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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다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51
야노쉬 글 그림, 조경수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현실에서 엄마와 갈등 상태에 놓인 한스가 주문을 외며 커다란 털북숭이 곰으로 변신하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프 먹어! 식탁에서 팔꿈치 치워! 다리 떨지 마! 신발은 그새 또 벗었니?" 한꺼번에 세 가지를 동시에 지시하고 한 가지를 금지하는 한스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바로 내 모습과 닮아서이다.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평일날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세 시간여 정도 밖에 안 되는 탓에 나는 늘 마음이 급해진다. 밥을 빨리 먹이고 숙제를 봐 줘야지, 정리 습관도 몸에 배게 해야 하는데, 오늘 학교에서 잘 지냈나 물어 봐야겠어,콩쿨 나가려면 피아노도 한 5분쯤 쳐야 할텐데, 오늘도 동화책은 30분 밖에 못 읽어 주겠네 등등. 내 머릿속엔 해야 할 일들로 뒤죽박죽이 되고 조바심 나는 날이면 더더욱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하루 일과를 이야기 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 순간이 서로 가장 행복한데도 나는 왜 자꾸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 하고 그들의 행동을 바로 잡아 주려고 하는 것일까?
마치 아이가 그린 듯한 다소 거칠고 투박한 작가의 그림이 아이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해 주는 것 같고 이 동화책이 의도하는 관점, 즉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라는 주제에 더 걸맞는 것 같다.
경악하는 엄마를 두고 빨간 의자에 올라서서 거만한 눈빛으로 엄마를 내려다 보는 털북숭이 곰 한스는 작은 의자를 들고 외출을 한다.
그리곤 두려움의 대상이던 개 링고-빙고에게 위협적인 눈빛을 던져 주고 의기양양하게 학교로 간다. '커다란'학교로 가서 교장 선생님께 더운 날씨 때문에 휴교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시종일관 빨간 의자를 들고 다니는 털북숭이 한스는 작은 사물에 집착하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어른들보다 더 힘센 존재로 변신하여 어른들에게 거꾸로 명령을 내리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곤 친구 페터 프레제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기 시작한다. 도로를 점령한 자동차들을 전부 세우는데 교통 경찰 아저씨의 모자를 빌려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
자동차를 세우라는 페터 프레제의 말은 어른들이 보기엔 어처구니 없는 요구이지만, 한스는 친구의 말 속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알고 이행한다.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운전자들에게 역설하는 것이다.
힘 센 털북숭이 곰 한스에게 집에 가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어 비는 어른들의 모습은 참 풍자적이다.
한스와 친구는 차를 사러 간다. 장난감 차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1학년들의 상상 속 소망은 진짜 차를 사서 운전하는 것이다.
만약 가다가 강이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할지 아니?
난 우리 차를 들어서 강 건너로 옮길 거야.
페터 프레제가 좀 도와 주겠지, 뒤에서. 당연해.
한스가 강 속에서 차를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는 모습을 본 우리 아들들은 전부 괴성을 질러 댔다. 놀람과 부러움이 잔뜩 배인 괴성.....
한스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여자 친구에게 가서 입맞추고 자랑스런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여자친구는 놀라워하고 여자친구와 나란히 빨간 의자에 앉은 한스는 진짜 한스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털북숭이 곰으로 신나게 하루를 살면서 한스는 "당연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아이다운 어투를 들으며 나는 당돌하고 귀여운 한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크고 힘센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라면 작고 연약한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이다.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권력의 힘까지 지닌 어른들에게 "우리 마음을 좀 헤아려 주세요!"라고 아이들 모두가 말하는 것 같은 이 동화책은 어른들이 모두 한 번쯤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잣대로 늘 아이들을 평가하고 억누르고 있는 건 아닌 지 한 번쯤 되돌아 보았으면 좋겠다.
아이의 마음을 잘 포착한 작가의 눈이 마음에 들고, 이 책을 함께 읽다가 아이들이 킬킬대고 시원스런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며 함께 웃어주고 교감하는 엄마들이 많이 생기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