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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슬 로즈(Axl Rose/보컬), 슬래시(Slash/기타), 이지 스트래들린(Izzy Stradlin/기타), 더프 매케이건(Duff McKagan/베이스), 스티븐 애들러(Steven Adler/드럼), 이 최강 라인업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LA 메탈계를 호령했던 건즈 앤 로지스. 그 중에서도 특히 액슬 로즈는 광폭한 공연 무대와 성적인 가사를 통해 '마초(macho)' 이미지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면서 남성과 여성 팬들을 모두 열광시켰다.
하지만 1991년 2장의 앨범 [Use Your Illusion I & II]를 연달아 발표한 얼마 후부터 액슬 로즈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의 탈퇴, 그리고 그 후에도 숱한 멤버 교체를 겪으며 오랜 공백을 가졌던 건즈 앤 로지스가 지난 8월 29일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의 헤드라이너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샤키라(Shakira)와 바인스(Vines), 하이브스(The Hives) 등 록의 새로운 세대들이 연주를 들려줬던 그 행사의 맨 마지막에 등장, 관객들과 동료 뮤지션들 앞에서 노장의 컴백을 당당히 공표했다. Welcome To The Jungle!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건즈 앤 로지스의 컴백에 마냥 흐뭇해 할 수만은 없었다. 모든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날렵하기만 했던 액슬 로즈의 살찐 모습과 (나이를 가리는)짙어진 메이크업은 둘째치고라도 트레이드 마크였던 길다란 모자를 눈까지 깊숙이 쓴 슬래시를 대신해서 기괴한 가면에 우스꽝스러운 KFC 바구니를 뒤집어 쓴 기타리스트 버킷헤드(Buckethead)나 전혀 면면을 알 수 없는 나머지 멤버들, 그리고 그들이 연주한 'Welcome To The Jungle'의 너무나도 달라진 느낌 앞에서, 팬들이라면 분명 격세지감을 느꼈을 법하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건즈 앤 로지스였던가? 그러나 그 한 장면으로 그들을 평가하긴 이르다.
1985년 오랜 친구 사이였던 액슬 로즈와 이지 스트래들린을 주축으로 결성된 건즈 앤 로지스는 1987년부터 아이언 메이든, 머틀리 크루 등 정상급 메탈 밴드의 공연에서 오프닝 밴드로 활약하면서 인지도를 넓혀나갔다. 그 해 8월 발표한 데뷔 앨범 [Appetite For Destruction]은 처음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싱글 'Sweet Child O' Mine'이 MTV를 통해 전미에 방송되면서 앨범과 싱글 모두 미국 차트 정상에 올랐다. 이 때부터 'Welcome To The Jungle', 'Paradise City', 'Patience' 등 밴드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1991년 9월 그들은 [Use Your Illusion I]과 [Use Your Illusion II], 2장의 앨범을 동시에 발매하는 초유의 프로젝트를 단행했다. 그 결과, 발매 첫날 그 두 장의 앨범 판매량은 팝 역사상 최고인 420만 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앨범 이후 작곡과 리듬 섹션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이지 스트래들린이 액슬 로즈와의 견해 차로 가장 먼저 팀을 떠나고, 계속해서 슬래시도 점차 팀을 이탈했으며 나머지 멤버도 모두 탈퇴해갔다. 제인스 어딕션 출신의 데이브 나바로와 나인 인치 네일스의 로빈 핀크 등이 밴드를 거쳐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악동' 액슬 로즈는 기물 파손, 약물 과용 등 끊임없이 사고를 쳤다.
현재 그들은 과거의 건즈 앤 로지스가 아니다. 초창기 멤버는 보컬 액슬 로즈 단 한 명뿐인데다가 최근 'VMA 시상식 깜짝 공연'을 봤을 때 음악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액슬 로즈의 퍼포먼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일단 만족해야 할 듯 싶다. 지난해부터 공연 활동을 개시한 건즈 앤 로지스는 11월 7일부터 캐나다 밴쿠버를 시작으로 12월말까지 26개 도시를 돌며 전미 투어를 갖는다. 그들의 새 앨범 [Chinese Democracy]이 그 기간동안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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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후(The Who)의 열정적인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가 1944년 3월 1일 태어났다. 키스 문(Keith Moon), 피트 타운셴드(Pete Townshend),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 그리고 로저 달트리로 구성된 4인조 록 밴드 후(The Who)는 1965년 데뷔했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의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과 모드(Mod) 무브먼트의 핵심적 밴드 중의 하나이며 록음악 사상 가장 창의적이고 파워풀한 록 밴드 중 하나로 기록된다. 후의 음악은 여타 록 밴드들과는 달리 피트 타운셴드의 기타에 리듬 섹션의 기본을 두고 키스 문의 베이스 기타와 존 엔트위슬의 드럼이 각각 즉흥 연주를 펼치는 독특한 스타일이었으며, 로저 달트리의 보컬 역시 이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데 한 몫을 했다. 피트 타운셴드가 작곡한 'The Kids Are Alright'이나 'My Generation' 같은 곡들은 10대들의 찬가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록 오페라인 는 평단과 대중들로부터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들은 1978년 9월 7일 키스 문이 약물 과용으로 31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새로운 드러머를 맞이해 사운드트랙인 [The Kids Are Alright]과 [Quadrophenia] 등을 냈고 계속 활동을 이어갔으나 결국 1983년 해체되었고 1984년에 마지막 앨범 [Who's Next]를 발표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걸쳐 잠깐씩 재결성, 미국 투어를 갖기도 했다

