배역은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 유명한 피터 오툴(Peter O'Toole)이 맡을 예정이었는데, 데이빗은 자신의 행성으로 물을 가져가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구로 온 외계인의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76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작으로 상영되었으며 데이빗 보위는 미국 SF 판타지와 공포영화 협회로부터 남우주연상을, 니콜라스 로에그는 뉴욕 영화협회로부터 감독상을 수상했다.

보위의 첫 번째 히트곡 모음집인 CHANGESONEBOWIE가 발매되어 영국 차트 2위와 미국 차트 10위를 기록했다. '76년10월, 그는 이기 팝과 함께 코케인 중독의 치유를 목적으로 3년 간 은둔하기 위해 서베를린으로 이주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의 음악은 또 한 번의 전기(轉機)를 맞이하는데, 천재 키보드 주자이자 전위음악가인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1978년, 데이빗 보위는 데이빗 헤밍스(David Hemmings) 감독의 영화 <저스트 어 지골로(Just A Gigolo)>에 캐스팅 된다. 이후 유진 오만디(Eugene Ormandy)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프로코피에프의 PETER AND THE WOLF에 참여하여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리고 그 해 월에 필라델피아의 스펙트럼 극장에서 행했던 공연 실황을 담은 더블 라이브 앨범 STAGE가 발매되어 영국 차트 5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79년, 브라이언 이노와의 세 번째 앨범 [LODGER]가 발매된다.

1980년 2월, 데이빗은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이혼을 했다. 이후 기형아로 태어나 비극적인 삶을 산 존 메릭(John Merrick)의 삶을 다룬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의 주연을 맡아 무대에 선다. 그는 이 역할로 큰 갈채를 받았고 결국 브로드웨이 무대에까지 진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를 이룬 새로운 앨범 [Scary Monsters(And Super Creeps)]가 발매되었다.

1981년 2월, <데일리 미러(Daily Mirror)> 지가 후원하는 팝 어워드에서 데이빗 보위는 최우수 남자가수에 선정되었다. 7월에는 영화 <캣 피플(Cat People)>의 주제가 녹음에 들어갔고, 그룹 퀸(Queen)과 함께 싱글 Under pressure를 발표하여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새로운 컴필레이션 앨범 CHANGESTWOBOWIE가 발표되었고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1983년 1월, 그는 뉴욕의 와 1천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계약금을 받고 5년 기한의 계약을 맺는다. 곧 3년만의 새 앨범 [Let's Dance]가 발매되었다.

데이빗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로서 행한 해머스미스 오데온에서의 1973년 마지막 공연은, 밥 딜런의 영국 방문 필름인 <뒤돌아보지 마(Don't Look Back)>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디에이 펜베이커(D.A. Pennebaker)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었지만 사운드트랙의 발매와 함께 뒤늦게 공개되었다. 이듬해인 '84년 2월, 그는 제 3회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 영국 최고의 남성 아티스트로 선정된다. 그리고 9월에는 MTV 뮤직비디오 시상식에서 China girl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발매된 앨범 TONIGHT은 평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지만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11위에 오르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이기 팝과 티나 터너(Tina Turner)가 게스트로 참여한 이 앨범은 신서사이저 사운드가 넘쳐날 정도로 과용되었으며, 싱글 Blue jean을 탄생시켰다. '85년에 들어서는 팻 메스니 밴드(Pat Metheny Band)와 영화 <매와 눈사람(The Falcon And The Snowman)>의 주제가인 This is not America를 발표하였고,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Mick Jagger)와 듀엣으로 마사 앤 더 반델라스(Martha & The Vandellas)의 Dancing in the street를 녹음한다. '85년 7월, 라이브 에이드(Live Aid)에 출연하였고 Dancing in the street는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7위를 기록한다. 이듬해에도 조지 루카스(George Lucas)가 제작한 <미궁를 비롯한 영화 출연 및 주제가를 부르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고 1987년, 새로운 앨범인 NEVER LET ME DOWN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데이빗 보위의 아이디어와 창작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녹음된 졸작이라는 평가를 얻었으나 영국 차트 6위와판매 면에서는 골드를 기록했다.
'88년에는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예수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에 출연하여 빌라도의 역을 연기했다. 그 즈음 그는 음악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필요로 했고 결국 1989년 5월, 틴 머신(Tin Machine)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밴드의 라인업은 기타리스트인 리브스 가브렐스(Reeves Gabrels), 그리고 이기 팝과 토드 런그렌(Todd Rundgren)과 활동한 바 있는 베이시스트 토니 세일즈(Tony Sales)와 드러머 헌트 세일즈(Hunt Sales) 형제로 구성이 되었다. 존 레논의 Working class hero가 수록된 이들의 셀프 타이틀 데뷔작은 영국 차트 3위와 미국 차트 28위를 기록했다. 강한 리프의 기타 사운드를 특징으로 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결국 그의 프로젝트는 상업적 실패를 기록했고 두 번째 앨범 TIN MACHINE II ('91)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92년 말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의 <트윈 픽스(Twin Peaks)>에 출연한 데이빗 보위는 '93년, <새비지(Savage)>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7년만의 솔로 앨범인 BLACK TIE WHITE NOISE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나일 로저스의 프로듀스와 옛 동료인 믹 론슨의 기타 연주가 포함된(믹 론슨은 앨범이 발표되고 얼마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후 TV 시리즈의 사운드트랙인 BUDDHA OF SUBURBIA ('93)가 발표되었고 1995년, <버진(Virgin)> 레코드와 계약을 한 데이빗 보위는 새 앨범 [Outside]를 발표한다.
16년만에 브라이언 이노와 결합하여 발표한 이 앨범은 기괴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컨셉트 앨범인데, 데이빗은 앨범에서 일곱 명의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앨범은 영국 차트 8위와 미국 차트 21위를 기록한다. ’97년에 발표된 EARTHLING은 그야말로 지치지 않는 그의 재능과 실험성을 고루 담아낸 역작이었다. 샘플링을 이용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와 테크노의 요소를 포함한 이 앨범은 '98년의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록 앨범과 최우수 얼터너티브 연주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9년,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발표된 새 앨범 HOURS...는 현대적인 요소와 과거의 록 사운드가 적절히 조화된 빼어난 사운드를 담고 있다. 두드러지는 샘플링과 키보드 사운드는 보다 몽롱하고 풍성한 분위기를 이루어내는데, 다소 둔탁해진 목소리를 제외하면 음악을 통해 뮤지션에게 쌓여 가는 세월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채 끊임없는 실험성과 독창적인 시도로 늘 듣는 이들에게 짙은 감동을 전해주는 데이빗 보위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뮤지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램 록(Glam Rock)과 글리터 록(Glitter Rock), 그리고 시어트리컬 록(Theatrical Rock)에 이르는 영역에서 데이빗 보위의 역할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이 장르들은 모두 음악적인 면보다는 무대 매너나 복장 등 외형적인 요소에 의해 분류된 것이기 때문에 음악 외적인 면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는 음악적으로도 가장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사운드를 만들어낸 아티스트였다. '70년대를 관통하는 (각 앨범마다 변형된)그의 페르소나(persona)는 '뮤지션'이라는 범주 내에서만 생각할 때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그 근원은 '30년대 무성영화 시절 독일의 표현주의의 영향하에 있다고 여겨진다.

