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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民國을 꿈꾼 탕평군주
김백철 지음 / 태학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탕평(蕩平)이란 의미는 당파간의 격력한 정치적 알력(軋轢)을 해소하기 위해 모색되고 실천된 정책으로 당파간의 정치적 대립과 분쟁이 없이 소융(消融).보합(保合)을 이룬 상태이다.조선 27대 왕조 중에 탕평하면 영조가 떠오른다.아버지 숙종과 이복형 경종(재위 5년)의 뒤를 이은 연잉군 영조는 역대 왕조 중에서 최장수를 누린다.그의 치세 기간 중에 가장 으뜸인 것은 주공의 주례를 통한 민본의식과 각종 부조리한 제도 개혁,양역변통을 통해 국가의 위기와 난관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려 했다.'옥의 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임에 이르기까지 한 장본인이기도 하여 영조를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성군 여부가 엇갈리기도 한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발단이 되어 결국 사색당쟁으로 붕당정치가 횡행하면서 나라의 발전은 더디고 민생은 피폐화 되어 가기에 영조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내세워 흐트러진 나라를 되살리고 민심을 보듬어 가는데 주력하였다.안으로는 세종의 문화정치를 받들고 밖으로는 주공의 주례를 받아 들였다.이를 바탕으로 각종 제도와 세제 개편,인사 정책 등을 앉아서 명령하는 형태가 아닌 실질적으로 두 팔을 걷어 부치며 발안과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그것이 바로 속대전,속오조례,균역법,중앙과 지방의 인재,인사 정책 등에서 엿볼 수가 있다.특히 인사 정책은 친히 성균관에 가서 시범 강의에 해당하는 시학례(視學禮)에서 주례를 진강하도록 했는데 주례의 근간은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대목인데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君以民爲天)라는 것으로 유교적 민본 의식의 표현을 제시했다.물론 이 표현은 그의 부왕 숙종때부터 있었으며 국왕과 백성간의 관계 설정의 배경에는 양역변통이 있었는데 양역문제의 심각성과 구황 대책을 거론할 때엔 이러한 백성관을 십분 이용했고 18세기 조선 사회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조는 군역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종래 양민들로부터 받은 베 2필을 1필로 감하고 어염,선세를 추가로 균역청에서 관리하는 등 양민들의 고통을 완화하는 균역법도 설치하였다.대외적으론 국제 정세가 안정되어야 하고 외세의 침략 가능성이 현격히 줄어들고 북벌 논의도 중단되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청나라가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한다.이에 18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도 양정의 수도 변동폭이 안정화되고 환국이 종식되어 영조는 탕평정치를 일관성 있고 강도 높은 대개격으로 추진할 수가 있었으며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상적인 성인 군주 요순의 강조가 도덕성을 강조하는 듯 보였지만 요순과 동일시된 국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로 재탄생했으며,이를 전재권력의 형성으로 변질되었으며,재위 전반기에 붕당 간 경쟁과 균형을 모색하면서 속대전의 편찬과 균역법의 탄생을 이끌어 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을해옥사 및 임오화변 등 정국변화에 밀려 국책 사업들이 소강 상태에 놓이게 된다.자신감에 찼던 영조도 뜻밖에 장수를 누리면서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했고 국책 사업들을 재추진하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국문헌비고 편찬,서얼(庶孼)의 등용,비공(婢貢)의 폐지 등이다.이것은 국왕의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이룩된 성과물이다.
이복형 경종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하에 탄생된 영조는 최장수의 재위를 누리면서 그가 꿈꾸던 민국의 이념을 절대화했으며 제도와 문화,세제,인사 정책에 이르기까지 절대권력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잘못된 제도를 개혁하고 백성을 하늘로 여기려 했던 그의 이념은 반대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의지와 실천력이 귀감이 된다.영조의 다양하고도 전방위적인 치세와 정책을 통해 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탕평책과 균역법을 통한 신료와 백성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잘 사는 조선을 꿈꾼 그의 신념과 정치철학이 아닐었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