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는 한 달 내 기다리던 황금 같은 기회였습니다. 올해부터 학교 차원에서 <동호인 활동>이라는 것을 계획해서, 매 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에 부별로 취미활동을 나가게 되었거든요. 저는 <영화관람부>이지요.^^ 아줌마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애들 어릴 땐 영화 볼 시간 내는 게 어렵잖아요. 그런데, 직장에서 공식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이나마 그 기회가 담보되니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어제 보려고 계획한 영화는 <아홉살 인생>이었죠. 동생에게 “야, 홍반장하고 아홉 살 인생,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물으니 <아홉살 인생>이 더 낫대요. 가방을 싸고 대기하는데, 함께 나가기로 한 후배가 좀 늦어지더군요. 영화 시간이 되려나...조금 초조하긴 했지만, 멀티플렉스 극장의 내공을 믿었습니다.
영화관에 가면서 후배랑 얘기를 하다보니, 이 친구 얼마 전 <허니>를 봤는데,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아...허니! 작품성이야 허접하다고 평론가들의 구박을 받았지만, 제가 원체 춤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플래시 댄스, 더티 댄싱, 쉘 위 댄스, 코요테 어글리...참, 그 옛날 람바다까지.^^ 머리 비우고 기분 up시키기 좋을 것 같아 볼 영화는 급작스럽게 <허니>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준비성이 없이 갔나봅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2:00였는데, <아홉살 인생>과 <허니>는 1:40분에 시작해 버리고, 2시 대에 하는 영화는 <맹부삼천지교> 밖엔 없는 거예요. 으흐흑....나오기 직전 애마태우스님의 구박 어린 영화평을 보고 왔는 데다, 전혀 당기지가 않더라구요. 슬픈 마음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비우고는 그냥 집에 갈 수 없어서 부평으로 이동했지요.
부평에는 <오0쥬>라고, (나름대로)대형 스크린에 미개봉작 영화들을 보여주는 커피숍이 있거든요. 시간 많고 운 좋으면 커피 값 4000원에 보고 싶던 영화를 2~3편 볼 수 있는 멋진 곳 이예요. 단점이 있다면, 담배냄새가 좀 심하다는 것과 영화를 중간부터 봐야 하거나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본 손님이 많으면 밀린다...는 정도. 두근거리는 마음에 문을 밀고 들어가니....어라? 김정화의 얼굴이?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상타.... 이 사장님, 어차피 불법 영업 하면서 우습다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영화는 극장 가서 보세요~”하는 굳은 신조가 있는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왜? 한국영화 점유율이 높아져서 그 신조 포기했나? 아님,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 그렇게 보호해줄만한 가치도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셨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신기하더군요. “설마 이러이러하랴.”하고 비웃으며 예측한 결과가 몽땅 맞아떨어지는, 유치의 극치였습니다. 그래도 막바지라 다행이라고, 후배들에게 다음 영화는 <허니>로 밀라고 엄포를 놓으며 기다렸죠. 그 시간 커피숍에는 두 명씩 두 테이블, 우리는 세 명. 후배 둘만 잘 꼬드겨 놓으면 상당히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영화가 끝나고, 사장님이 “뭐 보시겠어요?”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냅다 “허니요~!!!” 하고 외쳤죠. 그런데 오잉? 옆 테이블 남자가 저 못지않은 큰 소리로 “배틀로얄 2요!!!!” 하는 겁니다. 안돼에~~~~ 제가 유치한 한국 코미디영화보다 더 싫어하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엽기 공포물. 저 겁 많은 건 다들 아시죠? 도대체 왜! 돈을 내고 공포감에 진저리를 쳐야 하는지...TT 사장님의 간단한 영화 브리핑이 끝나고, 거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배틀로얄 보실 분~” “....네, 배틀로얄로 하겠습니다.” 어, 어라? 사장님, 허니는 손도 안 들어보고? 흠...추측하건데, 저희 셋을 제외한 두 테이블 네 명이 몽땅 손을 든 모양입니다. TT
영화는 저의 슬픔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배틀로얄 1은 안 봤습니다만, 그 엽기적인 소재에 대해서는 물릴만큼 들어왔지요. 2편도 엽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더군요. 전편의 줄거리가, 어른들이 판단하기에 무가치한 비행청소년 집단을 선정하여 섬에 넣어놓고 서로 죽이게 한다는, 그래서 승자 하나만 살려준다는 내용이지 않았습니까? 2편을 보니 1편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배틀로얄을 반대하는 테러리스트가 된 모양인데, 2편의 청소년들은 그 두 테러리스트들을 잡아야 살려줄 모양입니다. 싸우기를 거부한 한 남자아이를 무참히 죽이고, 그 남자아이와 짝이었던 여자아이는 덩달아 폭탄목걸이(!)가 폭발해서 죽고... 폭발하기 전의 ‘삑, 삑, 삑삑삑삑...’하는 경고음과 여자아이의 공포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결국 저는 그 장면까지 보고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그런 영화를 버젓이 찍어내고, 흥행시킨 일본의 정서가 제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군요. 배틀로얄 2로 선정된 아이들의 버스(얘네는 졸업여행 중에 단체 수면되어 납치됩니다)를 숱한 언론이 따르며 대단한 스포츠 중계라도 하듯이 꽥꽥거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전반부 잠깐을 봤는데도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잔상이 사라지질 않는군요. <모 시대, 모 군국국가의 청소년이 대상이 된 잔혹한 게임>이라는 설정은 스티븐 킹의 작품 <완전한 게임>(원제는 롱워크)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에 독자를 몰입시키는 스티븐 킹의 귀신같은 글솜씨가 근사했지요.(안타깝게도 지금은 절판^^;) 배틀로얄 2도, 편견을 버리면 나름의 개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2시간의 강력한 스트레스를 감내할 능력이 제겐 없군요.
와, 글이 무지무지 길어졌네. 요약하자면, 기대했던 어제의 영화관람은 결국 참혹하게 뭉개졌다는...슬픈 얘기입니다. 흑흑흑.....