194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데이빗 로버트 존스로 어렸을 때는 색스폰을 즐겨 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앨범 The World Of David Bowie를 67년에 발표하며 음악계에 등장한 그는 음악적으로는 영국에서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으나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음악가로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그의 입장을 어느 정도 보여 주었다. 그는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은 예술적인 편력을 보여 판토마임과 명상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이 때 얻은 예술적인 영감은 그의 음악적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1969년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 시키고 있을 때, 데이빗은 「Space Oddity」로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영국 차트 5위까지 올라간 이 앨범은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특이한 음색과 전위적 색채의 사운드를 멋지게 조화시켜, '스페이스 사운드'의 효시가 되었다. 마치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미아와 같이 데이빗의 이미지는 당시까지의 팝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 데이빗 보위는 70년에 The Man Who Sold The World을 발표한다. 자신이 여왕으로 분장한 앨범 표지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앨범은 결국 글램 록 이라는 장르를 창조했고 마크 볼란의 T-렉스와 엘리스 쿠퍼가 추종 세력으로 떠오른 글램 록은 이후 펑크 뮤직과 뉴 웨이브 아티스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후 그는 2장의 앨범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그 첫번째 앨범은 싱글 Changes가 들어 있었던 Hunky Dory였고 나머지 한 장이 그를 확고 부동한 슈퍼스타로 만들어 준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 The Spiders From Mars이다. 그는 이 앨범에서 자극을 원하는 세대들을 위해 방탕하고 스타덤에 굶주려있으며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적인 허구의 인물인 지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는 지기를 자신의 이미지에 이입시키기 위해 외계인 의상을 입었고 오렌지 색으로 머리를 염색을 했으며 입술에 짙은 립스틱을 발랐다. 이러한 그의 모습과 음악은 당시의 음악계에 큰 충격을 가져 다 주었고 당시에 행해졌던 영국 순회 공연을 통해 보위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리고 당시 그의 이런 활동은 인기뿐 아니라 이 후 영국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의 공연을 보며 과열반응을 보였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이 후 쇼킹한 지기의 이미지를 되살린 펑크록을 창조하게 되었다. '지기' 이후 데이빗은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힌트를 얻어 원시적이며 크로테스크한 재킷이 인상적인 74년 작 Diamond Dogs를 내놓으며 모든 분장을 지운 순수 록 스타로 나타났다. 그리고 75년 작 Young American에서는 필라델피아 소울 사운드를 받아들여 흑인 음악과 라틴 음악, 그리고 디스코를 선보였다. 수록곡 중 'Fame'은 존 레논과 합작한 것으로 최초로 차트 넘버원을 기록했다. 이 시절 데이빗 보위는 많은 뮤지션들과 음악적인 교류를 가지며 뛰어난 앨범들을 제작함으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한 껏 내뿜는다. 모트 더 후플의 첫 히트 곡 'All The Young Dudes'의 작곡과 앨범의 제작을 맡았으며, 루 리드의 두 번째 솔로 작 Transformer와 이기 팝의 Raw Power도 제작해 주었다. 이 앨범들 모두 록계에서 명반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앨범들이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기록될 록시 뮤직 출신의 전위음악가 브라이언 이노와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밖에 킹 크림슨의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과 Scary Monsters를 레코딩했고. 81년 퀸과의 합작 싱글 'Under Pressure'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팻 메스니가 음악을 담당한 영화 The Falcon & The Snowman의 주제곡 'This Is Not America'를, 믹 재거와 'Dancing In The Street'를 각각 레코딩하여 히트를 기록했다. 81년에는 말콤 맥도웰과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Cat People의 사운드트랙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83년 데이빗 보위는 그룹 쉭의 나일 로저스와 손잡고 Let's Dance로 새로운 댄스 록을 선보이며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을 통해 그는 동명 타이틀 곡과 China Girl, Modern Love등을 히트 시키며 명실 상부한 팝스타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의 이름과 음악은 전세계의 팝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후에 그는 이 앨범의 상업적인 면에 상당히 껄끄러운 반응을 보였으나 이 시절의 데이빗 보위를 좋아하는 팬들도 수없이 많이 있다. 같은 성향의 앨범인 Tonight과 Never Let Me를 각각 84년과 87년에 계속해서 발표하던 그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바로 Tin Machine의 결성이다. 숯한 화제를 뿌리며 2번째 앨범까지 발표한 후 그는 90년대로 들어와 다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95년과 97년에 발표된 1.Outside와 Earthling은 90년대의 음악적 트렌드를 잘 간파한 앨범으로 어떠한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음악적 감각을 선보여 다시 한번 그의 역량을 입증해 주었다. 특히 1.Outside 앨범에 수록된 I'm Deranged는 컬트 감독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 Lost Highway에 쓰여 주목 받았다. 그리고 그는 99년 Virgin 레코드와 계약을 하며 다시 한 번 예전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짙은 분장, 괴이한 의상, 색다른 무대 조명과 연출로 스페이스 뮤직 또는 글리터 록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으며, 청소년들의 유니섹스 패션을 유행시키기도 한 데이빗 보위는, 1947년 1월 8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색소폰을 즐겨 연주했다. '67년부터 발표한 앨범 The world of david bowie, David bowie, The man sold the world, Hunky dory 등을 발표했으나 저조한 판매를 보였다. 그러나 '72년 히피들의 사랑과 평화를 표방하며 발표한 앨범 Later issued as space oddity는 공개되자마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동명 싱글이 '73년 미국에서 첫 히트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그 후 돌연 은둔 생활을 18개월 동안 했으며 '70년 다시 앨범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여왕으로 분장한 앨범 표지로 다시 한번 논란을 일으키며 글리터 록이란 어휘를 만들어냈다. '71년 [RCA]에서 발표한 앨범 Hunky dory는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으며 싱글 Changes를 준 히트시켰다. 이후에 발표된 앨범들인 Diamond dog, David live, Ziggy stardust 등이 골드를 획득하면서 그는 최상의 인기를 누렸다.

