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정조 말엽의 신해박해(진산사건)을 비롯하여 순조대에 신유박해(주문모 등 처형),기해박해(풍양조씨 권력 탈취 목적)을 거쳐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유교를 절대시했던 당대의 사회이념과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위였기에 신자를 비롯한 선교사 등 다수가 참수,교살,추방 등을 당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은 프랑스 선교사로서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후 조선 선교지로 배속되어 조선에 들어왔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중국에서 조선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1877년 조선 선교자로 들어와 포교하던 중에 잠입 사실이 발각되어 투옥되고 그 감옥생활과 천주교 신자 및 조선에 대한 애정을 각별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한 리델은 어린 시절 추진력과 품성을 주위로부터 높이 사게 되고,1860년 고국 프랑스를 떠나 1년 만에 홍콩에 도착한 다음,중국 산동성 푸쳬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지만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선교사 및 신자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게 된다.이에 리델은 조선에서의 포교 생활을 보류하고 교구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중국에 머문다.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은 이를 잡듯 샅샅이 탐문하고 천주교와 관련한 책과 의복들을 땅에 묻는 등 천주교의 뿌리를 뽑으려 했던 것이다.
로즈제독에 의한 프랑스군의 강화읍 점령은 프랑스 선교사 9명에 대한 사죄요구였는데,조선 조정은 묵묵부답이었기에 한바탕 조선군과 난리를 치렀으나 별효과를 보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리델이 조선에서의 포교생활 6년을 마치고 추방형식으로 쫓겨나게 되지만,그가 후일 남긴 조선어 사전과 조선 지도,지명 사전은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그가 조선 백성들에게 복음화하려 열정적인 노력과 의지는 커다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조선의 백성과 자연,풍물을 사랑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그가 체포되고 수감 생활을 하면서 옥졸들로부터의 문초와 심문,추방으로 쫓겨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일지형식으로 잘 그리고 있다.또한 당시의 조선 국내의 상황과 제도 등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다행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