모드의 대변인

모드(mods)란 모더니스트의 줄임말로, ’6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과격한 하위 문화를 상징하는 용어다. 모드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 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 그들은 하층민이면서 가죽 옷에 모터 사이클을 즐겼던 로커(rocker)와는 달리 짧은 머리에 최신 유행의 스마트한 옷을 입었고 모터 스쿠터를 즐겨 탔다. 또 모드족은 정규직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면서 암페타민이라는 각성제를 복용했다. 이들의 대변인이 바로 록 밴드 후(The Who)였다. 후는 1965년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모드족의 송가 'My Generation'을 발표했다. 그 곡의 '늙기 전에 죽고 싶다'라는 과격한 가사는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색소폰 주자인 아버지와 교향악단에서 노래를 하던 어머니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은 어린 피트 타운셴드(1945년 5월 19일 생)는 팝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기타 연주에 몰두했던 학생이었다. 중학교 시절 존 엔트위슬(1944년 10월 9일 생)과 컨페더리츠(Confederates)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연주를 했던 피트는, 이미 열 세 살 때 기타 소리가 시끄럽다는 할머니의 꾸중을 듣고 기타를 부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62년, 동급생인 로저 달트리(1944년 3월 1일 생)를 끌어들인 이들은 더그 샌덤(Doug Sandom)이라는 드러머와 디투어스(Detours)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1964년은 밴드에게 중요한 해이다. 그들에게 모드의 세계를 알려준 프리랜서 정치평론가 피트 미든(Pete Meaden)을 만났으며 새로운 드러머 키스 문(1947년 8월 23일 생)이 밴드에 들어온 것이다. 피트 미든은 그룹의 이름을 하이 넘버스(High Numbers)로 바꾼 후 <폰타나(Fontana)> 레이블과 싱글 계약을 이루었고, 결국 밴드의 첫 싱글 ‘I'm The Face'가 발매되었다. 같은 해 9월,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이룬 밴드는 그룹명을 후로 바꾸고 매주 화요일마다 유명한 마키 클럽(Marquee Club)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1965년 1월, 로부터 거절당한 데모 테이프를 들은 (킹크스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미국인 프로듀서 셸 타미(Shel Talmy) 밴드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도움으로 <브런즈윅(Brunswick)> 레이블과 계약을 이룬 밴드는 곧 싱글 ’I Can't Explain'을 발매했고, 미국에서도 <데카(Decca)> 레이블을 통해 선보이게 된다. 이 곡은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하며 후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중년층과 상위 계급, 젊은 부부들에 반(反)하는’ 내용의 싱글 ‘Anyway, Anyhow, Anywhere'와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My Generation'을 탑 텐 차트에 올리며 인기를 누리던 이들은 같은 해 12월,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My Generation]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6년,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가 새로이 설립한 레이블 <리액션(Reaction)>과 계약을 한 밴드는 다양한 콘서트와 방송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12월에 두 번째 앨범 [A QuickOne]을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얻는다. 이제 이들의 위상은 미국 시장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새로운 앨범 [The Who Sell Out]('67)에서 커트 된 싱글 ‘I Can See For Miles'는 미국에서 최초로 탑 텐 히트를 기록한 후의 작품이다. 히트 싱글 ’Magic Bus'를 비롯하여 라이브 음원들을 담은 앨범 [Magic Bus]('68)는 미국 차트 39위에 올랐다. '69년에는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최초의 록 오페라’ [Tommy]가 발표되었고, 밴드는 우드스탁(Woodstock Music & Art Fair)과 아일 오브 와이트(Isle Of Wight) 축제에 참여한다.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의 로큰롤 클래식을 리메이크한 싱글 히트곡 ‘Summertime Blues'가 수록된 라이브 앨범 [Live At Leeds]('70) 이후 이들은 더욱 강력하고 치밀한 연주로 가득한 걸작 앨범 [Who's Next]('71)를 공개한다. 앨범에 수록된 'Baba O'Riley', 'Bargain', 'Behind Blue Eyes', 'Won't Get Fooled Again', 'My Wife' 등의 곡들은 1970년대의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며 후의 대표적인 애청 곡이 되었다. 이들 최고의 히트 싱글들을 모아 놓은 컴필레이션 [Meaty Beaty Big And Bouncy]('71)은 영국 차트 9위와 미국 차트 11위에 올랐다. 이어지는 이러한 커다란 성공 이후 피트는 다시 한 번 대작컨셉트 앨범을 기획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1973년, [Tommy]에 이은 두 번째 록 오페라이자 더블 앨범인 [Quadrophenia]가 발표된다. 그러나 이 앨범의 발매 이후 그룹의 조직력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발표된 [The Who By Numbers]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한 작품이었으며 3년만에 나온 [Who Are You]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앨범의 발표 직후인 1978년 9월 8일, 후의 역동적인 사운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드러머 키스 문이 알코올 중독의 치료를 위해 처방된 약물의 과다 복용으로 런던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후는 사실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밴드는 다시 일어서기로 했고 결국 스몰 페이시스를 거친 드러머 케니 존스(Kenney Jones)를 맞이하여 새로운 활동에 들어간다. 비정규 멤버인 키보드 주자 존 번드릭(John Bundrick)이 그룹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자신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 [The Kid Are Alright]('79)이 발표되었고 공연도 계속된다. 하지만 1979년 12월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시작으로 후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미국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서 있었던 콘서트 도중 자리 때문에 몰려들던 관객들에 짓밟혀 1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발표된 두 앨범 [Face Dances]('81)와 [It's Hard]('82)는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만 증폭시켜주었을 뿐이다. 결국 1983년 12월, 후는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한다.
이후 밴드의 마지막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Who's Last]('84)와 B 사이드 트랙들을 모은 두 장의 컴필레이션 [Who's Missing]('85)과 [Two's Missing]('87)이 발표되었고, ‘89년에는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들이 다시 뭉쳐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Join Together]('90)를 비롯한 다양한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후의 진짜 모습은 키스 문의 죽음으로 멈추어져버린 시간의 문 안쪽에 존재한다. ’젊음‘에 유달리 집착을 보이던 밴드에게 그것은 차라리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My Generation'과 ‘The Kids Are Alright'과 ’I Can See For Miles' 등의 멋진 음악을 들려주는 후의 모습은영원한 젊음 속에서 한없는 에너지를 분출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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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주 기타, 바로크 메탈의 시대를 열다