데이빗 보위가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앨범 David bowie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 '67년도의 일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97년 벽두에 그는 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그 지칠줄 모르는 활동이라는 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는 참 대단한 사나이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음악이 주류(主流)의 록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리듬을 창조해 내는 리프와 멜로디, 기타 솔로, 그리고 코러스 등으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구조. 그것은 블루스를 바탕으로 하는 록의 본 모습dl다. 그것이 올맨 브러더스 밴드(Allman Brothers Band)이건, 두비 브러더스(Doobie Brothers)이건, 아니면 오아시스(Oasis)이건 간에 대중은 그들의 음악에서 바라던 바의 록이 갖는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보위의 음악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자신의 표현에 있어서, 어찌보면 음악이 부수적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때는 그의 음악을 가리켜서 글램 록(Glam Rock)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조는 중성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짙은 화장이나 화려한 의상을 지니고 극적인 시각적 효과를 자아내는 무대를 시도했으며, 이것은 다분히 세기말적인 환각과 퇴폐의 분위기를 제공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다분히 이미지와 관련된 록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마크 볼란(Marc Bolan)이 이끌었던 그룹 티 렉스(T-Rex)와 함께 데이빗 보위는 이 분야의 선두 주자였다. 따라서 보위의 음악은 음악 자체도 참으로 시각적인 분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각종 이펙터의 효과적인 사용과 불협 화음을 교묘히 배치하는 그의 음악 속에는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초기 로큰롤, 현대 음악의 단편적인 모습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 모더니즘 그 자체였다. 존재하는 모든 현대적 현상들의 짜깁기.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과의 관련성을 떠올린다면 더욱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실험은 그 충격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오래가기가 힘들다. 언제 어디서나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론이다. 루 리드(Lou Reed)의 벨벳 언더 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나 데이빗 번(David Byrne)의 토킹 헤즈(Talking Heads)같은 팀들이 모두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제는 그저 후배들의 음악 속에 길게 드리우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보위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그 짓(?)을 해대고 있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70년대부터 '90년대의 후반을 치닫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작품의 생산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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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OR
과연 AOR이란 성인 중심의 록(Adult Orientated Rock) 인가, 음반 중심의 록(Album Orientated Rock) 인가 혹은 앨범 위주의 라이오(Album Orientated Rock)를 약칭하는가? 오해하기 쉬운 이 용어는 청소년들보다는 오히려 성인들에게 표적을 두었다. AOR은 종종 고음으로 조정된, 완벽한 음조의 보컬의 하모니, 경쾌한 기타 솜씨 그리고 키보드의 사용 등으로 이루어진다. 눈속임과 이미지는 극소화시키고 음악적인 기교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강조하여 표현한다. 배열이나 생산적인 테크닉은 매우 정교하다. 밴드로는 Babys, Boston, Kansas, REO Speedwagon, Toto 등이 있다.

2. Avantgarde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밴드는 그들의 노래 안에 모순된 하부 구조처럼 보이는 애드 혹 병렬로 특정지어 진다. 그들은 종종 매우 즉흥적인 편곡과 가장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메틀 장르의 전초적인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밴드로는 Celtic Frost, Golgoths, Gong, Henry Cow, Ozric Tentacles 등이 있다.

3. Blues Rock
John Mayall, B.B. King, Eric Clapton, Jeff Beck 과 같은 블루스 대가들로부터 영향받아 그 열망을 그려내는 모든 아티스트들을 위한 총괄적인 명칭. 헤비메틀은 이러한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진보하면서 발전되었다. 좀더 심도있는 다양화와 기술적인 혁신은 오늘날 이 장르를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스타일을 끌어 냈다. 밴드로는 Bad Company, Spooky Tooth, Free, Led Zeppelin 등이 있다.

4. Boogie
가장 단순한 세 개의 코드 배열이 노래를 구성하는 기본을 형성한다. 자주 로큰롤이나 블루스의 리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기본적인 구조는 여러번 반복되고,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리드 기타를 중단 시키기도 한다. 종종 제한된 가사의 감각을 발휘하여 4분도 안되는 짧은 곡들을 작곡하기도 한다. 섹스, 마약, 파티 등이 주된 열망의 근원이 된다. 이 용어는 근본적인 재즈에 바탕을 둔 부기 우기(Boogie Woogie)에서 파생되었고, 여덟 마디의 기본적인 구조를 사용하여 피아노 연주를 가미한 형태를 참조하기도 한다. 밴드로는 AC/DC, Foghat, Spider, Status Quo 등이 있다.

5. Crossover
그들의 작품 속에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하부 장르들을 통합시킨 어떤 밴드에게도 적용되는 용어이다. 이것은 잠재적인 청중들이 더욱 엄격하게 정형화되어 감에 따라 거의 두 배가 될 때 상업적인 성공의 변화를 가중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밴드로는 Faith No More, Red Hot Chili Peppers 등이 있다.

6. Doom Metal
데스메틀에서 진화된 하부 장르의 하나이다. 계속해서 속도를 증가시키는 대신, 둠 메틀 주자들은 그와는 반대적인 성향을 따른다. 이들의 노래 구조는 느리고 잔인하며 전율적인 리프 그리고 마음속까지 저미는 파워코드를 사용한다. 그 노래들의 경향은 험악한 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초기 블랙 사버스의 스타일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밴드로는 Cathedral 등이 있다.

7. Electronic Rock
70년대 중반에 두드러진 움직임으로, 록음악에서 기술적이고 전기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성장을 보였던 음악 조류이다.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하여 모든 음역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신디사이저는 그들의 기본이 되었다. 종종 작품들은 일렉트로닉한 허밍, 기계 잡음, 비명 소리로 구성되는 긴 악기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진다. 그 기원은 미니멀리스트, 아방가르드 대개는 독일에서 비롯된다. 밴드로는 Can, Tangerine Dream, Trace 등이 있다.

8. Folk Rock
외관상으로는 매우 이상한 두개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료가 섞여 있는 듯한 크로스오버 스타일이다. 포크의 색깔은 메탈적인 문장의 완전한 음역을 사용함으로써 변형되고 또한 플루우트, 바이올린, 만돌린, 바아순을 사용하여 증음시킬 수 있다. 밴드로는 Gentle Giant, Gryphon, Horslips, Jethro Tull, Skyclad 등이 있다.

9. Garage Rock or Grunge Rock
이 용어는 처음엔 60년대 말에 활약한 미국 그룹을 지칭했다. 그들의 음악에 기술적인 부족과 음악적인 궤변의 묘사가 사용되었다. 공격적인 면과 에너지, 격정이 그들의 핵심이었다.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어프로치가 어느 정도 왜곡된 기타 연주에 의해좌우된다. 밴드로는 Iggy And The Stoogy, MC5, Velvet Underground 등이 있다.

10. Glam Rock
글램 록의 기원은 7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당시 활동한 스래이드, 티 렉스, 개리 글리터 그리고 스위트 등의 그룹들이 무대를 장악했었다. 팝 록을 터보로 과급한 연주를 하며서, 그들은 아이라이너, 립스틱, 플랫폼 부츠와 난폭한 무대 의상을 입었다. 그 음악은 종종 섹스를 연상시키는 표현, 서민적인 생활이 느껴지는 이미지 그리고 매우 전염적인 코러스를 제외한 반복으로 특징지워진다. 그 때문에 그들의 기본적인 스타일은 더욱 난해하고 힘있는 형태를 록 밴드에게 전수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변형될 수 있었다. 밴드로는 Hanoi Rocks, New York Dolls, Poison, Motley Crue 등이있다.

