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시대가 만든 운명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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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유학자이면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인 정약용의 탄신 250주년(1762년생)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한 역사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행해지고 있는거 같다.정약용이 태어난 해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부친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던 해와 일치하고,그가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벼슬을 하던 아버지 정재원의 학문적,관료적인 후광을 받지 않았나 싶다.

 

정약용의 시대는 정조와 함께 호흡을 맞춰 정사를 이끌어 갔기에 정조의 오른팔 격이었다고 생각된다.그만큼 정조 아래에서 정약용은 엄한 관료교육을 받았으며 정조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의 포부와 의지를 불살랐다고 생각한다.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영남 만인소』로 이어지는 사도세자의 원한 풀기가 정조에게 큰 힘을 실어 주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처가쪽,영조를 지지했던 노론 세력들을 척결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장지를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존호 장헌세자,묘호 영우원,사당 경모궁) 농경을 위한 저수지 만석보를 설치하고 기중기,배다리 등을 정약용에 맡겼다.

 

당시 조선에는 천주교 즉 서학이 들어오면서 노론세력에게 빌미를 안겨 주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위폐 폐기사건이다.또한 정약용의 집안은 맏형 정약종을 비롯하여 매형 이승훈,중국에서 들어온 주문보 등이 천주교와 연루되어 감시와 탄압,극형에 이르는 멸문지화를 입게 된다.다행히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극형만은 면하고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는 신세가 된다.

 

정조를 비롯한 정약용 등의 남인 세력과 심환지 등의 노론 세력이 당대의 양대세력이었는데 정조가 집권시에는 노론 세력이 잠잠해지기도 했지만 천주교 문제만큼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데,그것은 조선의 정체성과 조상에 대한 음덕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좌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조선의 대학자에게는 스승이 없다는 점이다.이황.조식,이이.유형원.이익.윤휴.정제두가 그러한데,이것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도 관련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다.다만,정약용은 부친 외에는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없지만 서적 등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私塾)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교화하고 세뇌시킨다.유교와 성리학이 국체였던 조선시대에 천주학은 당연히 국체를 말살하는 이교이었기에 천주교인들을 잡아다 문책하고 탄압하며 멸문으로 만들었던 것은 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다만,유교와 성리학을 이끌고 나라를 이끌어 갔던 세력들이 정조 사후 몰아 닥친 천주교 탄압의 회오리를 비롯하여 안동김씨,풍양조씨 등의 세도정치,해방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수구세력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조의 인사정책은 큰 인물이 될 사람은 커다란 시련을 감내하게 하게 하고,노론들을 절대 등용하지 않는 점이다.척신정치의 음습한 유산을 발본하려 했던 그의 의지가 강력했다고 보여진다.나경언의 고변과 장인 홍봉한 등이 음모를 하여 사도세자를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고(사도세자는 온양온천 행차시 성군과 같은 자질을 지녔다고 증언하고 있다),천주학이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노론의 등용을 차단하려 했던 인물이다.

 

정약용은 큰 형의 멸문의 아픔을 뒤로 하고 암행어사와 곡산부사를 거치면서 관료로서의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군자의 도는 자라고 소인의 도는 소멸하는'성인의 시대였던 정조의 시대는 그의 의혹에 쌓인 죽음과 함께 정순왕후를 비롯한 노론세력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고,정약용은 정조와 주거니 받거니 하던 시절은 가고 파란만장한 유배의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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