’80년대 초반 레인보우에서 밀려난 개성파 보컬리스트 그레이엄 보넷은 자신의 그룹 알카트라츠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찾고 있었다. 그의 눈에 띈 인물은 스틸러라는 4인조 그룹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스웨덴 출신의 젊은이였다. 그레이엄 보넷은 바로 그 잉베이 맘스틴을 기타리스트로 맞아들여 알카트라츠를 출범시켰고 그는 많은 록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지미 헨드릭스, 리치 블랙모어에게서 영향을 받은 프레이즈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빠른 연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결국 그의 인기는 그룹의 리더 그레이엄 보넷을 뛰어 넘었고 ’84년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고향에서 함께 활동하던 뮤지션들을 맞이해 자신의 그룹 라이징 포스로 전곡 인스트루멘틀화를 시도한다. 총 8곡 가운데 2곡만 보컬이 삽입된 데뷔 앨범은 이례적인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가 추구한 클래식과 록의 결합은 바로크 메탈이라는 새로운 독립 서브 장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잉베이 맘스틴은 많은 멤버 교체와 개인적인 일들을 겪으면서도 이후 꾸준히 활동을 펼쳐왔다. 그의 연주에 충격을 받은 많은 기타리스트 지망생에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게 했고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연이어 데뷔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기타 사에 한 획을 그은 동시에 꺼져가는 기타 음악에 불을 지핀 업적은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제는 세월이 너무 흘러, 또는 유행의 흐름과는 전혀 관계없이 변함없는 음악을 구사해서 식상한 점도 있지만 그의 빠르고 날카로운 기타 연주는 록 음악과 일렉트릭 기타사에 거대한 산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잉베이 맘스틴이 처음 등장했을 때 헤비 메탈계는 거의 난리가 났었다. 지금은 그 정도 속도로 연주하는 사람이 많지만 '80년대 당시로서는 거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까지 일렉트릭 기타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지미 헨드릭스, 리치 블랙모어, 토니 아이오미, 에릭 클랩튼, 제프 벡, 밴 헤일런, 등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베이 맘스틴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속주 뿐 아니라 바로크 메탈이라는 장르도 대중화시킨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밴 헤일런 같은 사람은 라이트 핸드 주법을 발명해 기타사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미국적인 팝 메탈을 구사했기에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높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바로크 메탈이라는 장르가 유행이 지나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잉베잉 맘스틴이 유행시킨 바로크 메탈은 멜로딕 스피드, 프로그레시브 메탈, 멜로딕 데스 등에 고르게 침투해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음악성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활동을 펼치는 잉베이 맘스틴이야 말로 '90년대 유럽권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록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잉베이 맘스틴은 '6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다른 기타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지미 헨드릭스의 열정적인 공연 모습을 보고 기타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한창 기타를 칠 때엔 10대 초반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하루에 8시간 이상씩 매일 기타를 쳤다고 하는데 연습을 안하고 이틀을 넘긴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타를 잡고, 또한 자기 전에 기타를 연습하지 않으면 스스로로를 책망할 정도로 광적인 연습벌레였다고 한다. 그는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15세가 되기 이전에 이들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독자적인 기타 플레이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그가 16살 때에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해 4트랙 짜리 데모 테이프를 완성해 슈라프넬의 대표이자 당시 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를 발굴했던 마이크 바니에게 보냈다. 마이크 바니는 그의 기타 연주에 반해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기타 플레이어'지에 잉베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잉베이를 불러들여 킬(Keel)의 보컬리스트였던 론 킬(Ron Keel)이 이끌었던 스틸러(Steeler)에 소개해 주었다.
잉베이는 스틸러에 가입하여 '83년에 STEELER를 발표하고는 팀을 탈퇴한다. 여기서 그는 리치 블랙모어, 마이클 솅커 등 최고의 기타리스트들과 작업한 그레이엄 보넷을 만나 알카트라즈(Alcatraz)에 가입한다. 여기서 '84년 데뷔작 NO PAROLE FROM ROCK 'N' ROLL과 라이브 앨범 LIVE SENTENCE 등의 앨범으로 그의 탁월한 실력을 세상에 알렸다. 약 1년 정도 알카트라즈에 머물다 탈퇴한 잉베이 맘스틴은 같은 해인 '84년에 자신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를 부활시키고 데뷔 앨범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바로크 메탈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작품 YNGWIE MALMSTEEN'S RISING FORCE였다. 이 작품은 당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파급 효과가 컸으며 많은 추종자군을 만들게 했다.