11. Grind Core
헤비메틀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이것은 스래쉬, 하드 코어, 펑크의 합성물에서 영향을 받아 초래되었다. 노래들은 전형적으로 몇 개의 순간에서 단지 두 번째가 지속되고, 종종 가사적으로 기민함을 보인다. 흐름의 초고속 스피트에서의 오점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로 표현한다. 그것은 누군가 음식 프로세서형의 백비트 안에 레이저 칼날을 가진 마이크로폰을 통해 그들의 위속 내용물이 비어있는 듯한 소리를 낸다. 밴드로는 Napalm Death 등이 있다.

12. Hard Core
하드 코어는 최후의 극단적 형태로 받아들여진 펑크 사조를 대표한다. 신랄하고 종종 새로운 정책적 장식음이 일차원적이고 업템포의 음악적 배경을 통해 쏟아지고 있다. 80년대에 이 기본적인 형태는 개조되고 메틀화되어 그 장르이 인기도와 평판에서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그 명성이 증폭되었다. 밴드로는 D.O.A. 등이 있다.

13. Jazz Rock
이름이 암시하듯, 이것은 하드 록의 윤과안에서 재즈적인 스타일의 각색과 뉘앙스를 풍긴다. 작품들은 길고 다양한 특색을 나타내며, 때때로 제멋대로의 악기의 솔로 연주가 끼어 있다. 게다가 사운드는 스트링, 브라이스, 키보드 등의 악기가 보태어져 웅장해지기도 한다. 밴드로는 Brand X, Fire Merchants, Mahivishnu Orchestra, Baker Gurvitz Army 등이 있다.

14. NWOBHM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이 약성어는 펑크의 기류가 쇠퇴함에 따라 79년부터 81년까지 하드록과 헤비메틀을 다시 전하기위해 받아들여졌다. 일반적으로 트윈기타 어프로치와 업텝포의 넘버들로 특징을 이루는데, 음악 자체는 주다스 프리스트, 딥 퍼플, 블랙 사버스를 포함하는 헤비메틀의 '첫번째 흐름'에서의 열망을 그려낸다. 이 새로운 토대에서, 그 움직임은 하부 장르의 과잉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다양해졌다. 밴드로는 Diamond Head, Iron Maiden, Def Leppard, Saxon 등이 있다.

15. Pomp Rock
다이나믹한 편곡과 기교적인 향상으로 궤변적이고, 기술적으로 복잡한 록 음악을 하는 부류에게 적용되는 용어이다. 이 장르는 대개 길며, 클래식의 영향을 받는 비법을 갖춘 작품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수준 높은 음악가 정신, 뛰어나고 완벽한 보컬의 조화, 그리고 음악의 대가들이 펼치는 악기의 연주는 이 스타일의 생기있는 구성요소이다. 밴드로는 Status Quo, Whitesnake 등이 있다.

16. Psychedelia
이 용어는 환각을 일으키는 물질에서 그들의 열망을 끌어내려는 60년대말/70년대 초의 밴드들에게 적용되었다. 사이키델리아란 탁월하게 블루스에 바탕을 둔 록이지만, 외형은 뜨거운 성교, 종교적이거나 정신적인 중요성을 확산시키고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구성에 있다. 밴드들은 종종 그들의 화려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을 통해 이상하고 비범한 이름을 가장하여 삶의 의미를 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장르는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 주요한 것들은 CD로 재발표 하려고 추진 중이다. 밴드로는 Syb Barrett And Early Pink Floyd, Electric Tolite, T.2., Van Der Graaf Generater 등이 있다.

17. Pub Rock
74년 부터 75년 동안 펑크 록의 폭발적인 증가에 선행한 움직임이다. 음악은 한 번 이상 술집과 클럽에 등장하여 록 스타들과 그들의 팬들 사이의 장벽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퍼브 록 그룹들은 R&B, 로큰롤 그리고 블루스의 다양한 결합에 의존한다. 밴드로는 Brinsley Schwarzs, Duks Deluxe, Dr. Feelgood, Kokomo 등이 있다.

18. Retro Rock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요소들이 모인 사조이다. 이 용어는 롤링 스톤즈, 못트 더 후플, 페이스, 킹크스, 애니멀스, 야드버드의 음악에서 그들의 주된 근원적 열망을 끌어내려는 그룹들에게 적용된다.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장비의 이점과 함께 재생되었다. 밴드로는 Black Crowes, Quireboys, Crybabys, Thunder 등이 있다.

19. R 'N' B
리듬앤 블루스의 약칭이다. 블루스와 로큰롤의 기본적인 결합으로 헤비메틀이 세워진 주된 근원의 하나를 이룬다. 처음의 단순한 구조를 척 베리, 보 디들리, 머디 워터스 그리고 비비 킹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탐구되어 여전히 활용되고 있으며 당대의 그룹들의 희망에 멈춰지고 있다. 밴드로는 Black Crowes, Quireboys, Rolling Stones 등이 있다.

20. Rockabilly
힐빌리나 컨트리 음악적인 요소를 지닌 로큰롤의 일종이다. 많은 당대의 록 음악의 활동은 블루스, 휭크, 재즈, 펑크나 메탈과 같은 다른 영역에 영향받은 로커빌리를 통합한다. 밴드로는 Cramps, Stray Cate, Matchbox, Polecats등이 있다.

21. Rock 'N' Roll
블루스와 함께, 로큰롤은 록 음악과 헤비메틀이 최후의 토대가 된 기본 스타일의 하나이다. 메혹적인 댄스 비트를 지닌 뜨거운 에너지와 업템포의 축가도이기도 하다. 빌리 할리 앤드 히즈 코멧츠, 척 베리, 리틀 리차드 그리고 제리 리 루이스와 같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50년대 중반을 풍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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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영 2008-10-11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Old Rock

락은 블루스에서 파생된 Rock & Roll 리듬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락앤롤은 흑인 뮤지션 Chuck Berry, Bo Didley 등의 활동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락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개다리 춤으로 수많은 여성의 심금을 울렸던 Elvis Presley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걷잡을 수 없는 최고 대중음악 쟝르로 발돋음 하게 되는 것이다.
Elvis는 숱한 명반을 남겼고 베스트 음반도 넘쳐나므로 어떤 것을 사도 후회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편 Jerry Lee Rouis도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는데, 그는 피아노로 락앤롤, Honky Tonk를 연주했다.
하지만 Elvis의 군입대, Jerry의 사촌 여동생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락은 시작하자마자 암흑기로 빠져들게 된다.
그치만 그걸로 죽을 우리의 락인가?
우리에겐 Beatles가 있었던 거시다!

1. Beatles (1960-1970) -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가난한 광부,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태어날 때부터 락스피리트를 쥐고 등장한 레논, 메카트니, 해리슨, 스타 의 네 용장들은 1963년 "Please Please Me" 라는 음반부터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정장차림으로 얌전히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으아아~
영국에서의 성공을 밑거름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탄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일그러졌지만 그건 순간에 불과했다.
비틀즈가 비행기에서 내려 미국에 발을 내디딘 순간, 락은 최고의 전성기를 꽃피우게 된다.
이른바 British Invasion의 시작!
이 음반은 그들 최고의 명반중 하나이자 락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물론 그들의 모든 음반이 명반이지만....
이 음반에서 그들은 블루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이키델릭과 순수 락이라는 한 쟝르를 만들어내고 락앤롤에서 벗어나 여러 실험적 시도로 락에 모든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많이 듣지 않으면, 먼지랑......

