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년의 역신들 - 계유정난과 사육신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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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사에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세상 물정과 경륜,정치관이 뚜렷하지 않아 대신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린 왕이 치세를 할만한 경륜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국내의 모든 일을 관장할 수가 있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마자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거라는 의구심과 영웅심이 발동하여 나이 어린 왕을 배척하고 유배시키며 자살로 생을 마감케 했던 인물이 조선 7대조 세조이다.그가 바로 수양(首陽)대군으로 세종의 아들이었고 비운의 왕 단종(端宗)의 숙부이기도 했던 그는 1453년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숙적이었던 김종서와 안평대군(그의 아들까지)을 자객을 시켜 제거하고 유배보내기도 하는 등 세조는 탄생과정이 찬탈이고 피로 얼룩졌다고 보여진다.

일명 계유정난이라고 일컬어지는 단종 제거 및 유배는 조선 정치사에서 비극중의 비극이다.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받고 중국 명과의 사대교린을 지키며 명으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받으며 조선 왕조 7대 왕으로 13년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도했던 것이다.

어린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한많은 세월을 보내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는 등 치욕과 굴욕을 삼켜야만 했다.과연 단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수양대군 개인의 입신출세라는 명예와 권력욕에 다름 아닐 것이다.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왕권의 정통성를 잇고 국가의 체모를 제대로 수립하기 위해 단종 복위에 앞장선 인물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다.단종 복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물은 태형 및 변방의 노비로 보내버리고 주모자들은 거열형에 처하는 등 극형을 일삼았다.

* 사육신 :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유응부,이개

* 생육신 : 김시습,원호,조여,남효온,이맹전,성담수

단종 복위를 적극 제거하기 위해 정난공신이 있었으니 그들이 한명회,권람 등이다.특히 한명회는 난세의 인물로서 30대 후반에 권람에 의해 말단 공직에 부임하고 말년에는 이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권력의 요람을 왔다 갔다 했던 인물이고 죽어서는 부관참시라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다.세종조 집현전에서 학문을 쌓기도 했던 성삼문 등은 세조의 눈에 가시가 되어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노산군은 세조의 사사의 명이 알려지면서 결국 쓸쓸히 청렴포에서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를 따르던 시종과 궁녀들은 단종의 죽음을 쫓아 동강의 금강정 절벽에서 몸을 던짐으로 써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단종이 죽고 244년이 흐른 (1701년) 숙종에 의해 단종 복위가 이루어지고 단종에 대한 명예가 회복된다.다만 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효온에 의한 육신전과 조선왕조실록의 비교표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예를 들어 단종의 왕위 등극시 나이를 육신전은 16세,조선왕조실록은 13세로 기록되어 있고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어야 될지 말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이다.이는 사료와 기록에 의한 깊은 고증과 방증이 필요할 것이고 사학자 및 연구자들의 객관적인 결과를 기대해볼 뿐이다.

세상 경험이 부족하고 철이 덜든 단종은 문종의 적자로서 당당히 왕위에 올랐지만 불행하게도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단종 복위 운동에 노산군(단종)도 연루되었다고 확정짓고 세조의 치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그를 사사하려 했고 그는 사약을 받는 대신 차라리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단종의 비애이고 운명이 아닐까 한다.사필귀정이 통했던 것일까,단종은 다행히도 숙종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고 명예가 회복되어 그에 대한 시시비비가 가려지게 된 것은 역사를 바르게 세우려 했던 생.사육신의 노력과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후학들의 노력의 결정체가 아닐까 한다.어린 나이로 괄시받으며 유배까지 가야만 했던 비운의 단종의 모습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는 그의 한(恨)과 시름이 녹아져 있는것만 같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 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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