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등의 탁웍할 연주들이 삽입된 이 앨범은 '85년의 2집 앨범 MARCHING OUT과 '86년 3집 TRILOGY, '88년 4집 ODYSSEY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뮤지션으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고 '89년에 발표한 5집이자 라이브 앨범인 TRIAL BY FIRE: LIVE IN LENINGRAD는 그의 그런 명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메탈이라는 장르가 쇠퇴기를 맞으면서 잉베이의 명성도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잉베이의 창작열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잉베이는 '90년 6집 앨범인 ECLIPSE를 발표하고, '91년에는 7집이자 베스트 앨범인 THE YNGWIE MALMSTEEN COLLECTION을 발표하고 '92년 8집에는 FIRE AND ICE를 발표했다. 잉베이는 이 앨범이 빌보드지 121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빌보드지와 결별(?)한다. 하지만 그는 '94년에 포니 캐년과 손잡고 아홉번째 앨범인 THE SEVENTH SIGN을 내놓았다. 거의 매 앨범마다 보컬리스트를 교체했던 그는 이 앨범에서 일본의 헤비 메탈 밴드인 라우드니스가 세계 시장에 도전하면서 영입했던 보컬리스트 마이클 베세라를 가입시켰다.
전형적인 잉베이 스타일인 Never die와 아름다운 발라드 Mean to be 등을 수록한 이 앨범은 그의 마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특히 Angel in heat이라는 트랙에서는 최초로 잉베이가 보컬을 담당하기도 했다.
'95년에는 10번째 정규 앨범 MAGNUM OPUS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는 잉베이의 화려한 플레이를 만끽할 수 있는 Vengeance와 비장미가 흐르는 연주곡 Amberdawn 등이 사랑을 받았다.'96년에 잉베이는 그가 자라면서 영향을 받았던 곡들을 모은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한다. INSPRIATION이라 명명된 이 앨범에서 그는 마이크 볼즈, 조 린 터너, 제프 스코트 소토 같은 그와 함께 했던 보컬리스트를 초빙하여 완성했다. 이 앨범은 그의 음악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명확하게 알려준 앨범인데, 딥 퍼플의 곡이 Pictures of home, Mistreated, Demon's eye, Child in time 등 무려 네 곡이나 수록되어 있고,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레인보우의 Gates of babylon을 수록했다. 또한 그가 기타를 연주하게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지미 헨드릭스의 Spanish castle magic과 Manic depression을 실었고, 그외 캔사스, UK, 스콜피온스, 러시 등의 곡을 선곡했다.
'97년에는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와 그는 FACING THE ANIMAL을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에서는 전설적인 드러머인 코지 파웰이 참여했고, 보컬에 매츠 레빈이라는 신예가 참여했고, 프로듀서로는 크리스 탕가리스가 참여했다(크리스 탕가리스는 얼마 전 신해철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고 내한하여 공연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적 성과로 볼 때 이 음반은 Like an angel-for April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지난해에 잉베이는 2종의 앨범을 내는데 하나는 TRIAL BY FIRE : LIVE IN LENINGRAD 이후 10년만의 라이브 앨범 LIVE!!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앨범인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OP.1이었다. 전작은 13년에 걸친 잉베이의 솔로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음반으로 2CD에 걸쳐 초기 곡과 최근 곡이 잘 선곡되어 실려있었다. 그리고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체코의 유일한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인 후자는 잉베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프로젝트의 실현이었다. 조곡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에서 잉베이는 순수 클래식 앨범이라 봐도 무방할 멋진 앨범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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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2월 26일, 이글스의 저 유명한 [Hotel California] 앨범이 발표되었다. 60년대 말 롱 브랜치 페니휘슬(long Branch Pennywhistle) 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던 글렌 프라이(Glenn Frey)가 제이 디 사우더(J. D. Souther)의 팀 탈퇴 이후 돈 헨리(Don Henley) 등을 영입해 결성한 밴드가 바로 이글스다. 1972년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표해 'Take It Easy'등의 싱글이 히트를 기록했고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의 첨병으로 부각되었다. 이듬해 발표한 2집 [Desperado], 1974년의 3집 앨범 [On The Border]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해 특유의 서던 록 사운드가 시대를 풍미했고 1975년 4집 앨범 [One Of These nights]를 내 놓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순회 공연 이후 버니 고든(Bunny Gordon)이 팀을 탈퇴해 잠시 위기를 맞았다. 1976년 첫 베스트 앨범이 공개되었고 이후 제임스 갱(James Gang) 출신의 기타리스트 조 월시(Joe Walsh)가 영입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바로 그 즈음 발표된 앨범이 바로 [Hotel California]이다. 이듬해 포코(Poco) 출신의 베이시스트 티모시 비 슈미트(Timothy B. Schumit)가 팀에 합류해 1979년에는 [The Long Run] 앨범을 발표했다. 'Heartache Tonight'를 발표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2년 두 번째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고는 팀을 해산해 각자의 솔로 활동에 주력하다가 1994년 재 결성해 라이브 앨범 [Hell Freezes Over]를 내 놓았다. 또한 2003년에 [The Complete Greatest Hits],[The Very Best Of]와 같은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었다.