비틀즈 시절에 Rolling tones(1963- )의 인기또한 대단했다.
비틀즈가 정장차림으로 연주했던데 반해 롤링은 지금 스타일로 말하자면, 마녀구두, 무지개 나시 쫄티, 뾰족머리 등의 최첨단 수퍼 개날라리 패션에 요상한 허리춤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오죽하면 신문에
"롤링 공연 보러가지 마! 특히 너네 여자들! 그거 보면 처녀막이 없어지는 거랑 같어!" (--;;)
이런 극악무도한 기사까지 실렸겠나.
비틀즈의 음악에 블루스의 영향이 거의 없어진 것에 반해, 롤링의 음악은 블루스락 그 자체였다.
비틀즈와 롤링의 음악적 차이는 거기서 부터 시작된다.
비틀즈, 롤링 후 락은 첫번째 전국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1960년대 후반~)
여기서부터 Hard Rock 시대가 열리게 된다.
또한 글렘락, 프로그레시브락, 펑크, 사이키델릭 등등 수많은 쟝르가 파생된다.
여기저기서 게나 고동이나 칼을 끄집어 빼 진검 승부를 하고 관중들은 이리 저리 쓸려다니며 해드뱅잉하느라 목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 시절을 대표하는 고수로 Jimi Hendrix, The Doors, Janis Jopelin의 3 J를 꼽을 수 있다.

2. Jimi Hendrix (1942-1970) - Are You Experienced
왼손잡이 기타리스트로서, Distortion sound의 창시자로서, 와우 페달의 창시자로서 등등 헨드릭스의 공훈는 너무도 막대하여 감히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사이키델릭의 기수이자 최고의 락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던 지미는 말기에 마약 과용으로 인해 공연할 때 손을 떨고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 지는 등 최악의 연주로 돌멩이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 약물과다로 구토를 일으켜 28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다.
그의 1969년 Woodstock 공연은 잉위맘스틴을 위시한 많은 기타리스트로 하여금 기타를 치게 한 연주로 유명하다.
(김세황도 그거 보고 기타쳤대여~)
이 음반은 그의 첫번째 정규음반으로 주옥같은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2집, 3집, "Band of Gypsy" 음반도 죽음의 명반이다.

3. The Doors - The Doors
도어즈하면 Jim Morrison을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어머니~ 으~ 당신과 하고 싶어요"
이런 경악적인 가사부터 시작해서 그는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이키한 음악의 핵은 키보디스트인 Ray Manzarek에 있었다고 한다.
짐모리슨은 1971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4. Janis Jopelin (1943-1970) - Pearl
재니스는 블루스락의 여성 보컬로서 최대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남성을 압도하는 파워풀한 보컬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전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1970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인은 약물중독이었다.
재니스와 같은 여성락커는 그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5. Allman Brothers Band - Live at Fillmore East
듀언올맨(기타)과 그레그 올맨(보컬), 두 형제가 주역이었던 올맨밴드는 위 밴드들과는 달리 Southern rock을 연주한 미국밴드로 유명하다.
하지만 듀언의 죽음후 올맨밴드는 갈길을 잃고만다.
위 음반은 역사상의 라이브 음반을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는 불후의 명연주가 담겨있다.

1970,1971년에 걸친 3J, 듀언올맨의 요절 그리고 Woodstock에서의 광란과 살인으로 락은 두번째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굽힐줄 모르는 재생력으로 곧이어 락은 다시한번 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클래식과의 조화, 폭발적이고 웅장한 무대로 관중을 사로잡은 Queen, 사악한 음악으로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관중을 사로잡았던 토니 아이오미와 오지오스본의 Black Sabbath, 그리고 중원의 양대산맥 Led Zeppelin, Deep Purple이 바로 그 중흥의 주역이었다.
(사실 레드의 경우 60년대 후반부터 날렸기 때문에 어느쪽에 넣을지 고민했지만, 70년대 중후반까지 계속 날렸으므로 뒤쪽 역사에 첨부하기로 했다.)

6. Led Zeppelin - I, II, III, IV
레드를 이야기 하자면 Jimmy Page를 얘기해야 하고, 그를 이야기 하자면 또 Yardbirds를 이야기 해야 한다.
야드버즈는 블루스와 팝을 연주했던 영국그룹으로 일명 3대 기타리스트 (1기-Eric Clapton, 2기-Jeff Beck, 3기-Jimmy Page)를 양산한 걸로 유명하다.
어찌됐든 레드는 비틀즈 이후 최고의 락밴드라는 극찬을 받게 되고 6집부터는 미국챠트 1위까지 완전 점령하게 된다. (4집은 2위에 그침)
레드는 총 9개의 음반을 낸 상태에서 드러머 John Bonham의 사망으로 인해 유작 "Coda"를 마지막으로 밴드해산에 이르게 된다.
레드의 명반은 10개 모두 꼽는 상태라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1,2,3,4집이 명반이 아닌가 싶다.
1,2,3집까지는 블루스의 영향이 강하고 4집부터는 레드 만의 음악이 정립되고 있다.
레드의 음반을 사고자 한다면......아무거나 사면 된다.

7. Deep Purple - Machine Head, Burn
리치블랙모어가 이끈 딥퍼플은 역시 영국 밴드였지만 레드와 달리 수많은 맴버교체로 유명하다.
또한 리치의 스타일이 잘할 땐 최고고 못할 땐 X였기 때문에 음반의 수준또한 고르진 못하다.
리치의 더런 꼬라지 역시 유명하지...
하지만 역시 위 두 음반은 불후의 명반으로 반드시 필청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들의 라이브 음반으로는 Made in Japan, Made in Europe 등이 있는데 일본공연은 시공을 넘는 불후의 걸작인데 반해 유럽공연은 삑사리의 향연으로 또 유명하다.

위 밴드나 음반외에도 60, 70년대에는 Kiss, Aerosmith, Nazareth, Uriah Heep 등등 그야말로 수많은 밴드와 걸작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아는것도 없고 생각도 안나고 다 적을 수도 없어서 핵심만 골라 몇개만 적어본 것이다.
불만있더라도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란다.
지금 머리가 깨지고 있다.

1950년대의 락...