그룹 이글스는 1971년,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세션 활동을 하던 글렌 프레이(기타, 보컬)와 돈 헨리(드럼, 보컬), 버니 리든(기타, 보컬), 그리고 랜디 마이스너(베이스, 보컬)에 의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화려한 경력을 지닌 베테랑 뮤지션들이었는데, 글렌 프레이는 싱어 송 라이터인 제이 디 사우더(J.D. Souther)와 롱브랜치 페니휘슬(Longbranch Pennywhistle)이라는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했던 인물이며, 돈 헨리는 텍사스 출신의 밴드 포 스피즈(Four Speeds)를 거쳐 실로(Shiloh)에 몸담고 있었다. 버니 리든은 전통 컨트리를 연주하던 그룹 스코츠빌 스쿼럴 바커스(Scottsville Squirrel Barkers)와 록 밴드인 하츠 앤 플라워스(Hearts & Flowers), 딜러드 앤 클라크(Dillard & Clark), 코베츠(Corvettes), 그리고 컨트리 록을 언급하며 빼놓을 수 없는 플라잉 뷰리토 브라더스(Flying Burrito Brothers) 등 여러 그룹을 거쳤다. 랜디 마이스너는 다이내믹스(Dynamics)와 소울 서바이버스(Soul Survivors), 그리고 포코(Poco)의 창단 멤버로 활동을 하다 릭 넬슨(Rick Nelson)의 백 밴드인 스톤 캐년 밴드(Stone Canyon Band)를 이끌었다. 그들은 린다 론스타트(Linda Ronstadt)의 앨범 [Silk Purse]('70)에 참여한 이래 그녀의 백 밴드로서 활동을 하다 1971년, 자신들의 그룹 이글스를 출범시키게 된다. 같은 해 8월,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이 사장으로 있던 <어사일럼(Asylum)>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이글스는 이듬해에 런던에서 글린 존스(Glyn Johns)가 프로듀스를 맡은 데뷔 앨범 [Eagles]('72)를 발표했다.
데뷔 싱글인 ‘Take It Easy'는 미국 차트 12위에 오르며 성공을 거두었고, 데뷔작에서 들려준 독특한 스타일은 곧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더불어 컨트리 록이라는 장르는 이들에 의해 비로소 화려한 빛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글스의 여러 작품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가장 많이 애청되는 음악이 되었고 이들의 모든 정규 앨범들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높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서부‘를 주제로 한 컨셉트 형식의 두 번째 앨범 [Desperado]('73)는 전작의 성공에 비할 정도는 못되었지만 그들의 풍성한 감성이 담긴 전형적인 컨트리 록 사운드로 가득한 작품이다. 영화 <와일드 번치(The Wild Bunch)>의 감독 샘 페킨파(Sam Peckinpah)는 이 앨범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74년에는 그룹 플로우(Flow)를 거쳐 데이빗 블루(David Blue)의 백 밴드에 참여했던 기타리스트 돈 펠더가 가입하여 이글스는 트리플 기타 체제가 된다. 비비 킹(B.B. King), 조 월시 등과 작업한 바 있는 새로운 프로듀서 빌 심치크(Bill Szymczyk)가 제작을 맡은 앨범 [On The Border]('74)에서 밴드는 보다 록적인 성향이 강해진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앨범은 처음으로 미국 차트 1위에 오른, 그리고 이들의 첫 밀리언셀러로 기록되는 싱글 ’The Best Of My Love'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본격적인 슈퍼스타의 자리에 올려준 작품은 다음 앨범인 [One Of These Nights]('75)이다. 타이틀곡이 영국 차트 1위에 올랐으며 ‘Lyin' Eyes'와 ’Take It To The Limit' 등 뛰어난 곡들이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이듬해 2월해 개최된 1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이글스는 ‘Lyin' Eyes'로 ’최우수 팝 보컬 가창‘ 부문을 수상했다. 이미 음악적인 역량 면에서나 상업적인 성과 면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였지만 ‘75년 12월, 기타리스트인 버니 리든이 음악적인 차이를 이유로 그룹을 떠난다. 그의 자리를 대신한 인물은 제임스 갱(James Gang)을 나와 솔로로 활동하고 있던 조월시이다. 그의 가입으로 밴드의 사운드는 보다 역동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이들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Hotel California]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 앨범 이전에 발매된 히트곡 모음집 [Their Greatest Hits 1972-1975]는 5주간 차트 1위에 머무르며 플래티넘을 획득했고 이듬해에는 전국 레코드 상인 연합(NARM)으로부터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된다.
밴드의 모든 음악적 재능과 역량이 담긴 [Hotel California]는 어렵지 않게 1위에 올랐고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 앨범은 ‘77년의 제 4회 어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팝/록 앨범’을 수상했으며 ‘78년 20회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와 앨범에 수록된 싱글 ’New Kid In Town'으로 ‘최우수 편곡’ 상을 거머쥐었다. 여러 공연이 이어졌고 ‘77년 여름의 유럽 투어 이후 투어 생활에 지친 랜디 마이스너가 그룹을 떠났다.그의 뒤를 이어 역시 포코 출신의 티모시 슈미트(Timothy B. Schmit)가 가입을 한다. 하지만 밴드는 힘을 잃고 있었다. 이들의 마지막 앨범으로 기록되는 [The Long Run]('79)는 여러 히트 싱글들과 함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 앨범의 ’Heartache Tonight'으로 22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록 보컬 가창’ 그룹 부문을 수상했지만 음악적으로 가장 뒤쳐진다는 평가를 얻은 작품이다. ‘80년 말에 발표된 더블 라이브 앨범 [Live] 역시 플래티넘을 기록했지만 결국 1981년, 천문학적인 앨범 판매고를 올렸던 이 슈퍼 그룹은 해체되었다. 이후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각기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활발한 솔로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이들은 역시 돈 헨리와 글렌 프레이였다.
'Hotel California'가 수록된 두 번째 히트곡 모음집 [Greatest Hits Volume 2]는 1982년에 발매되어 역시 높은 판매고를 올린다. ‘85년에는 영국에서만 발매된 컴필레이션 [The Best Of The Eagles]가 차트 히트를 기록했고, 이글스의 모든 정규 앨범들은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었다. 그들의 여러 히트 싱글들이 각국의 라디오에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는 1989년 9월 그룹 해체 후 처음으로 LA의 콘서트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여 재결성의 가능성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4년에 와서이다. MTV 언플러그드 콘서트를 시작으로 ’95년 5월까지 이어진 투어는 많은 팬들을 즐겁게 했다.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 돈 펠더, 조 월시, 그리고 티모시 슈미트 등 해산 당시의 멤버들로 이루어진 이글스의 재결성 투어는 총 200만 명 이상의 청중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였고 1억 3,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공연 수익을 거두어 놀라움을 주었다. 4곡의 신곡과 11곡의 라이브 트랙을 포함한 새로운 앨범 [Hell Freezes Over]('94)는 발매와 더불어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했음은 물론 500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이들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과와는 관계없이 이 앨범은 언플러그드로 연주된 ‘Hotel California' 등 몇 곡에서의 신선한 감동을 제외하면 오리지널 곡의 완성도에 모자라는 사운드로 실망을 주기도 했다. 이후 이글스는 1998년 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고 ’99년 12월 31일에는 LA의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밀레니엄 콘서트를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1971년 LA에서 글렌 프라이(Glenn Frey/보컬), 돈 헨리(Don Henley/드럼), 랜디 마이즈너(Randy Meisner/베이스), 버니 리든(Bernie Leadon/기타)으로 결성됐다. '72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했지만 '75년에 돈 펠더(Don Felder/기타)가 가세했고, 리든은 조 월시(Joe Walsh)로 교체됐다. 1977년에는 마이즈너가 포코(Poco) 결성을 위해 떠나고 티모시 비 슈미트(Timothy B. Schmit)가 대신 합류했다. 1982년에 해체됐었지만 1994년 돈 헨리, 글렌 프라이, 돈 펠더, 조 월시, 티모시 비 슈미트에 의해 재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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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나(Santana)는 blues와 rock, Latin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30년 가까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어온 밴드의 이름이면서 그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를 연주한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의 이름이기도 하다.

원래는 Santana Blues Band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산타나는 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사이키델릭 록을 하는 그룹들이 출연하는 San Francisco Dance Hall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Latin 음악에 뿌리를 둔 그룹은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69년 8월의 역사적인 Woodstock Festival에서 인기를 끌은 이들은 빌 그래험(Bill Graham)의 주선으로 Columbia와 계약하게 된다.

당시 멤버는 카를로스 이외에 건반과 보컬에 그렉 롤리(Gregg Rolie), 베이스에 데이브 브라운(Dave Brown), 드럼에 마이크 슈리브(Mike Shrieve), 그리고 타악기에 각각 아르만도 페라자(Armando Peraza), 마이크 카라벨로(Mike Carabello), 호세 에이리어스(Jose Areas)이었다.

데뷔 앨범 [Santana]는 싱글 'Evil Ways'가 4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어서 70년 발표한 [Abraxas]는 6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싱글 'Black Magic Woman'과 'Oye Como Va'도 큰 인기를 얻었다.

71년 [Santana III]에서는 기타 연주자 닐 숀(Neal Schon)의 참여로 7인조로 확장되었으며, 앨범은 5주간 정상을 차지하였다.

기타 연주자 산타나는 드럼과 보컬을 병행하는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나중에 산타나의
멤버로 가입한다)와 듀엣으로 실황 음반을 72년에 발표한다.

이어서 그룹 산타나의 4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연주인 이름에 베이스인 Brown과 타악기인 Carabello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4집 [Caravanserai]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73년에는 산타나가 죤 맥래플린(John McLaughlin)과 두 번째 듀엣 앨범을 내놓는다.

이어서 [Welcome]이란 앨범을 발매하지만 밴드의 이름은 The New Santana Band였으며, Rolie와 Schon은 그룹 Journey의 결성을 위해 떠나게 된다.

이 후의 그룹 산타나는 카를로스 산타나가 계속 주도하면서 고용된 연주인들로 구성된 형태를 갖게 되며, 카를로스 자신도 종종 약간 다른 스타일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92년 Columbia 레코드사와의 오랜 계약을 마치고 Polydor로 이적하여 [Milago]를 발표하였으며, 94년에는 Arista사로 이적했다.
96년에는 내한공연으로 국내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였으며, 99년에는 신작 [Supernatural]을 발표하였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1947년 7월 20일 멕시코의 Autlan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며 현악기의 세계에 눈을 떴다. 이후 1955년 가족과 함께 티주아나로 이주해 거기에서 로큰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기타를 잡고 티 본 워커나 비비 킹, 존 리 후커등과 같은 전설적인 블루스맨들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1961년에 산타나는 샌프란시스코로 가 기타 연습을 하며 그 분위기에 젖어 들었는데 그곳에서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게 된다. 몇년 후인 1966년 그렉 롤리, 거스 로드리게즈, 마이클 카라벨로, 대니 할 등과 함께 산타나 블루스 밴드를 결성해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등지에서 연주하며 프로 뮤지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미 이때부터 산타나는 블루스에 라틴적인 스타일을 섞는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연주하는 클럽을 찾은 공연 기획자 빌 그레함(Bill Graham)에게 발탁되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빌 그레함은 산타나가 추구하고 있는 음악(라틴 + 락 + 블루스)이 충분히 대중들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줄 수 있으리라고 여겨 마이크 블룸필드와 알 쿠퍼의 [The Live Adventures of Mike Bloomfield And Al Kooper]라는 앨범에 참여시키며 그의 존재를 록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산타나 밴드가 큰 주목을 받은 최초의 일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였다. 1969년에 있은 사상 최대의 록페스티벌 우드스탁에서 산타나는 라틴록이 무엇인지를 사이키델릭적인 성향과 잘 혼합해 폭발적으로 들려주었다. 바로 이 여세로 산타나는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1969년 8월에 발매된 산타나의 데뷔앨범은 당시의 시대적 조류가 약물과 반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키델릭과 하드록에 적극적으로 손을 흔들어 주던 때라 사이키델릭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Soul Sacrifice'가 대표적인 예다. 이곡은 산타나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도 연주해 폭발적인 반응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 'Evil Ways'  'Jingo' 등의 곡들도 당시의 음악적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앨범은 1969년 9월 13일에 빌보드 앨범 차트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차트 4위에까지 랭크되었다. 이후에도 이 앨범은 차트에 장장 108주 동안이나 랭크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렉 롤리의 건반이 크게 활약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라틴록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는 데에서 본작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1970년 10월에 산타나는 두번째 앨범 [Abraxas]를 공개했다. 데뷔작부터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라틴록 사운드가 그 절정을 이루는 이 앨범엔 'Oye Como Va', 'Black Magic Woman/Gypsy Queen' 등 라틴록 불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저 유명한 기타 인스트루멘틀 'Samba Pati'가 애절한 선율로 가슴을 적셔준다. 전체적으로 끈적끈적하고 원시적 정열이 살아있는 기타와 타악기가 역동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데뷔작과 이 두번째 앨범이야말로 가장 산타나다운 음악과 정신세계가 농축된 작품이다.