[로큰롤의 시작]

종래 서구의 팝은
음악형식면에서 서투른 형식에 상투적 구절이 노랫말에 자주 등장했고,전기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섹스, 사회문제, 종교 같은 주제는 멀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울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하면서도 저항하는,즉 웃음과 슬픔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블루스는 흑인들만의 음악이었고,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방랑과 이혼, 음주 등을 노랫말에서 과감하게 다루었고,전기기타, 드럼, 스틸기타를 사용했던 컨트리는 촌스런 시골뜨기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50년대의 로큰롤은 흑인의 블루스, 전쟁 이전의 빅밴드와 재즈, 가스펠,그리고 백인의 컨츄리 앤 웨스턴,
나아가서는 다른 현존하는 다양한 음악 양식들의 혼합체로서 등장하였다.
록의 역사는 50년대부터다.
50년대 미국 젊은이들은 전쟁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 새로운 세대였다.
'베이비 붐세대'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다른 말로 '소비의 세대'라고 했다.
이들은 소비가 하나의 문화였고,이전의 세대와 또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로큰롤은 바로 그런 그들의 성격에 딱 떨어지는 통속적인 음악 언어였다.
이들은 멜로디 위주의 스탠더드 팝 대신 강한 비트의 음악에 몰두했다.
55년 빌 헤일리와 코메츠(Bill Haley & Comet)가 나타나 컨트리 앤 웨스턴밴드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커버한 레코드 'Shake Rattle & Roll',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했다.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게 할 수 있는 노래들이었고 그 동안 젊은이들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폭발음이었다.
특히 'Rock around the Clock'은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그 해 여름 8주 연속 차트 1위를 독주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가 교내폭력을 그린 것이었으므로 이때 로큰롤음악 역시 틴에이저의 반항과 비행, 그리고 폭력과 관계된 음악이라는 이미지가 확고부동하게 심어졌다.

[엘비스, 그의 화려한 등장]
뒤이어 56년에는 남부 가난한 촌뜨기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가 나타나 로큰롤 광풍을 주도했다.
니그로의 사운드와 니그로의 감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최초의 백인이었던 그의 음악 속에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은 역동적인 결합을 이루었다.
그의 육감적인 목소리와 관능적인 허리율동은 기성세대에겐 지탄, 젊은이에겐 환호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50년대 중엽에는 척 베리(Chuck Berry), 리틀 리차드(Little Richard) 등의
로큰롤음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러한 음악은 모두 간단한 멜로디에 단순한 코드, 전기기타의 연주, 요동치는 듯한 리듬감, 터져나오는 듯한 에너지, 거칠게 절규하듯 부르는 격렬한 보컬과 다이나믹하게 몸을 움직이는 율동 등을 특징으로 했다.
엘비스는 전세계적으로 록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엘비스는 60년대 이후 인기와 영합하여 갔고 음악도 부드러운 팝발라드로 바뀌었다.
엘비스 팬들은 그를 쫓아갔지만, 그는 더 이상 로큰롤의 황제가 아니었다.
60년대초 엘비스가 로큰롤에 등을 돌리고 트위스트가 붐을 이루면서 로큰롤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비틀즈를 위한 혁명전야였다.

1960년대의 락...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영국의 더벅머리 비틀즈(Beatles)가 미국을 석권하는 사건은 '누가 스타가 되었다'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건 록음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었다.
비틀즈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64년 4월 4일 그들을 빌보드차트 1-5위를 석권했고,그들의 인기는 전세계로 넓어졌다.
그들은 종래의 팝을 다시금 재해석했고, 새롭게 만들었다.
멤버들 전원이 노래를 만들고, 스스로 노래하고, 연주하는 스타일은 이전에 전혀 없던 신선한 스타일로 젊은이들을 감동시켰다.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 음악을 가꿔온 영국 노동자계급 출신의 더벅머리청년그룹 비틀즈는 무작정 질러대는 고함소리 하나로 64년 미국공략을 단숨에 끝냈다.

록의 모든 장르를 실험한 이 신화적인 그룹은 70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훌쩍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비틀즈를 필두로 수십여개의 영국 그룹들이 물밀듯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더 후(The Who),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야드버즈 (The Yardbirds),크림(Cream),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 비틀즈 이후 록 흐름의 주도권을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쥐게 된 근원이다.

64년 비틀즈의 상륙에 즈음해 미국에서는 버클리대학을 시작으로 성,정치 등에 관한 터부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 Free Speech Movement을 비롯,수년동안에 걸쳐 미국사회를 뒤흔든 학원투쟁과 도시흑인폭동, 무장봉기, 베트남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최정점은 제프벡(Jeff Beck), 산타나(Santana),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존 바에즈(Joan Baez) 등이 참가한 69년 8월 우드스탁(Woodstock)이었는데,40만명이 구름처럼 몰려든 이 페스티벌은 폭우로 진흙탕이 되었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fuck'을 계속 외치며 '베트남에서 죽음을'이라는 노래를 처절하게 선창한 컨트리 조(Country Joe and the Fish)에 이어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늘어지게 변주하며 저 위대한 미국의 이상에 야유를 보냈다.
정치적 저항과 낭만적 쾌락주의가 뒤섞인 히피즘적 반문화운동이 록과 결합한 최고의 자리였다.
비틀즈의 활동이전부터 활약하던 비치 보이스(Beach Boys)는 이른바 서프 뮤직이라고 말하던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의 풍속을 잘 나타내주는 곡들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들은 비틀즈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즈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UCLA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도어즈(Doors)를 결성해 키보드 중심의 사운드, 양친살해를 암시하는 노랫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는 헤로인중독에 관한 노래를 기타의 금속성 소음에 맞춰 노래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급진적 정치운동에 관계한 매니저가 이끌던 그룹 엠시파이브(MC5)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록은 전자악기의 비중이 더 커졌고,앰프로 증폭되고 일렉트릭 장치에 의해 변형된 음은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크고 자극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의 록음악을 로큰롤이라 한다면 이후의 록음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록이라 부른다.

65년 밥 딜런(Bob Dylan)이 일렉트릭기타를 메고 등장함으로써,포크록(또는 모던포크)라 불리는 장르가 생겨났고,이후의 이글스(Eagles)의 사운드는 포크록의 원류로 삼는다.
흔히 포크록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한 미국의 화답이라고 이야기한다.
록의 중흥기 1960년대말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크림(Cream)등을 위시하여 로큰롤과 블루스에 바탕을 둔 일렉트릭 기타중심의
헤비사운드의 음악을 하드록이라 칭하였고,하드록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딥퍼플(Deep Purple)의 양대그룹에 와서 그 전성기를 맞고, 이후에 태동되는 메탈음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0년대
[록의 중흥기]

70년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혼란스러웠던 사회변동에서 벗어나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고,록에 대한 상업적 침탈, 마약,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 와 짐 모리슨(Jim Morrison)과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등의 잇따른 죽음 등으로 록은 다시 쇠잔해지는 듯했다.
이때 비틀즈와 바톤터치하듯 나타난 영국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크림(Cream) 등은 전기기타의 금속음을 강조하고 공격적인 비트의 연주를 굉음과도 같이 증폭시켜 들려주는 하드록을 연주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많은 밴드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레드 제플린이라는 그룹의 시작은
뉴야드버즈 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야드버즈(The Yardbirds)는 케이스 렐프(Keith Relf)를 중심으로 초기에는 에릭 클립톤(Eric Clapton) 그리고, 후에는 제프 벡(Jeff Beck)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를 배출해내게 된다.
야드버즈 그룹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지미 페이지를 주축으로 한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드러머 존 보냄(John Bonham) 등으로 레드 제플린이 탄생되어 헤비메탈의 대표적인 그룹으로 주목받으며 록의 정점을 이루고, 그 후 1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밖에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딥 퍼플(Deep Purple),주다스 프리스트 (Judas Priest), 퀸(Queen) 등 메탈밴드들은 음악적 완결성이 뛰어난 메탈을 연주했으며, 특히 딥 퍼플은 클래식 요소를 하드록 속에 끼워넣는 노력으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특히 바로크 시대의 선법들을 응용했다고 해서 `바로크 메탈'로 통칭되는 이것은, 주로 비발디나 바흐 시대의 작법들을 많이 따왔다.
이들은 이미 Highway star등에서 바로크적인 선율에 기반한 클래시컬 메탈을 선보였고,Child in Time에서는 바로크 선법의 대표적인 선례를 들려준다.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는 70년의 데뷔앨범에서 악마가 주도하는 형태의 '검은 안식일' (Black Sabbath)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헤비메탈화 했고, 퀸은 프레드 머큐리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오페라틱 록을 선보였다.