          
1년후인 1971년 9월 [Santana Ⅲ]라는 세번째 앨범이 공개되었고, 이듬해 11월에는 산타나와 마이크 슈리브가 공동 프로듀스한 4집 [Caravanserai]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선 3명의 퍼커션 주자, 리처드 키모드와 탐 코스터 등 두명의 건반주자, 그리고 드럼의 마이크 슈리브(Mike Shrieve), 카운트 베이시 악단 출신의 레온 토마스(Leon Thomas) 등이 리드보컬 및 퍼커션을 연주했고 거기에 닐 숀의 기타와 그렉 롤리의 건반까지 가세하고 있다. 아방가르드 재즈에서나 들을 법한 색소폰 인트로가 담긴 첫곡 'Eternal Caravan Of Reincarnation'은 동양적 명상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지는 연주를 들려준다. 닐 숀이 기타를 맡고 있는데 종래 우리가 알던 닐 숀과는 전혀 다른 매우 신비적이고 사색적인 울림의 사이키델릭 기타를 연출한다. 'All The Love Of The Universe'의 초반부에서도 명상적인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곡에서는 그렉 롤리의 건반이 맹활약을 펼치며 마이크 슈리브의 드럼 또한 날카로운 필 인을 펼친다. 이외에 전형적인 블루노트 펜타토닉 어프로치의 'Song Of The Wind', 산타나가 퍼커션을 연주하고 있는 'Stone Flower' 등도 주목할만하다. 수록곡 중에서 'La Fuente Del Ritmo'는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재즈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1972년 산타나는 드러머 버디 마일즈와 함께 [Live]라는 조인트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산타나와 버디 마일즈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통해 서로 친해졌고 서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조인트앨범이다. 동년 8월 1일 다이아몬드 헤드 크레이터에서의 공연을 담은 이 라이브음반은, 그렉 에리코(Gregg Errico) 등의 드럼주자를 비롯해 3명의 콩가 주자들이 참여해 아프로 쿠반에서 라틴 등 다양한 리듬의 세계를 들려준다. 닐 숀도 참여해 산타나의 기타를 서포트하고 있다. 첫곡인 'Marbles'부터 산타나의 날카로운 기타와 타악기가 현란한 라틴록의 세계를 보여주며, 버디 마일즈의 히트곡인 'Them Changes'에서는 펑키 그루브가 넘실대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Free Form Funkafide Filth'다. 기타와 타악기, 건반은 물론 색소폰과 플룻까지 가세해 24분이 넘게 솔로타임을 교환한다. 한편의 장대한 재즈록 사운드가 아닐 수 없다.

   
1973년에 산타나는 [Welcome]이라는 앨범과 함께 [Love, Devotion, Surrender]를 공개했다. 특히 이 [Love…]는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의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과의 조인트앨범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크다. 카를로스 산타나와 존 맥러플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양자 모두 인도의 철학과 신비주의, 종교 등에 심취해 이름마저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두 명상적 신비주의자들이 만나 기타 조인트앨범을 공개한 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라틴록의 대가와 재즈록의 대가끼리의 만남이라 불꽃 튀는 기타 솔로잉이 흐르지만 그보다는 앨범 타이틀이 상징하듯 전체적으로 '사랑'과  '평화'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열반의 세계로 안내한다. 존 콜트레인을 추모하는 차원에서 프리재즈 시절의 명곡이자 존 콜트레인 최고의 역작인 'A Love Supreme'을 연주하고 있다. 이외에 건반주자 얀 해머가 드럼을 연주하는 등 세션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화려하다.


1974년에는 LA의 소울밴드 테이스트 오브 허니(A Taste Of Honey) 출신의 그렉 워커(Greg Walker)가 산타나 밴드의 새 보컬리스트로 가세해 [Borbollett]를 완성시켰다. 여기에서는 색소폰 주자 줄스 브로사드(Jules Broussard)도 세션으로 참여해 사운드에 색채적인 풍성함을 더해주기도 했다. 한편 같은 해 [Illuminations]가 공개되었고, 1976년에는 영국 BBC TV에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앨범 [Amigos]는 1976년 3월에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에까지 올라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수록곡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스트루멘틀 'Europa(Earth's Cry, Heaven's Smile)'는 당시의 기타키즈들이 한번쯤은 카피하려고 했던 감동적인 명곡이다. 이외에 드럼 하이 해트의 날카로운 비트-마치 예전 'Shift'를 듣는 듯한-와 타악기 등이 고루 빛나는 대곡 'Dance Sister Dance(Baila Mi Hermana)'도 주목할만하다. 일본 음악 평론가 협회로부터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 이어 [Festival]이 공개되었고, 이듬해 10월엔 [Moonflower]가 공개되었다. 산타나와 탐 코스터(Tom Coster)가 공동 프로듀스한 이 앨범에서는 로드 아전트(Rod Argent)가 작곡한 'She's Not There'가 큰 인기를 얻었다. 원곡을 남미적 체취가 늘씬 풍기는 열정적인 사운드로 리메이크한 이 곡은 이후 산타나의 대표곡 중의 하나로까지 평가받기에 이른다.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까지 오른 바 있다.