다양한 시도...
70년대 초반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에어로스미스(Aerosmith), 이글스(Eagles)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지방적인 색채를 갖춘 록(웨스트코스트 록, 이스트코스트 록, 서든 록 등이 있음)도 대두하였다.
또한 69년 킹크림슨(King Crimson)을 필두로,키보드를 많이 사용하고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섭취하며,기존의 단순한 록리듬에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를 사용한 '프로그레시브록'이 탄생했다.
특히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Emerson, Lake & Palmer)는 능란한 키보드 테크닉을 과시했고,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신경증을 소재로 하여,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공상과학적 음악,
웅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전위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독창적 세계를 보여주어 지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모두 클래식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고 예술성이 높은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밴드들로 70년대 초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했던 것이다.

이들에 반발, 76년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가 등장한다.
펑크 (Punk)의 도래, 록 안에서 또 한 번의 반항이었다.
상업화한 메탈스타들을, 정교한 록음악을 비웃으며,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위기를 반증하듯,섹스 피스톨즈는 냉소적이고 반상업적인 노래로 일관했다.
제멋대로 불러젖히고 노래에 전혀 소질이 없을뿐더러 배우는 데도 도무지 흥미가 없었던 이들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청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곧 펑크밴드의 힘은 고갈되고 겉멋만이 덜렁 남게 되는 듯 했다.
펑크의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클래쉬(Clash),이기 팝(Iggy Pop) 등이 있으며,펑크는 1976년에서 1979년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유행되었던 록의 한 사조이다.
록의 반항정신과 정치성이 가장 강조된 쟝르로서 좌충우돌격의 단순한 사운드와 기존문화를 거부하는 반항적인 이미지로 헤비메탈과 특히 얼터너티브 록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후에 대중적인 뉴 웨이브(New wave)음악으로 발전했다가 90년대의 네오펑크 밴드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70년대 록음악은 대체적으로 기타의 파괴적이고 기교적인 연주,그리고 악마적이고 남성적인 면모의 과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최고 수준의 연주를 자랑했으며 노래는 허무의 색채를 풍겼다.

1980년대
[비디오 싱어 등장]

1983년 "드릴러" 앨범의 주인공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명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다양한 모습을 세계에 드러내며 전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4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때부터 음악관계자들은 '벽을 부순다'는 의미의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하기 시작했다.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MTV의 등장으로 비디오형인 싱어가 주무대를 차지하게 되었고, 상업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가 오게 되었고,록 음악에 위기가 온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이후 80년대가 표방하는 팝음악을 대표하면서 현재까지 오랫동안 음악의 신기원을 이루고 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정점으로 한 하드록 열기가 점차 식어갈 즈음,하드록이 답답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80년대초 스트레이트한 요소를 더욱 높이고 강도에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톤을 전개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에 대한 더 강한 반란이었다.그리고 80년대 중반 메탈리카 (Metallica)가 등장하면서 메탈은 드디어 주류의 위치로 부상했으며 스레시 메탈 (Thrash metal), 데스 메탈(Death metal) 등으로 점차 분화해 나갔다.
딥 퍼플(Deep Purple), 일렉트릭썬(Electric Sun) 이후 80년대에 나타난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은 바로크 메탈을 전세계적으로 알리고 그 유행을 몰고 왔다.

상업적인 록음악 80년대 초반 미국 L.A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형의 감각적,쾌락적인 로큰롤 사운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80년대 초의 뉴 웨이브 패션 열풍과 감각주의 -오로지 현재를 즐기라-를 표방하는 헤비메탈이다.
때문에 사운드는 대부분 밝고 경쾌하며 시간이 갈수록 연주에도 충실한 실력파 밴드들이 나와 가장 대중화된 헤비메탈로서 사랑을 받는다.
래트(Ratt)와 머클리 크루 (Motley Crue) 등의 밴드들이 있다.
팝이라 하기에는 비트가 좀 강하고 그렇다고 해서 메탈로 보기에는 좀 순한 록을 표현하기 애매해 '팝적인 메탈' 또는'메탈적인 형태의 팝'이라고 지칭하면서 '팝 메탈'이라는 용어를 썼는데,이러한 애매한 용어는 80년대 초에서 중반 본조비(Bon Jovi)나 데프 레퍼트(Def Leppard), 건즈 앤 로지즈(Guns N' Roses) 등을 위시한 몇몇 밴드 들의 놀라운 상업적 성공으로 그 때까지 엄두도 못 냈던 빌보드 차트에도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현재에는 역시 구체적인 장르로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대
[일깨우는 너바나]

메탈이 록계를 천하통일한 시점인 90년대 시애틀에서 출현한 너바나(Nirvana)는 전통적인 사운드를 복고풍이고도 섞어 놓은 스타일로 표현한 얼터너티브 록을 들고 나오면서 록 지평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고,
80년대 상업적인 록의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를 계기로 탈장르시대가 열렸고 하나의 곡을 한 장르로 구분짓는 것이 어렵고 의미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는 음악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얼터너티브 록은 그런지 록(Grunge Rock), 모던 록(Modern Rock)이라고도 하며 최근 놀라운 대중적 인기와 지지도를 획득하며 록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쟝르이다.
80년대 말엽에 등장한 이 신사조는 기존의 주류에 대비되는 비주류의 음악을, 나아가서는 정통파 하드록에 대립되는 변혁적인 로큰롤을 표방하였고 문화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을,사운드적으로는 60∼70년대의 하드록 음악에 뿌리를 두고,거기에 펑크(Punk)적인 색채와 약간의 헤비메탈 요소를 갖추고 있고,반문명적인 미학관을 견지한다.
음악적으로는 현대적이 아니라 과거 스타일로의 희귀를 보여주듯 고전적이며 명칭에서도 알수 있듯이
음악적으로 더 나아가봐야 별다른 진전이 없고 이젠 예전 스타일을 가꾸는게 유일한 '대안' 이라는 모토에서 출발한 음악이다.
사운드적으로는 나른하고 도취적이며 터지는 듯한 하드록 사이키델릭을 들려준다.
미국 출신 밴드들은 펑크와 하드록에 기반을 둔 그런지 음악을 추구하는데,펄잼(Pearl Jam), 너바나(Nirvana), 사운드가든(Soundgarden),앨리스 인 체인스 (Alice in Chains),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kins) 등이 이 분야를 대표한다.

영국 출신들은 브릿팝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통해 모던하지만 복고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데,블러(Blur), 래디오헤드(Radiohead), 오아시스(Oasis),스웨이드(Suede) 등이 대표적이다.

너바나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가 "더이상의 록의 반항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 이후에도 록은 계속하여 변화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70년대 영국에서 탄생된 펑크가 90년대 들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오프스프링(Offspring), 그린데이(Green Day) 등이 대표하는 네오펑크 시대가 있었고,그 후로 다시 얼터너티브, 모던록이 록 역사의 주류를 이어왔다.
최근엔 하드코어 계열과 전자음으로 가득찬 테크노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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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퍼플의 "Smoke On The Water"가 오스트레일리아 현역 뮤지션들이 뽑은 최고의 기타리프에 선정됐다고 '디지털스파이'가 1일 전했다.

이 같은 결과는 오스트레일리아 음악지 'Australian Musician' 매거진이 약 300 명의 현역 뮤지션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밝혀졌으며, AC/DC의 [Back In Black] 앨범은 뮤지션들이 뽑은 최고의 로큰롤 앨범으로 꼽혔다.

잡지 에디터 Greg Phillips는 딥퍼플의 'Smoke On The Water'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건스앤로지스의 Sweet Child O' Mine, 메틀리카의 Enter Sandman과 경합을 벌인 끝에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에디터 Greg Phillips는 "널리 알려진 이 곡이 최고의 기타리프에 뽑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곡의 리프는 굉장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으며 위대한 리프의 고전적 요소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간단한 몇 개의 코드만으로 곡 전체를 함축하는 간결함과 뒤 이어 어떤 플레이가 나올지 잔뜩 기대하게끔 만드는 매력을 지녔다"고 'Smoke On The Water'를 호평했다.

잡지 설문에 뮤지션들이 응해 선정된 이번 리스트에는 대부분 지미헨드릭스레드제플린 같은 70년대 유력 뮤지션들의 리프가 상위권을 마크하고 있으며 "이같은 옛날 음악들은 아마도 부모들로부터 되물림된 것들인 것 같다"고 에디터 Greg Phillips는 덧붙였다. / chang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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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웨이브(New Wave)


1970년대 중 후반 미국의 디스코 열병과 달리 영국에서는 펑크의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고 그 충격은 짧았으되 파장은 컸다. 펑크는 소멸과 함께 포스트 펑크(Post Punk)와 '새로운 파도'라는 덜 도발적인 느낌의 뉴 웨이브(New Wave)로 이어져 급진적이었던 펑크시대로부터 단순하면서도 팝적인 음악으로의 트렌드 전환을 초래했다.

펑크의 과격과 허무주의를 여전히 내포한 포스트 펑크를 빼놓고 펑크 이후에 도래한 대부분의 음악들은 뉴 웨이브의 범주에 포괄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조류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들이 공존했다. 이 새로운 흐름은 당시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악기인 신시사이저(Synthesizers)가 사운드의 중심에 섰다.

즉 신시사이저가 기타 록인 펑크의 대체에 나선 것이다. 갖가지 소리를 내장(內臟)한 이 악기는 펑크의 기타 소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선율을 부각할 수 있어서 펑크 때 희생했던 멜로디를 신진대사로 신스 팝(Synth-pop)과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란 스타일의 음악을 낳았다.

허나 펑크의 활력을 포기하거나 척결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뉴 웨이브를 '안티(anti) 펑크'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악기와 접근방식이 달라졌을 뿐 펑크의 정신을 그대로 가져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신시사이저를 전면에 내세운 기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매력을 포함시키면서 대중의 귀를 다르게 끌고 갔을 뿐이다. '새 술(펑크의 격랑 이후)에는 새 부대(신시사이저)?로' 정도로 보면 된다. 하지만 뉴 웨이브의 대대적 성공행진은 끝내 펑크정신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신스팝은 신시사이저와 팝을 합친 말로 일렉트로닉 팝(Electronic Pop)이란 명칭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를 시작으로 개리 뉴먼(Gary Numan), 휴먼 리그(Human League), 디페시 모드(Depeche Mode)가 대표적인 기수들. 디페시 모드를 빼곤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음악들의 출현으로 지속되진 못했지만 전자음악의 대중화를 꾀함으로 다가올 뉴 로맨틱스의 시대를 앞당겼다.

반면 뉴 로맨틱스는 신시사이저를 부각시키되 기타, 베이스, 드럼과의 치우치지 않은 균형을 취한 록밴드 구성으로 신스팝과 구별되었다. 이 음악을 구사한 밴드들 가운데 더러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록시 뮤직(Roxy Music) 같은 글램 록의 심미적이고 유혹적인 음악, 미소년 같은 중성적인 외모와 화장을 차용, 대중들 특히 여성 팬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스펜다우 발레(Spandau Ballet)를 시초로 하여 듀란 듀란(Duran Duran)과 컬처 클럽(Culture Club)에 와서 '성공의 장르'로 부러움을 사면서 정착에 성공했다. 컬처 클럽이 보이 조지(Boy George)의 게이적 성향에 다분히 복고적인 소울을 요리해냈다면, 듀란 듀란은 펑크와 디스코 적인 색채에 팝과 록을 불어넣은 접근법을 추구했다. 1980년대 MTV의 등장에 힘입어 거대한 파급효과를 등에 업고 이 두 밴드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에 샅샅이 침투해 비틀스 이후 '제2의 영국 침공'(The Second British Invasion)이라는 명예훈장을 달고 인기차트와 시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듀란 듀란과 컬처 클럽말고도 많은 뉴 로맨틱스 계열 그룹들은 쾌락적인 인공(人工) 사운드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히트곡을 쏟아내며 비교적 순항했지만 결국 반짝 히트(one-hit wonder)로 전락하며 1980년대 중반을 고비로 몰락해갔다. 뉴 로맨틱스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펑크의 스피릿도 꼬리를 내려버린 것이다.

뉴 웨이브의 이러한 상업적인 추세를 거역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는데 바로 뉴욕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 웨이브(No Wave)다. 노 웨이브는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펑크에 기반한 전위적인 음악실험이 대표적으로 1978년에서 1982년까지 '음지'에서 호흡을 지속했고 그 흐름은 훗날 소닉 유스(Sonic Youth)라는 노이즈 밴드가 출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펑크에서 뉴 웨이브로 거기서 또다시 얼터너티브 록으로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 1980년대 뉴 웨이브는 사라지지 않고 결과적으로 1990년대를 정의하는 모던 록의 모태로 작용했다. 얼터너티브 록 이후 테크노가 둥지를 틀 무렵 많은 음악팬들은 1980년대의 뉴 웨이브로 거슬러 올라가, 열심히 모던 록의 원형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한 1980년대 음악의 복고열풍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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