 

1978년 10월에 발매된 [Inner Secrets]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음직한  'Open Invitation' 등을 위시한 곡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이듬해에 공개된 [Oneness-Silver Dreams Golden Reality]는 산타나의 신비주의적 기호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동양철학, 특히 선(禪) 사상에 대한 심취 정도를 여실히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앨범 자켓에도 'The Solo Album-Devadip Carlos Santana'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수록곡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Oneness'이다. 제목에서도 명상적 종교적인 체취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건반의 차분한 배킹을 기반으로 사색적이며 종교적인 기타 솔로가 흐른다. 와와가 아주 미묘하게 걸려 음색이 변해가는 것도 주목해서 들을만하다. 'Song For Devadip'도 대곡 중의 하나다. 처음엔 차분하게 전개되다가 점차 록적인 형태로 흐르는데 특히 후반부에서 와와기타가 강렬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산타나의 명상과 신비주의가 록의 이디엄으로 용해된 앨범이다. 산타나로서는 대중적인 데에 얽메이지 않고 오로지 음악적인 순수성을 보인 마지막 작품이 되는 셈이다.


1979년 9월에 등장한 [Marathon]부터 산타나는 본격적으로 대중적 팝음악의 노선을 걷게 된다. 키쓰 올슨이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그간 라틴록의 정도만을 걸어오던 그답지 않게 산타나의 곡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팝적인 넘버 'Lightning In The Sky', 'Stand Up' 등을 필두로 다수의 곡들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팝음악의 노선을 견지한다. 수록곡 중 타악기의 비트가 현란하게 연출되는 'All I Ever Wanted'는 차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본격 대중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앨범인만큼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도 10위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앨범부터 제프 벡, 브라이언 오거 등과 활동한 바 있는 알렉스 리거트우드(Alex Ligertwood)가 리드보컬로 활동했다.   
[Marathon]에서 평론가들로부터 외면을 당해서인지는 몰라도 1980년 산타나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Swing Of Delight]라는 앨범이 그것이다. 건반의 허비 행콕, 드럼의 토니 윌리엄스와 하비 메이슨, 베이스의 론 카터, 색소폰의 웨인 쇼터 등 당대 재즈록의 거장들이 대거 참여해 재즈록의 현란한 잼을 한판 벌인 이 역작을 통해 산타나는 자신이 여전히 음악적으로 무죄임을 증명했다. 수록곡 중에서도 'Swapan Tari'라는 작품은 산타나의 기타솔로가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곡이다.


[Swing…]의 타이트한 긴장감과 명석하고 대가적 플레이에 반해 1981년 4월에 공개된 앨범 [Zebop!]-키쓰 올슨이 프로듀스-은 그해 4월 18일 빌보드 차트에 등장해 9위까지 오르는 등 크게 히트한다. 전체적으로 산타나의 기타도 좋지만 리드보컬과 타악기의 연주가 특히 색다른 감동을 전해준다. 1940년대의 재즈넘버를 우수에 가득찬 라틴록 인스트루멘틀로 연주하고 있는 감동적인 'I Love You Much Too Much'는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히트 차트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Winning'이 빌보드 싱글차트 17위에 올라 앨범 판매에 불을 당겼다. 아만도 페라자(Armando Peraza)의 타악기기 종횡무진 현란한 비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1982년 8월에 공개된 [Shango]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으로 'Hold On'이 있다. 이곡은 동년 8월 14일 빌보드 싱글차트에 처음 등장해 15위까지 올랐으며 무려 14주 동안이나 차트에서 계속 강세를 떨쳤다.

 

1983년의 [Havana Moon]과 1985년의 [Beyond Appearances] 등에 이어 대중적 인기를 확고히 한 산타나는 1986년 영화 [라 밤바(La Bamba)]의 사운드트랙까지 작곡하며 전방위적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1987년 영국-소비에트 록 콘서트에 참가해 음악이 이데올로기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 그는 같은 해 10월 [Blues For Salvador]라는 앨범을 발표한다. 산타나 자신이 체스터 톰슨과 공동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한달후인 11월 7일 처음 빌보드 앨범 차트에 진입하기 시작했으나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산타나로서는 비교적 색다른 스케일과 코드웍을 시도한 앨범이라 그간 산타나의 서정미와 감미로움, 라틴적 정서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앨범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앨범은 전체적으로 매우 심오하고 사색적 명상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수작이었다. 'Blues For Salvador'나 'Bella'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타나의 기타는 매우 블루지하며 재즈적인 면도 내포하고 있다. 비록 상업적으론 실패했지만 산타나 기타의 무르익은 음색과 라인, 그리고 음악성을 접할 수 있어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아내었다.


전작 [Blues…]의 대중적 실패 때문인지 [Freedom]에서는 다시 대중적인 영역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흔적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듣기에 부담이 없는 곡들이 대부분이며 'Love Is You'와 같이 전형적인 산타나식 우수의 멜로디가 깃든 인스트루멘틀도 있다. 수록곡 중 'Deeper, Dig Deeper'에선 산타나가 의외로 매우 트리키한 솔로 프레이즈를 펼쳐 놀라움을 준다. 현대적인 감각의 세련된 오블리가토는 정말 산타나인가 할 정도로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이다. 


1988년에는 [Viva Santana!]를 공개했고, 1년후엔 산타나에게 큰 영향을 준 블루스 기타리스트 존 리 후커의 솔로앨범 [The Healer]에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얼마후 산타나는 [Spirit Dancing In The Flesh]를 발표하고, 1992년 폴리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후  [Miragro]를 발매했다. 계속해서 [Sacred Fire](1993), [Dance Of The Rainbow Serpent](1995) 등을 공개하며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산타나의 음악적 공로를 인정해 1998년에는 미국 LA의 선셋대로 땅바닥에 역사적인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새겨 넣는 소위 'Hollywood Walk Of Fame'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1년후에 에릭 클랩튼, 로린 힐, 데이브 매튜스 등을 대거 초빙해 완성한 [Supernatural]로 산타나는 다시금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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